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한 가지 특징적인 것은 그 평가들 가운데 ‘인간 노무현’과 ‘정치인 노무현’을 나누어 말하는 언술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서민적인 인간 노무현’과 ‘개혁가로서 정치인 노무현’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언술이 그리 낯선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막걸리 한 사발 걸치며 논에서 모를 심는 인간 박정희’와 ‘민족과 국가의 진로 앞에서 결단해야 하는 정치인 박정희’라는 언술을 오랜 동안 들어 왔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망자를 애도하는 곳에 가면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언술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참 그분 인간적으로 괜찮았는데’라는 말이 그것이지요. 물론 어디 비교할 것이 없어 노무현을 박정희에, 아니면 박정희를 노무현에 비교하느냐고 언짢아하실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노사모’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박사모’ 또한 마찬가지이겠지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을 비교하는 것 그 자체가 아닙니다. 아니 그런 이분법의 인식 틀을 전제한 비교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언술에 주목하는 이유는 추모라는 이름 아래 바로 그 ‘인간적인 것’이 ‘정치인 노무현’–혹은 ‘정치인 박정희’–의 역사적 과오와 오류들에 대한 비판을 차단하고 걸러내는 망으로 기능하는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것이 미래의 삶에 대한 사유와 그것을 향한 크고 작은 실천을 봉쇄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측면이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사이에는 종종 분신한 전태일을 생각하곤 합니다. 웬 뜬금없는 전태일이냐구요. 노무현과 달리 이 가난한 노동자에 대한 평가들에서는 ‘인간 전태일’과 ‘노동운동가 전태일’을 구분하는 언술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혹시 분석적인 글을 쓰기 위해 편의상 ‘인간 전태일’과 ‘노동운동가 전태일’을 나누어 살핀 것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구분이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일까요. 혹시 그의 인간적 면모가 박정희, 노무현에 비해 기울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가요.
따지고 보면 ‘인간적인 것’은 개별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그 어떤 고유한 특성이 아닙니다. 애초 그런 것은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구요. 인간은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타자들과 이런저런 모순과 갈등을 매개로 관계 맺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역사적 존재들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그 관계들에는 모순과 갈등을 해소하려는 시도들, 즉 정치들(운동들)이 이미 내재되어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가 지니고 있다는 ‘인간적인 것들’이 그가 맺고 있는 이런저런 관계들, 따라서 그에 내재된 정치를 매개로 평가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들에게는 ‘인간적인 것’으로 다가온 것이 다른 이들한테는 자신들의 희망과 꿈을 빼앗아간 ‘비인간적인 것’으로 기억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어느 분들에게는 파격적이고 반권위주의적인 말투와 행동이 다른 분들에게는 무례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민주적인 것’이 또 다른 이에게는 ‘독재인 것’으로 인식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입니다. 지금의 정치적 현실이 수구정치세력을 지지하는 분들에게는 ‘민주적’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독재로 인식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정치인 노무현’에 대한 ‘인간적 평가’가 다르게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은 결코 서로 분리되어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이분법은 인간을 역사적인 관계들의 밖으로 밀어내어 마치 ‘모두에게 준거로 적용될 수 있는 그 어떤 인간적인 것’이 실존하는 것처럼 추상화시킨다는 점에서 현실을 가리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입니다.
당연히 전태일에 대한 평가도 이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조금 다른 지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무엇이냐구요. 그것은 노무현과 달리 전태일을 둘러싼 평가들에서는 이런저런 이견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를 죽인 구조적 폭력, 즉 자본과 권력은 다르게 평가하겠지요. 하지만 최소한 민주주의, 그리고 요즘 성숙하지 못한 이들의 화풀이 대상이 되곤 하는 ‘진보’를 말하는 이들에게 그는 ‘더불어 사는 삶을 죽음으로 추구한 사람, 노동자 전태일’로 기억될 뿐입니다. 아니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구조적 폭력 그 자체인 자본과 권력조차도 비록 표면적이겠으나 그의 삶에 대해 비아냥거리지는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노동운동가 전태일’과 구분되는 그 어떤 ‘인간적인 전태일’이 따로 있어 그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인가요. 그들에게 ‘인간적인 것’이 의미하는 것은 ‘악어의 눈물’일 터인데, 언감생심 노동자 전태일이 어떻게 그런 눈물을 흘려 주체할 수 없는 ‘부와 교양’을 지니신 분들과 저 ‘고독한 권력’을 만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그 이유는 그들의 적대감 속에 감추어진 그 어떤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의 비밀은 이른바 ‘인간적인 전태일’과 ‘노동운동가 전태일’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버스비를 털어서 허기진 어린 시다들에게 풀빵을 사주고 수 시간을 걸어 집을 오가던 그 ‘인간적인 전태일’과 그들을 가난과 고통에 빠뜨린 부당한 법과 제도의 집행,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부당한 사회관계들을 넘기 위해 몸부림 친 ‘노동운동가 전태일’이 하나라는 바로 그 사실 말입니다.
