수 십 조를 쏟아 붓겠다는 농촌대책과 '삶의 질' 특별법에 이상하게 농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농토로 쓰겠다고 만든 간척지에는 골프장이 들어서고, 농촌개발에 힘쓰겠다는 정책은 전원주택을 위한 정책으로 탈바꿈됐다. 외국에서 들여오는 값싼 농산물에는 장시간 수송에 따른 포스트하비스트(Post Harvest) 농약이 일상적으로 뿌려지고 있고, 성장촉진호르몬제를 듬뿍 맞은 먹거리나 유전자변형식물(GMO)들이 종자와 상품시장을 석권했다. 주고 받기 식 통상협정이라는 관문을 통해 들어온 정체를 알 수 없는 값싼 농산물이 우리 식탁에 오르고 있다. 우리의 먹거리는 안전할까.
필리핀에는 카무칸(Kamukhaan) 이라는 작은 공동체 섬마을 있다. 어느 날 라데코(Ladeco)사가 마을에 속해 있던 토지를 점유하고 미국의 다국적기업 돌(Dole)에 공급하기 위한 바나나 대농장을 세웠다. 이 기업은 한 달에 2-3회 정기적으로 농약을 살포하여 수출용 바나나의 품질을 유지했다.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은 복통과 두통에 시달렸으며 농약 살포기간에는 더 심해졌다. 유아들은 선천적인 질병을 갖고 태어나거나 기형으로 혹은 온갖 피부병을 갖고 태어났다. 특히 바나나를 보호하는 농약이 마을 주민들의 결정적인 소득원이자 기름, 식량, 연료, 건축재료로 쓰이던 코코넛 나무들을 고사시켰다. 농약이 뿌려질 때마다 가축들이 줄어 가축을 기르는 것도 불가능해 졌고 주변 지역에 흐르는 하천수를 마음 놓고 마실 수 도 없었다. 초토화된 지역경제와 카무칸 농민들의 생존권은 어떻게 되야 할까?
속칭 곡물메이저라 불리는 기업들은 시장 개방 뿐만 아니라 이런 기술을 개발하기도 한다. 농민들이 시장에서 종자를 사서 쓰지 않고 직접 체취해서 다음해에 파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속칭 '종자 불임'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 종자를 사용한 농민들은 다음해에 종자를 다시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해마다 기업에서 파는 새 종자를 살수 밖에 없다. 또 이런 기술도 있다. 자사의 특정 농약이 살포되어야만 싹이 트고 성장하도록 유전자를 조작하는 기술. 이 역시 특정 상품을 사야만 생산이 가능해 지는 메커니즘이다. 이 역시 개발 중이라고 한다.
무엇이 문제일까. 아니 문제가 없나?
여기서 우선 너무 당연한 얘기 한 가지만 정리한다. 인간이 먹고 마시는 모든 먹거리는 생태계의 산물이다. 인간이 건강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지속가능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농약보다는 친환경적인, 생산량보다는 안정성에, 수익성보다는 인간과 생태계에 중심을 두고 생산되어야 한다. 이는 농업이라는 자연환경을 기반으로 한 산업 특성의 기본 조건이다.
-*-
WTO체제 하에서 농산물은 무역의 상품이 됐다. 대량의 농자재 투입, 대량 생산, 대량 유통, 대량 소비가 이뤄진다. 카길(Cargill), 붕게(Bunge), ADM(Archer Daniels Midland ), 콘아그라(ConAgra)의 초국적 곡물 메이저들은 국경을 뛰어넘어 종자, 비료, 농산물 등 먹거리와 관련한 모든 산업을 관장한다. 먹거리가 무기가 되기도 하고, 산업적 경쟁력이 되기도 한다. 투자도 과감하다. 조금이라도 물꼬가 트일 요량이면 생산비에도 못 미치는 저가 덤핑도 서슴지 않는다. 이들은 명확히 알고 있다. 한번 초토화 된 농업 시장을 다시 되살리기가 정말, 정말 어렵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들에게 종속되면 될수록 그들의 안정적 이익은 늘어난다는 것을. 그러나 'UR 타결이후 한국 농업이 망했냐'고 되묻는 한국 정부만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
지난 1월말에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내놓은 '농업전망 2005'라는 보고서에 인용된 통계자료를 보면 도시가구 소득 대비 농촌가구 소득비율이 94년 99.5%로 거의 대등한 수준이었으나 2000년 80.6%, 2003년 76.2%로 해마다 격차가 점점 커지고 있다. 농민, 농촌은 고령화, 만성적인 농가 부채, 소득불안정 및 소득불평등의 문제들로 인해 어쩌면 '붕괴' 직전의 극에 달한 상황인지도 모른다.
