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고통은 정치적 지도력과 정치적 전망의 부재"

[민주노총진단연속기고](1) - 갈림길에 선 민주노조운동, 발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민주노총이 강승규 수석부위원장 비리 사태를 둘러싸고 진통을 겪고 있다. 95년 민주노총 창립 이후 민주노조운동은 지금 최대의 난맥상에 빠져있다. 지난 99년 비대위 출범 시의 상황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 민주노조운동이 처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총 산하 조합원은 물론이고, 전체 노동자대중이 겪고 있는 고통과 어려움을 생각할 때 지금의 민주노조운동이 보여주고 있는 현실은 너무도 참담하다.

민주노총은 장시간 논의 끝에 하반기 투쟁 마무리 이후 현 지도부 총사퇴와 조기 재선거 실시를 최종 방침으로 결정했다. 덧붙여 이수호 현 위원장은 이번 사태에 대한 도의적, 대중적 책임을 지고 차기 선거에 출마하지 않을 것임도 밝혔다. 민주노총은 이와 같은 결정의 의미를 이번 사태에 대해 지도부 전체가 책임을 지되, 현안 투쟁을 앞두고 즉각 사퇴할 경우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무장해제 상태를 피하기 위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바로 이와 같은 결론 밖에 나올 수 없는 것 자체가 오늘 민주노조운동이 처한 현실이 얼마나 열악하고 피폐했는가를 반증하고 있다. 이번 사태는 단순히 특정 개인의 비리 문제가 아닌, 민주노조운동 전반이 처해 있는 구조적, 역사적, 정치적 한계와 누적된 과오를 드러내는 한 단면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책임져야 할 위치와 조건에 있는 현 지도부가 사퇴할 경우 오히려 무장해제에 직면해야 하다니 이 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 있겠는가!

민주노총 조합원과 전체 노동자대중의 힘으로도, 노동조합 간부와 현장 활동가들의 역량으로도, 노동자 정치조직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별 다른 방안이 제출되거나 시도되기 어려운 현실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비판은 가능할지언정 현실을 책임지고 타개할 수 있는 검증된 역량을 지닌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오직 1인1표의 방식에 따른 형식적 민주주의를 통해서만이 다수파를 형성할 수 있을 뿐, 노동자대중의 지도부는 없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오늘 민주노조운동이 처한 현실은 일조일석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최소한 95년 민주노총 출범 이후 꾸준히 누적되어 온 결과이다. 87년 이후 95년까지 민주노조운동을 이끌어온 방향과 동력은 노동해방을 향한 열망과 아래로부터 형성된 대중투쟁이었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민주노조건설은 그러한 방향과 동력을 담기 위한 그릇으로서의 의미를 띠고 있었다. 그 그릇은, 그릇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투쟁의 방향과 동력을 지속적으로 키우고 강화하는 데 필요한 일종의 형식이자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그러나 95년 이후 상황은 전복되었다. 노동해방을 향한 열망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노동자대중투쟁은, 그 자체의 목적과 의미는 점점 퇴색되고, 오히려 특정 그릇을 만들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 것이다. 민주노총 합법화, 산별노조로의 전환, 진보정당건설이 오히려 상위의 목적이 되고 말았다. 10년 사이 그것들은 얼추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성과(?)는 운동의 발전과는 동떨어진 결과를 낳고 말았다. 노동해방을 향한 열망은 간데없이 사라졌으며 노동자대중투쟁은 더 이상 역동성을 상실하고 집행부의 짜여진 일정을 맞추는 일종의 ‘행사’로 전락해 갔다.

민주노총으로 표현되는 오늘의 민주노조운동 내부는 크게 세 가지 측면의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가장 첫째는 운동의 상층과 노동자대중과의 분리, 괴리 현상이다. 상급단체, 단위 노동조합 간부, 현장활동가, 노동자 정치조직 등으로 분포되어 있는 운동의 상층은, 그들 사이의 정치적 입장과 태도에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 전체든, 특정 부위든 관계없이 사실상 노동자대중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둘째는 민주노조운동의 주요 세 세력으로 표현되고 있는 이른바 ‘국민파’, ‘중앙파’, ‘현장파’로의 정립이 정파로의 정당한 분화가 아닌 일종의 ‘끼리끼리’ 집단으로 퇴보한 것이다. 셋째는 대중조직과 노동자 정치조직과의 관계가 각각의 자주성을 바탕으로 한 정치적 긴장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각자의 이해를 유리하게 이끌어 가는 데 필요한 ‘전달벨트’에 머물러 있는 현상이다.


지금의 민주노조운동은 특히 IMF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반대, 노동유연화•구조조정 반대, 비정규직 철폐 투쟁 등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극심한 이데올로기적, 실천적 동요를 보여 왔다. 이 과정에서 민주노조운동은 한국사회의 변화와 변혁을 이끄는 핵심 동력에서 점차 ‘조합주의’ 운동으로 축소되었으며, 그 속에서 ‘관료주의’가 운동 전체로 번져 나갔다. 지도부 없는 투사, 투사 없는 간부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 민주노조운동의 엄연한 현실이다. 노동조합이 ‘조합주의’ 현상을 보이고, 그 속에서 ‘관료주의’가 싹 띄는 것은, 일부 불가피한 측면이 없지 않지만, 노동조합 운동 자체 또는 전체가 그렇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지 않다.