그 시대의 모순에 직면하여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었던 이 노동자는, 그래서 ‘단 한 사람의 지식인 친구가 있었으면’하고 희망했던 바로 그 노동자는 자본과 권력에 저항하며 자신이 그 일부이자 전체라고 생각한 노동자들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인간적인’, 그리고 ‘운동적인(정치적인)’ 모든 것을 다 하였기에 심지어 적대자인 자본과 권력조차도 그를 가벼이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즉 그 인식, 의도 여부와 무관하게 그가 ‘사적인 것을 상징하는 인간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상징되는 정치적인 것’을 구분하여 대중을 지배하고자 하는 자본과 권력의 이분법적 인식 틀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에게 새삼스레 ‘인간적인’, ‘운동적인(정치적인)’따위의 수사를 붙이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 뿐입니다.
여전히 그 차이가 와 닿지 않나요. 전태일은 자신을 불사르는 죽음의 순간에도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쳤고 그 당시 영세사업장 노동자, 아니 가난한 자라면 항상 달고 다녔을 “배고프다.”는 말을 남기며 죽어갔습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역사적 인간’이라는 것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거기에서 ‘인간 전태일’과 ‘노동운동가 전태일’은 따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즉 전태일이 인간적인 이유는 그가 진정 역사적이고 정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인간적인 그 무엇’이 따로 존재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백만 명 이상이 추모한 ‘정치인 노무현’의 ‘인간적 것’은 무엇입니까. 노무현정권으로 이어진 자유주의정권 10년 동안 국가경쟁력 제고라는 명분아래 진행된 ‘신자유주의개혁’의 도상에서 죽어간 노동자들, 농민들, 가난한 자들에게 그 권력은 분명 ‘살아 있는 권력’이었습니다. 지금 그 바통을 이어받아 파시즘화 경향을 확대, 심화시키고 있는 신자유주의경찰국가 이명박정권의 구조적 폭력 때문에 죽어나가고 있는 이들처럼, 그 당시에도 그런 이들이 있었습니다. ‘민주화운동의 적자’라는 것을 내세우며 그 주검들에게 내뱉은 언술들을 깨끗이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여기에서 그 목록들을 다시 조목조목 읊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국가경쟁력을 위해 그것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어찌되었든 그 언술과 행태들이 ‘인간적인 것’이었나요. 국회의원과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인간 노무현’의 그 어떤 언술과 행동에 호감을 지니기도 하였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가 속했던 정치세력이 집권이전이나 이후에 가난한 대중에게 준 멸시, 억압과 삶의 고통을 상쇄할 만큼 그토록 ‘인간적인 것’이었는지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인격화된 자본과 권력’에게 ‘인간적인 것’을 바라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많은 경험들을 통해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저들도 권력 이전에, 대통령 이전에, 정치인 이전에 인간들인데’라며 기대를 버리지 못하다가 삶 자체를 빼앗긴, 혹은 빼앗기고 있는 수많은 이들에게 그 ‘인간적인 것’이 의미하는 바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거기에 대고 지금 ‘인간적인 정치인, 인간적인 대통령’ 운운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까. 만일 그것이 실존의 차원에서 망자를 추모하기 위한 것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이 결국 노무현정권 시대가 지금보다 더 좋았다는 것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라면, 혹은 그 정권에 대한 객관적 비판을 무디게 하고 잠재우기 위한 것이라면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집권기에는 민주주의가 공고화되었느니, 민주주의의 대강이 완성되었느니 말하면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외치는 자들을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 정도로 여기고 탄압하더니 지금 와서 다시 그것이 ‘역진’하였다고 한탄하며 이미 폐기된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자고 말하는 것이 정말 ‘인간적인 것’인가요. 이른바 ‘인간적인 것’이 ‘그 어떤 상식’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언술과 행태야말로 정말 비인간적이고 상식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도 지금 그 ‘인간적인 것’ 운운하는 것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노무현정권을 옹호하는 것은 정치적 자유이니 그 자체에 대해 누가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정치적 자유 그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이명박정권을 지지하는 수구, 혹은 파시스트들이나 할 수 있는 편협한 행태이기 때문이지요. 그렇기에 프레시안의 칼럼니스트 박동천교수처럼 망자 앞에서 슬픔을 가누지 못하여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각하라고 외치겠다.”고 말하는 것이 머 그리 큰일이겠습니까. 그를 지지하는 사람으로서 그럴 수도 있겠지요. 또 김기협씨처럼 “그래 보수면 어때?!”라고 커밍아웃하며 노무현정권을 옹호하는 것이 머 그리 대수이겠습니까. 그가 ‘보수’라는 것을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어찌됐든 ‘자신들의 인간적, 정치적 군주’를 잃은 그 애통한 심정을 이해할 수는 있기에, 그리고 최소한 실존적 죽음 앞에 명복을 비는 것이 그야말로 ‘인간적 도리’라고 생각하기에 그들이 다소 격한 감정을 토해대며 분노의 화살을 ‘진보’에게 돌리는 것에 대해서도 그것은 지성인의 자세가 아니라고 정중히 말씀드린 바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에 그치지 않고 억지 논리와 해석, 천박한 지식으로 ‘진보’를 조롱하고 그것도 모자라 누군지 알 수 없는 이들에게 “협잡꾼”이라는 딱지마저 붙여 진보를 도매금으로 넘기니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자신들이 지지한 정치세력의 재집권 실패의 원인을 정치적 이념과 전망을 달리하는 진보의 탓으로까지 돌리는 그들의 언술을 접하는 순간 머릿속이 멍해지며 오히려 이런저런 연민이 증폭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요.