-*-
상반기, 정부의 쌀 협상이면 합의로 인한 파장은 통상협상 최초의 국정조사를 실시하게 만드는 쾌거를 이뤄 내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국회의 본 회기를 맞으며 수면으로 가라앉아 있는 쌀 협상 비준 문제는 또 다시 폭풍의 핵으로 급부상할 준비를 하고 있다. 9월 10일 고 이경해 열사 2주기 투쟁을 준비하고 있는 세계적인 농민단체 비아깜페시나는 '반WTO투쟁'의 기치를 내 걸고 반세계화 투쟁에 매진할 것을 밝힌 바 있다. 9월 1일부터 한국의 농민단체들 총력 투쟁을 준비하며 정부와의 한 판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다시 국회 앞의 긴장이 고조되는 요즘이다. 정부 또한 만만치 않다. 이면 합의가 아니라고 '억측' 주장을 펴던 것을 넘어 이제는 '통상협상을 마무리 해 놓고, 수 개월 이나 발효를 못하는 것만큼 국가 신뢰도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 없다'며 신인도 하락을 주장하고 나섰다.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의 신용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냐'며 억측을 부린다. 대책 없는 정부의 논리는 여전하다.
언제나 농민과 농업은 '경쟁력이 없다'는 이유로 재물이 된다. 첫 번째 칠레와 FTA를 체결할 당시에도 정부는 핸드폰을 비롯한 공산품 수출을 강조했다. 최근 진행된 한-멕시코 FTA 공청회에서 미주 대륙으로 확장, 진출하는 자동차 산업과의 맞교환 얘기가 나왔다. 한국이 농업 수출국이 아닌 이상, 한국의 산업적 특성상 농업은 언제나 공산품, 서비스 상품에 비해 밀릴 수밖에 없다. 그래, 경쟁력이 안되니 그 산업을 폐기할 것인가. 비교우위와 국제분업에 입각한 세계무역 질서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인가. 정부의 '통상개방정책' 논리는 '민물고기를 바다로 옮기는 식'으로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농업만 그럴까. 그렇지 않다. 세계화의 흐름은 농업의 영역만이 아닌 물, 에너지, 노동, 서비스, 지적재산권 등 방향제를 뿌린 공기처럼 모든 영역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정부는 국내법 개정을 통한 자발적 자유화 조치도, 적극적으로 통상협정에 임하는 등 그 나름의 충실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참세상은 세계화의 '깍두기' 노릇을 하는 WTO 6차 각료회의를 앞두고 한국 사회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는 세계화의 현상들과 폐해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공중에 떠 있는 세계화가 아닌 우리 밥상, 나의 일터, 아이들의 교육, 아플 때 찾아가는 병원에까지 일상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세계화를 하나씩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이러한 ‘이런 세계화를 누가 주도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의 답도 찾아 볼 계획이다.연재기획 '세계화와 한국농업' 순서
1. 기획소개 '세계화와 한국농업'
2. 거꾸로 가는 한국농업
3. 농업의 세계화 누가 주도하는가
-UR에서 부터 WTO 까지
4. 경쟁력 지상주의를 그대로 답습하는 노무현 정권의 농정 - 누구를 위한 구조조정인가
5. 우리 농민은 정말 행복한가?
6. 친환경농업이 한국농업의 대안이 되려면...
7. 협동조합의 역할과 미래
8. 식량보장을 말 한다
9. 한국농업의 길
*그 외 관련 취재 기사들 배치 예정
특별기획 '세계화와 한국농업'은 오늘(8/29)부터 시작해 9월 초 농민 집중 투쟁기까지 아홉 차례에 걸쳐 기획 연재된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떻게 농업의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고, 그로 인해 한국 농업이 어떤 영향을 받았고, 따라서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를 다룬다. 물론 지금까지 한국 농업을 지키고, 만들어 온 농민과 노동자의 얘기도 함께 풀어갈 것이다. 기획의 초점은 농업의 세계화를 주도하는 배경, 그리고 세계화를 지원하고 있는 정부 정책이 과연 무엇이고, 어떻게 농민들을 우롱하고 국민들을 현혹시켜 왔는가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첫 술에 배부를 순 없지만 그 음식의 맛 정도는 알 수 있지 않을까. 이번 기획으로 한국 농업에 대한, 자본과 정권의 세계화의 정책과 이데올로기들을 모두 꿰뚫을 수는 없겠지만 '아, 이런 맥락이었던 거구나'를 훑어보는 의미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연재 과정에서 부족한 부분은 채워주고, 의견이나 생각이 있다면 덧글을 달아주길 바란다. 양파껍질 까듯 맵고, 눈물나게 아찔한 기획이 되긴 어렵겠지만 반세계화 투쟁의 내용들을 채워갈 수 있는 기획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관심 있게 함께 해 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