민주노조운동 안팎에 포진하고 있는 주요 정치 세력들 역시 각자의 정치노선과 정치적 전망을 완결적으로 밝히지 못한 채 노동자대중의 뒤꽁무니를 쫒으며 임시방편 수준에서 현학적인 정치적 수사만 나열할 뿐, 노동자대중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언어로, 자신의 정체와 전략을 수미일관하게 명확히 드러내 보이지 못하고 있다. 기껏 각자의 세력 확장과, 선거에서의 연합이 정치를 대체하고 있다. 이 때문에 노동자대중들 역시 정치적 판단과 선택을 하기가 쉽지 않으며, 당장에 벌어지고 있는 정권과 자본의 공세와 탄압에 대처하기에 급급해 하고 있다. 자연히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가 노동자대중을 감싸고 있다. 이러한 악순환이 지속되고 있는 지 벌써 오래이다.

이제 현 민주노조운동이 처해 있는 현실이 위와 같이 열악하고 피폐해 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지하는 것에서부터 문제를 극복할 방안과 대안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이게 곧 그동안 역사적으로 쌓여온 ‘구체적 행적’을 하루아침에 모두 없던 일로 하자거나, 모두에게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결론을 끌어내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책임을 남에게‘만’ 떠넘기고 그로부터 생기는 반사이익을 챙기려는 태도를 경계하려는 데 있다. 지금의 현실은 이런 안일하고 편의주의적인 방식으로는 조금도 변화할 수 없다는 것을 환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민주노조운동 상층과 각 정치세력은 이 기회에 자신들의 모습을 발본적으로 재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노동자대중에게 알리고 그로부터 신뢰와 지도력을 새롭게 구해야 한다. 이 순간에도 앙상한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거나, 그럴싸한 명분과 상황 논리를 앞세워 이 순간만을 모면해보려는 미봉책에 매달린다면 노동자대중이 치러야할 고통과 희생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런 차원에서 이번 민주노총 지도부의 결론은 참으로 무사안일 한 것이며 노동자대중의 요구와 동떨어진 태도라고 아니할 수 없다. 도대체 누가 현 지도부가 하반기 투쟁을 책임지지 않으면 무장해제 된다는 데 동의하고 있는가? 그야말로 자문자답이 아닌가! 이번 사태가 불거지지 않았다고 해도 얼마나 많은 노동자대중이 하반기 투쟁에 대한 현 지도부의 의지와 역량에 신뢰를 보내고 있었는가? 물론 현 지도부‘만’ 민주노총이 처한 오늘의 상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현 지도부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는 데에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동시에 민주노동당에게도 묻고자 한다. 민주노동당은 정녕 이번 사태와 오늘 민주노총이 처한 상태에 대해 객관적인 태도를 취할 조건과 위치에 놓여 있는가? 강승규 개인의 처리와 추상적인 내용 나열로 극복될 수 있다고 믿는가? 민주노동당 역시 현 민주노총 지도부와 함께 책임을 져야 할 직접적 당사자이다.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과의 관계에서 제3자가 아니다. 그건 그들 스스로 그렇게 만들어왔다. 기득권은 계속 유지하고 문제에 대해서는 회피하려 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이는 노선 차이 이전의 문제다.


현장활동가, 좌파 정치조직(단체) 역시 자기비판과 반성을 노동자대중에게 고해야 한다. 열심히 투쟁하고 헌신하는 것으로 현 사태에 대한 정치적 책임이 면해지지는 않는다. 좌파 정치조직 역시 현 사태를 불러온 과정에 책임이 없지 않다. 더 중요하게는 현 사태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과 대안 제시와 관련하여 원칙적 수준을 넘는 프로그램을 제출하고 있지 못하다. 지금 노동자대중이 고통 받고 있는 지점은 특정 사안이나 특정 투쟁에 대한 전술 부재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지도력과 정치적 전망의 부재에 있다. 민주노총 지도부 총사퇴 또는 민주노총 지도부 교체는 자신의 올바름을 노동자대중에게 스스로의 힘으로 입증하는 과정에서 획득해야 한다.

민주노조운동과 민주노총은 전체 노동자대중과 민주노총 조합원의 피와 땀으로 일구어낸 역사이며 정치적 결과이다. 동시에 민주노조운동과 민주노총은 한국사회의 변화와 변혁을 이끄는 주요 동력이자, 전 세계 투쟁하는 노동자계급의 일부이다. 민주노조운동과 노동자대중 투쟁의 정신과 전통은 아직도 살아 있다. 그러나 이것이 내일의 전망을 여는 힘이 아닌 과거의 역사를 회상하는 자료가 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지금 민주노조운동과 민주노총은 어느 방향을 택할 것인지를 놓고 다시 한 번 갈림길에 서 있다. 각자의 위치와 조건에서 발본적인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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