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 나누기' 용어 정부가 오염 시켰다
정부와 재계가 말하는 일자리 나누기와 노동계가 말하는 일자리 나누기는 명백히 달랐다. 경제위기로 인한 고용 대란 속에 정부나 재계, 노동계 모두에게 ‘일자리 나누기’는 최대의 화두다.
12일 금속노조 정책연구원과 참여연대 노동사회위원회는 프레스센터 18층에서 ‘고용위기,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일자리 지키기-나누기-만들기 모색 토론회를 열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정부가 먼저 일자리 나누기의 개념을 선점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악용한다는 비판이 많았다.
이상호 금속노조 정책연구원은 “정부의 일자리 나누기는 임금삭감만 하자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병훈 참여연대 노동사회위원회장(중앙대 사회학)은 “정부의 고용 대책은 실업자 구제 대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친기업적 구조조정의 목적으로 이뤄진다”고 설명했다.
김성희 한국비정규직노동센터 소장은 “이미 일자리 나누기라는 말은 정부와 보수언론이 용어를 오염시켜 순화시키지 않으면 정부 의도대로 넘어 간다”고 경계했다. 정부가 말하는 일자리 나누기는 '임금동결' 이데올로기를 유포하는 것이라 프레임을 바꿔야 한다는 설명이다. 특히 ”잉여금이 많은 사업장도 덩달아 구조조정을 하고 있다. 이를 막을 방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소장은 “정부의 잡쉐어링 방식도 견제장치가 없으면 별 의미가 없다”고 못 박았다.
반면 노동부 입장은 완전히 달랐다. 김유진 노동부 위기관리 대책단장은 “일자리 나누기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은 고용을 유지하는 것이 동료를 내보내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약간 소득감소와 아예 ‘실직’보다는 약간 소득감소가 낫지 않는가?”라면서 임금삭감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이상호, '일자리 연대' 위한 전향적인 고민 제시
이렇게 일자리 나누기에 대한 정부와 노동계의 입장 차이가 있는 가운데 주 발제를 맡은 이상호 정책연구원과 이병훈 위원장은 많은 제안을 했다.
이상호 연구원은 이날 일자리 나누기를 넘어 ‘일자리 연대방안’이라는 관점에서 고용위기 극복을 말했다. 이 연구위원은 “한국 노동시장 구조는 정규직 간, 정규직 비정규직 간의 임금 격차가 크고, 청년 실업까지 연대의 가능성을 고민해 노동조합이 나서서 일자리 연대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연구원은 일자리 연대 전략으로 △일거리/노동시간나누기를 통해 일자리 지키기를 실현하고 △주간연속 2교대제 도입으로 일자리 나누기를 추진하고 △협약노동시간을 제도화해 새로운 노동력 충원을 내세웠다. 핵심은 노동시간을 단축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상호 연구원은 “특히 주간연속2교대제의 도입은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임금손실을 어떻게 보전할 것인가가 쟁점으로 보이지만 고용안정에 기여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노사정의 분담방식이 모색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재정 투입과 사회적 책임을 고려해 정부의 지원은 중소기업에, 대기업은 노사의 협상으로 해결하자는 것이다.
이 연구원의 제안은 총고용 보장을 위해 일자리 지키기-나누기-만들기 실천을 적극적으로 하자는 입장이라 금속노조 내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사회를 맡은 조돈문 카톨릭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도 “금속노조에서 총고용보장과 물량 실천의 의지가 있는지 금속노조의 책임 있는 분의 얘기를 듣자”고 제안해 토론회에 참석한 박근태 금속노조 부위원장이 답했지만 확답은 피했다.
박근태 금속노조 부위원장은 “많은 지적에 동의하지만 초점을 고용문제로만 잡지 말고 다른 사회를 만드는 대안 담론을 만들어 나갔으면 좋겠다”고 전제했다. 박 부위원장은 “금속노조 정책위에서 낸 제안은 내부 갈등이 많다. 위기설정의 기본방향을 고용문제를 지키는 것으로 갈 것이냐 좀 더 넓은 대안사회의 문제로 갈 것이냐의 쟁점이 있다. 우리가 동의하려면 노조 내부에서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병훈, “노조운동은 전향적인 실천노력 가시화해야”
이 연구위원의 일자리 연대는 이병훈 위원장이 ‘고용연대’라는 네트워크를 제안하면서 보다 구체화 되었다.
이병훈 위원장은 “MB정부가 친기업적 국정기조를 표방하면서 퇴행적인 경기부양-일자리 창출정책과 땜질식 실업대책, 임금 삭감형 일자리 나누기 정책을 추진해 고용의 질 악화라는 또 다른 위기를 안겨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위원장은 “실업대란, 노동법 개악 공세, 노동 양극화라는 3중의 고용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동-시민사회-야당으로 이어지는 고용연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네트워크 건설을 제안했다. 고용연대는 고용과 실업대책을 상시적으로 협의할 상시적 연대기구라고 할 수 있다.
이병훈 위원장은 노조운동에 대한 몇 가지 제언도 덧붙였다.
우선 “노조운동이 MB정부와의 격돌에 있어 국민적인 지지와 공감대를 얻기 위해서는 조합원의 이익 지키기에 매몰되어 있는 활동 관성을 탈피해 비정규직-청년 등의 취약 노동자들과 일자리 나누기를 위한 전향적인 실천노력을 보이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제언했다.
현 정부 주도의 ‘임금삭감형’ 일자리 나누기와 대비되는 노조 주도의 일자리 나누기 성공사례를 만드는 것도 의미있다고 전제했다. 이를 위해 “현대차와 기아차에서 주간연속2교대제 시행과 더불어 정규직-비정규직의 고용연대를 구현하는 일자리 나누기의 '진보적 모델'을 만들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토론자로 나선 노중기 진보신당 정책위의장은 “이상호 연구원의 토론문은 매우 시의적절하며 필요한 작업”이라고 전제한 뒤 “그러나 이 연구위원의 방안은 정책적으로는 현실적이지만 노동정치에서 실현 불가능하다”고 진단했다. 정부가 임금삭감을 전제로 한 일자리 나누기 외에는 전혀 받아들일 의사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
노중기 의장은 “정부와 부드럽게 교섭을 하거나 98년과 같은 노사정의 틀로도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노중기 의장은 이러한 진단 속에서 이병훈 위원장의 제안을 이어 받았다. 노 의장은 “이병훈 위원장이 제안한 안을 실현하기 위해선 네트워크와 연대의 틀을 만드는 게 중요한데 무엇을 강조하고 누구와 함께 정책을 실현할지 다양하게 고민을 확장하자”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