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즈비언을 비롯한 소수자를 위한 정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정확한 실태조사가 이루어진 후에 이를 바탕으로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까지 여성이면서 동성애자인 특수한 위치에 처해있는 레즈비언에 대한 체계적인 실태조사는 거의 전무한 상태이다.
레즈비언은 그 특수한 사회적 위치로 인해 세대별로 처해있는 어려움이 비슷하면서도 각기 다르다. 한국레즈비언상담소에 접수되는 상담 사례들을 예로 들어보면 십대 레즈비언 상담과 이삼십대 레즈비언 상담, 그 이상 연령대의 레즈비언 상담 내용을 살펴보면 서로 다른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십대 레즈비언의 경우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마땅한 상담기관 조차 찾을 수 없다. 진학 위주의 상담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제도 교육 과정 내 상담 체계에서 십대 여성 이반 상담이 이루어지기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십대를 대상으로 하는 성교육 프로그램도 지극히 이성애 중심적이며, 기존 청소년 상담 기관 및 쉼터에서도 제대로 된 이반 상담을 하지 못하고 있다. 십대 레즈비언들은 동성애와 동성애자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접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을 이상한 사람, 정신병자로 생각하고, 죄책감을 느끼며 우울증에 걸리거나 극한 경우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이삼십대 레즈비언들은 집안에서의 결혼 압박과 경제적인 독립 및 취업 문제로 힘들어한다. 여성이기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는 이상 집안으로부터 독립을 하는 것도 남자보다 어려운 경우가 많다. 집안에서의 결혼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경제적인 독립뿐인데 여기에서도 어려움은 있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상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취업 자체가 남들보다 힘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렵게 들어간 직장에서도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쫓겨나거나 강제 전근을 가야할 수도 있고, 주변 사람들의 소리 없는 멸시와 차가운 시선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사직을 하기도 한다. 부당한 해고로 인한 이런 억울함을 호소할 법적 제도도 마련되어 있지 않고,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공간도 마땅치 않다.
50대 이상 레즈비언들은 주변에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이나 지지집단 또는 파트너가 없을 경우 홀로 노후를 대비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어린 시절부터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거나 독립해서 나와 의지할 곳 없이, 노후를 위한 자금도 마련하기 힘든 상황에서 노년을 맞게 되면 여러 가지 힘든 점이 많다. 자신이 갑자기 아파도 병원에 데리고 가줄 사람이 없고, 거동이 불편해져 도우미가 없이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때도 누군가를 고용할 수 있는 돈이 없기 때문에 힘들게 혼자 생활해야 한다. 그러다 갑자기 죽음을 맞게 된다 해도 자신을 거두어줄 사람이 없을 수 있다.
위의 몇 가지 사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세대별로 레즈비언들은 특수한 어려움에 처해 있다. 때문에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세대별 실태조사가 필요하며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으로 소수자의 위치에 있는 레즈비언을 위한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결혼하지 못한 여성? 결혼하지 않음을 선택하다
올해 초, 언니네트워크에서는 1회 비혼여성축제를 통해 그동안 사회적으로 비가시화 되어 있던 비혼여성들의 목소리를 이끌어내고, 선언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비혼여성이 단지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의 소소한 커뮤니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차별과 억압에 반대하고 더 많은 여성들이 결혼제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상상할 수 있는 운동의 중요한 쟁점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이 자리를 통해 비혼을 선언하고,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던 나 자신 역시 복잡한 심정이 들었던 것은 ‘레즈비언’이라는 정체성 때문이었다. ‘레즈비언에게 결혼은 선택할 수 있는 문제인가’라는 의문과 함께, ‘스스로 박탈당한 권리에 대해 합리화 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레즈비언 여성들이 남성성소수자와 위장결혼을 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거나, 결혼하라는 집안의 압력에 시달린다는 주변 레즈비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레즈비언 여성은 결국 ‘결혼제도-여성’이라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이중의 억압 속에 위치하고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그것을 선택한 사람과 선택하지 않은 사람, 혹은 선택하지 못한 사람들을 분열시킨다. 여성들은 ‘결혼한 여성’이라는 지위를 획득해야만 가정과 사회, 국가로부터 온전한 성인의 자격을 부여받는다. 법률혼 및 혈연가족 중심의 가족개념 때문에 국민 연금 및 유족 연금, 공·사보험 내에서 비혼여성이 수급권자를 자의적으로 지정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지난 2006년부터 소수자 추가 공제 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비혼 여성 및 이혼 여성들의 경제적 부담이 증가하였다. 또한 생애 최초 주택 구입 자금, 혹은 근로자 서민 주택 구입 자금 등 영세민 전세 자금 대출권자의 자격 요건 상 35세 미만의 단독 세대주인 비혼 여성은 대출권자 범위에서 제외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입양 및 출산권에서의 배제 또한 심각한 문제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이성애중심’적이며 ‘정상가족 결혼이데올로기’로 똘똘 뭉쳐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비합리적이고 편협한 ‘이성애부부, 정상가족중심’의 정책과 제도는 레즈비언 여성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결혼’으로부터 배제되어 있다는 무력감과 ‘이등시민’이라는 낙인을 부여한다. ‘내가 정말 비혼을 선택할 수 있는거야? 레즈비언은 결혼 하고 싶어도 못하잖아, 선택권이 있어?’ 라는 의문이 레즈비언들로 하여금 비혼여성으로서의 자긍심과 운동성을 위축시키는 것이다.
비혼여성운동과 여성성소수자 운동이 만나는 지점은, 기혼/미혼이라는 경계로 여성의 지위를 분열시키는 국가적 체제를 변화시킴으로써 더 많은 여성들이 성정체성, 결혼유무를 떠나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점일 것이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정치적 차별이 존속되는 한, 여성 성소수자들은 동성애 혐오와 여성차별이라는 이중의 억압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레즈비언으로서 당당히 비혼을 선택하고, 선택한 삶을 통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비혼여성들의 경제권과 사회적 지위가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 덧붙이는 말
-
데조로 님은 한국레즈비언상담소, 나비야 님은 언니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