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철도노동조합이 전 조합원들에게 산개를 명령한 3월 2일, KTX서울승무지부 조합원 260여 명은 양평에 위치한 'VIP레저타운'으로 이동했다. 이 거점은 산개투쟁을 대비해 미리 마련해 놓은 곳이었고, 산개 명령이 떨어진 즉시 관광버스를 동원해 이동했다.
산개 첫날, 원주와 접경해 있는 이 거점에 도착한 조합원들은 춥고 열악한 이문차량기지에서 이동한 것에 일단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이틀간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추위에 떨며 웅크려 잤던 조합원들은 도착 후 몸을 씻고 따뜻한 방에 몸을 뉘었다. 새마을호 승무원들을 포함하고 있는 서울열차승무지부 150여 명도 이곳으로 들어왔다.
▲ 머리띠를 매고 있는 KTX서울승무지부 조합원 |
차량기지에서 레저타운으로
기자가 2일 도착한 시간은 조합원들이 막 저녁식사를 마친 어둑어둑한 시간으로, 조합원 서너 명이 팔짱을 끼고 숙소 마당을 산책하는 모습들이 곳곳에 보였다. 이문차량기지에서도 보았지만 검은 구두에 제복, 빈틈없는 화장이 아닌 모자에 뿔테안경, 트레이닝복에 운동화 차림으로 종종걸음하는 조합원들이 너무 발랄해 보여 반갑다.
민세원 지부장을 중심으로 교선팀, 조직점검팀, 총무팀 등으로 나뉘어 운영되고 있는 상황실을 찾았다. KTX서울승무지부 간부들은 새 거점으로 이동한 후 쏟아지는 일거리로 저녁식사도 거르고 분주한 모습이었다. 간부들도 오랫만에 돌아가면서 몸을 씻고 원기를 회복한다. 기자에게도 샴푸를 내어주며 자꾸 씻으라고 권한다. 안 씻어도 되는데...
이틀만에 접하게 된 TV뉴스에선 '철도 파업으로 인한 출근길 마비' 소식을 반복해서 방송하고 있었고, 불편을 겪었다는 시민들의 인터뷰를 내보냈다. 간부들은 시민들의 인터뷰 내용에 이런저런 댓구를 하기도 하고 보도 내용을 조롱하기도 하면서 또 한바탕 시끌시끌하다.
방송 뉴스를 접한 오미선 대의원이 침착하게 각 조장들에게 "TV에 나오고 있는 파업 복귀율을 절대 믿어선 안된다"는 연락을 돌렸다. 이틀간 차량기지에서 고생한 조합원들을 배려해 첫날은 따로 프로그램을 정하지 않고 각자의 방에서 쉬도록 했다.
하지만 상황실은 쉴 틈이 없다. 서울열차지부 상황실과의 공유, 이튿날 프로그램 배치, 병가 중인 조합원 합류, 간부 회의 등으로 정신 없는 저녁을 보냈다. 이 와중에도 음식을 배달시켜 먹어도 되느냐, 환자가 발생했다, 방이 춥다, 내일 기상 시간은 몇 시냐 등등 조합원들의 문의 전화가 상황실로 빗발친다. 며칠 만에 기력을 회복하고 활기에 넘치는 조합원들을 배려해 약간의 음주는 용인하기로 했다.
▲ 상황실로 마련된 방에서 KTX지부 간부들이 모여 있다. |
병가자 제외하곤 100% 파업 참석
밤 10시경, 간부들이 지침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각 방의 조장들에게 전달했다. 결혼 준비를 이유로 외출해야 하는 경우 지부장과 면담을 거칠 것(KTX지부에는 3월 중에 결혼식을 올리는 조합원들이 여럿 있다), 남자친구나 가족, 친지, 친구가 연락을 해와도 이 곳의 자세한 위치를 설명하지 말 것이며 방문을 거절할 것, 사측으로부터 전화나 문자메세지가 오면 즉시 상황실로 신고할 것 등이다.
KTX지부는 병가 중인 조합원을 제외하고는 100% 파업에 참석하고 있는 중이며 다음날인 3일에 합류하기 원하는 병가자가 8명 정도 접수돼, 양혜영 교선부장이 일일히 연락해서 만날 장소와 시간을 지정해 주고 찾아오는 길을 설명해 주기도 했다.
