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탓하랴? 하지만 이제 심리적 집단 충격과 여론의 호들갑에서 조금 벗어나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보고 차분히 문제해결 방식을 찾아야한다. 안 그러면 저들의 말대로 정말 “추잡스러워진다”.
사태는 우선 피해생존자에게 거짓진술을 강요한 것과 피해생존자가 이를 거절하자 후속 조치로서 성폭력을 저질렀을 가능성 등 두 가지다. 민주노총은 [민주노총 간부 성폭력사건에 대한 피해자 대리인의 기자회견에 대한 민주노총 입장과 해명]에서 피해자 A씨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정말 A씨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가 맞나? B씨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민주노총 성폭력사건에 대한 피해자와 대리인의 입장]을 보면 A씨는 누가 보더라도 혼자 독박 쓰게 되어있다. 민주노총은 피해생존자와 진위공방이라도 벌이며 ‘솔로몬의 판결’을 기다리겠다는 건가? ‘민주노총 주변과 언론에까지 떠돈다’는 민주노총의 진상조사보고서를 우리는 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민주노총 성폭력사건에 대한 피해자와 대리인의 입장]에서 피해생존자와 대리인이 주장하는 “이해할 수 없는 반인권적, 성폭력 옹호적 행보”를 절절히 느꼈다. 누구의 말을 믿으라는 건가? 언론을 통해 알려진 내용이든 [민주노총 성폭력사건에 대한 피해자와 대리인의 입장]이든지 간에 민주노총이 저지른 행위가 A씨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는 점은 상식적으로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더구나 그다지도 보호하고 싶었다던 A씨를 결국 성폭력 피해자라는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는 점을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지경에 이르자 온갖 탐정과 소설쓰기가 난무한다. 여기까지 하자. [성폭력사건에 대한 중앙집행회의 권고사항]과는 별도로 사태의 의혹을 철저히 규명할 진상조사를 재실시해야 한다. 민주노총이 해명보도를 내는 것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라고 했다. 하지만 해명보도야 말로 해피투게더의 한 장면 같이 “콩트는 콩트일 뿐 오해하지 마시길!”처럼 들린다. 진실을 밝힌다는데 왜 진실은 느껴지지 않고 콩트처럼 보이는 걸까?
언론이 이번 사태의 원인으로 진단하는 도덕불감증, 조직기강 해이, 정파갈등은 사태의 진짜 원인이 아니다. 외형적으로는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으로 드러났지만, 들여다보면 두 가지 문제가 뒤엉켜있다. 피해생존자에게 거짓진술을 강요한 것과 피해생존자가 이를 거절하자 후속 조치로서 성폭력을 저질렀을 가능성, 그리고 이후 사건의 은폐 축소 왜곡에 이르기까지. 그렇다면 문제의 원인은 가부장제적인 조직문화와 관료주의, 가족주의/유사가족주의에서 비롯된다.
이를 하나씩 짚어보자. 먼저 가부장적제인 조직문화에 대해서다. 운동사회 반성폭력운동이 본격화된 지 10년에 이르고 있는 시점에서 이번 사건은 노조운동이 여전히 가부장제적 관행과 잔재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보여주었다. 노동운동의 건강한 실천은 언제나 소수자와 함께하는 운동에서였다. 여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사회구조와 이데올로기에 맞서 이를 넘어서려는 요구들을 만들어내고, 여성의 권리를 인정하고, 성적 차이에 입각한 공동체의 운영원리를 보편화시켜왔던 것이다.
제프 일리는 1000쪽이 넘는 분량의 <더 레프트>라는 책에서 서유럽 좌파 100여년의 역사적 교훈을 말하기 위해 남성의 보편성으로만 드러나는 몰성적 합리성이 어떻게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질곡으로 빠지게 했는가를 보여주는데 할애했다. 지금 다른 무엇보다 타자에 대한 기본적인 성찰과 윤리의 필요성이 강조되어야할 이유다. “조직적 규율과 교육을 강화”한다고 해서 성폭력이 근절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여성과 남성의 차이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상호존중의 윤리, 남녀관계의 새로운 문화 창출을 위한 진지한 실천적 노력이 뒷받침될 때 양성간의 관계를 변혁할 수 있다.
두 번째 관료주의, 가족주의/유사가족주의 문제다. 민주노총의 제도화 이래 활동양식은 점점 더 퇴행해왔다. 조직 규모가 커지고 산별노조체계와 관료제적인 방식을 추구하게 되었고, 이것이 효율적이라고 여기게 됐다. 전문가주의가 공고해지면서 지식과 정보가 독점화된다. 가부장제적 노동자 조직화와 운영방식, 이에 따른 부정부패로의 연루, 패거리주의, 위임과 대리주의의 만연, 정파조직 내외를 불문한 이전투구와 담합구조, 활동가들의 이권 추구 경향들도 고착화되었다. 특히 민주노총은 2005년 이후 지속적으로 사회적 감시대상으로 전락하였는데, 이번 사태로 말미암아 대중적 신뢰를 회복하기 힘든 상태에 처했다. 노동운동의 진보성은 공장에 갇혔다.
87년 노동체제의 시효 만료 이후 신자유주의적 통치양식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노동자 정치양식들을 찾아내는 노력을 게을리 한 덕분에 그 한계를 남김없이 드러낸 듯하다. 운동이 관리되고 통치되니 체제내화되고 있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총사퇴하고 항간에 도는 소문처럼 좌파가 접수한다면 상황이 달라질까? 일시적인 변화가 있을지언정 곧 제자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조직을 쇄신하자거나 관료주의를 극복하자는 주장으로서 관료화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운동이 만들어가는 궁극적인 상이 무엇인가? 노동자 대중을 대표한 이들이 노동자 세상과 노동자문화에 대해 무엇을 보여주었나? 새로운 운동의 근거는 다른 어디에도 없다. 역동적인 노동자 대중의 일상적 삶 속에서 찾아야한다. 위임이나 대리정치가 아닌 아래로부터 스스로 만들어가는 운동, 자본주의 착취와 억압을 변혁시키는 노동자 되기의 지속적 과정, 여성,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등 다양한 차이들을 아우르는 진정한 노동자의 형상을 제시하고 그에 기초한 진정한 노동자 정치를 전개해야한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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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연아 님은 노동조합기업경영연구소 연구자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