철도 노사가 좀처럼 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는 KTX승무원 정규직화 요구에 대해, 노조는 "공사에서 직접 채용하되 단계적으로 정규직화할 것"까지 양보했지만 공사 측은 이를 거부하고 있다. 민세원 지부장은 "자회사(KTX관광레저)에 위탁하는 것보다 공사 계약직 채용이 훨씬 비용이 적게 드는데 왜 절대 안된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한 번에 모두 정규직화하는 게 어렵다면, 정규직화 계획을 전제로 한 직접 고용 계약직을 받아들이라는 요구이고 우리도 수용할 수 있다"는 민세원 지부장은 "'공사 직접 고용'이 첫번째 목표이기 때문에, 단계적으로 정규직화를 모색할 수 있는 계약직 전환이라면 충분히 투쟁을 접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 숙소 앞에서 만난 민세원 KTX지부장 |
"최소한 한 달은 예상하고 있어요" 파업 예상 기한을 묻는 질문에 이같이 답한 강혜련 총무부장은 실제로 각 방을 방문해 "이제 28일 남았어요"라고 조합원들을 격려하기도 하는 모습이다. 손지혜 상황실장은 일일 파업일지를 작성하고 한효미 대의원은 프로그램을 짜는 등 밤이 깊어가는데, 치킨과 맥주를 시켜먹던 조합원들이 간부들 수고한다며 음식을 날라다 줬다.
간단히 음식을 먹던 간부들에게 'KTX 기관사들이 전원 복귀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곧이어 거점 주변에 경찰 버스 6대가 배치돼 있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지부 간부들은 대단히 침착한 모습으로 조합원들이 동요하지 않을까를 먼저 걱정한다. 새벽 2시가 가까워와도 조합원들이 잠자리에 들 기미가 보이지 않자, 간부들이 옷을 챙겨입고 점호에 나섰다. 간부들은 상황과 이런저런 계획들을 이야기하다 새벽 5시쯤이 돼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3월 3일 - 총파업 3일차, 산개 2일차
기상하자마자 켠 TV뉴스에서는 민주노총의 총파업 유보 소식과 철도노조 조합원 2천 명 직위해제 소식을 헤드라인으로 내보냈다. 오늘의 일정과 계획 마련으로 또 아침식사 시간을 놓친 간부들이 상황실에서 라면을 끓이고 있을 즈음, 서열지부 상황실에 가 있던 민세원 지부장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원주경찰서장이 "내 관할 지역에서 나가달라"며 면담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 3일, 아침부터 경찰 헬기가 숙소 위를 낮게 날았다. |
▲ 경찰 헬기가 떠 있는 숙소 전경. 이 곳에는 KTX서울승무지부 260여 명과 서울열차지부를 포함해 400여 명이 묵었다. |
어젯밤 6대였던 경찰버스가 밤 사이 10대로 늘어나 있다. 11시 반 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경찰 헬기가 낮게 숙소 위를 날았다. 상황실의 긴장감도 높아졌다. 원주경찰서에서 연행 방침을 공식 통보해 오자 언론사에 연락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000기자시죠? 전 KTX승무원 000인데요, 지금 경찰이 저희를 강제로 연행하겠다고 하고 있어요. 와서 취재를 해주세요. 여긴 양평VIP레저타운입니다"
원주경찰서장, "내 구역에서 나가라"
그리곤 만일을 대비해 모든 조합원들에게 짐을 싸놓고 대기하도록 지시했다. 원주경찰서장과 경찰 간부들이 뒷짐을 지고 숙소 주변을 한바퀴 도는 모습이 보인다. 점심을 먹기 위해 줄을 길게 늘어선 조합원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숙소 앞마당의 경찰 버스를 바라본다. 어느 새 언론사들에서도 하나둘 도착하고 있다.
점심을 먹고 2층 강당에 모인 조합원들에게 "짐을 챙겨서 들고, 신발을 신은채로 대기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이제 곧 연행될 시간이 임박한 것일까? 강당 안에 KTX승무지부, 새마을호 여승무원들을 포함한 서울열차지부까지 400여 명이 커다란 짐과 함께 빼곡이 들어찼다.
민세원 지부장이 지침을 전달했다. "어떤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무조건 조장의 말을 따르고 연락을 취할 것", "절대 복귀서에 서명하지 말 것"이라는 지침을 전하며 "조장의 지침을 듣지 않는 조원은 파업 의지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단호히 선언했다. 모자와 마스크, 머리띠를 매고 '투쟁'으로 대답하는 조합원들의 눈빛이 상황을 각오한 듯 결연하다.
▲ 경찰의 강제 연행에 대비해 오후 2시부터 강당에 모여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다. |
▲ 강당 밖에서는 차량으로 입구를 막아놓은 만도지부 조합원들이 사복 경찰들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
KTX지부와 서열지부는 돌아가면서 투쟁 발언을 하고, 간부들의 노래와 율동으로 긴장을 풀며 닥쳐올 상황을 기다렸다. 힘껏 저항하지는 않되, 스크럼을 짜고 드러눕기로 했다. 김진옥 조합원은 "우리가 연행된다고 해서 여기서 흐지부지 끝낸다면, 앞으로 손님(KTX승객)들의 비아냥을 어떻게 들을 거냐, 차라리 독하게 투쟁하자"고 말했다.
강당에서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른지 어언 2시간 반이 지나 원주경찰서장이 오후 4시 반경에 경고방송을 했다. "우리 경찰은 금번 철도노조 파업을 강제 해산하라는 지침을 받았다"면서 "지금이라도 귀가를 원하는 조합원들은 안전하게 귀가를 보장해 주겠다"는 내용이다. 10여 분 후에는 여경 몇 명이 와서 상황을 살피고 돌아갔다.
철도유통, KTX지부 간부 6명 직위해제 통보
속보를 접하자마자 달려온 금속노조 만도지부 문막지회, 춘천풀무원노조 등 강원지역 노동자들은 방송차를 강당 입구에 세워놓고 투쟁가를 크게 틀었다. 접근하는 사복 경찰들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하면서 수 시간 동안 경찰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러나 아침부터 이곳 외딴 거점을 긴장으로 몰아넣었던 경찰은 어둑어둑해진 오후 5시 반쯤, 병력을 철수했다.
▲ KTX지부 간부 6명에게 발송된 직위해제 문자메세지 |
"귀하는 3월 2일자로 인사규정 28조에 의거 직위해제되었음을 통보합니다"라는 내용의 철도유통에서 보낸 문자메세지가 오후 3시 반쯤에 들어와 있었다. 예상한 결과라는 듯 간부들의 표정은 담담했다. 민세원 지부장은 "모두 연행되거나, 제가 구속되거나 하더라도 싸움이 끝나진 않을 것"이라며 "오늘 강제연행이라는 파렴치한 짓을 경찰이 벌이지 않길 바라지만,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다시 모여서 투쟁을 지속하겠다"고 밝혔다.
불안감을 뒤로 하고 늦은 시간에 숙소를 나서는데 간부들이 염려해 주었다. "나가시다가 승무원으로 오해받아서 붙잡히시지 않게 조심하세요"라고. 레저타운 출입구에선 물론 수배자 검거를 위한 검문을 실시하고 있었지만 기자가 KTX지부 조합원으로 오인받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민세원 지부장, "어떤 상황 발생해도 포기할 순 없다"
하루종일 좁은 강당에서 긴장된 시간을 보냈던 조합원들은 숙소로 돌아가서 다리를 뻗었다. 저녁 무렵엔 철도 기관사들의 복귀 소식까지 들려왔다. KTX지부는 철도노조가 파업 철회 선언을 한 4일 현재, 거점에 남아서 일정을 사수하고 있다. 지부 총회를 통해 이후 파업 지속 여부를 논의한다는 계획이다.
철도노조가 파업 철회 선언을 하기 전날인 3일, 민세원 지부장에게 "KTX지부만 남아서 투쟁을 지속해야 할 경우가 생길 수도 있는지" 하는 질문을 던져봤다. 민세원 지부장은 "그럴 수 있다"면서 "본부조합도 저와 같이 385명의 투쟁의지와 바램을 잘 알고 있지만 여건이 그렇게 안될 수도 있다"고 답했다. "정부나 공사에서 절대 안된다고 버티고 있지만 지부만이라도 남아서 싸우겠다, 물론 정부나 공사, 자본과의 싸움이 되어 더 힘들어지겠지만 포기할 순 없다"고 단언했다.
▲ 강원지역 노동자들은 경찰의 기습 침탈에 대비해 밤새도록 거점을 지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