그 이유는 이런 발상과 행태를 지닌 분들에게 둘러싸여 ‘반특권, 반권위, 반지역주의’를 모색하려 했으니 애초 그런 목표 자체가 (신)자유주의정권 아래에서 실현될 수 없었던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그래도 노무현정권이 하고자 했던 최소한의 개혁조차도 제대로 될 수 없었던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은 이들이 기존의 그 특권, 그 권위, 그 지역주의에 기대어 자신의 그 알량한 지위와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이들은 아닐까라는, 장관과 고위 관료, 군 장성, 그리고 국영기업체 사장 등의 지역적, 학교별 안배를 따지면서 마치 그것이 지역주의의 완화 여부를 결정짓는 핵심 준거인 양 들이대다 자신들의 지분만 일정 정도만 보장되면 수탈, 억압받는 타인의 고통쯤은 나 몰라라 하는 식으로 처신하는 바로 그런 이들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역사적으로 자신들이 더 이상 민주주의자로 기능할 수 없는 그 지점에, 따라서 스스로 보수주의자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지점에 ‘인간적인 것’이라는 추상적인 언술을 가져다 놓고 자신들의 한계와 오류를 성찰하기보다 그것을 덮어버리고자 하는 그런 자들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기우입니까. 정말 그러길 바랍니다.
진정 노무현정권의 지지자, 혹은 ‘이론적, 정신적 후원자’라면 오히려 그를 잘 보필하지 못한 반성과 함께 절필을 해도 부족할 판에 자신들의 천박한 붓끝을 놀려 딴에는 망자를 추모, 옹호한다고 하나 ‘망나니 춤’을 추어 정치적, 이념적 차원을 떠나 실존적 차원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진보에게까지 상처를 내고 있으니 이 어찌 ‘반인간적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인간적인 것’이란 진정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도대체 그것은 어디에 숨어 있는 것입니까. 망자 노무현의 그 어떤 ‘인간적인 것’을 추모하는 그 긴 대열에 있습니까. 아니면 소통을 외치는 시청광장에 있습니까. 추모라는 이름아래 공적인 매체의 지면을 빌어 자신의 감정을 무절제하게 뱉어내는 저 지식인 군상들에게 있습니까. 저는 외려 용산에서 울리는 이름 없는 자들의 삶의 외침과 생동감 속에서 그것을 봅니다. 왜냐구요?
거기에서는 단순히 추모와 애도, 이명박정권에 대한 분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삶과 새로운 사회관계들의 단면을 볼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영감과 감성의 흐름, 그것의 나눔과 공유, 그리고 그와 결부된 이성적이고 창조적 행위들이 어우러져 있기에 그렇습니다. 거기에는 심지어 자본과 권력에 대한 팽팽한 긴장감마저도 순식간에 해학으로 전변시키는 그야말로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들의 단면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거기에서는 각자의 사상과 이념, 종교를 넘어 ‘자기지배의 실현으로서의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하는 그 어떤 자발적 힘, 인간에 대한 애정이 존재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인가요, 거기에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벌거벗은 주권자들’에 대한 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권력과 거대 건설자본이 그 곳에서 빼앗을 수 있는 것이 또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그들에게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이미 그들은 자신들의 육신의 일부인 부모, 자식의 생명조차 빼앗기고 그 불구덩이에서 살아 나온 또 다른 그들의 일부는 범죄자가 되어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될까 해서 그곳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은 그 무엇을 대가로 바라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권력과 부를 두고 싸우는 ‘주류와 비주류’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권력’과 그것을 자신의 목표로 하는 지금 ‘죽어 있는 권력’이 아닙니다. 그들은 거기에도 끼지 못하는, 아니 끼고 싶어 하지 않는, 진정한 자유를 꿈꾸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글로벌 건설자본과 결탁한 파시스트적 경찰국가가 내몬 ‘벌거벗은 주권자들’의 삶 그 자체를 지키기 위해 그 곳에 관심을 가지는, 아니 자기 자신을 벌거벗은 주권자라고 생각하기에 그로부터 눈과 귀를 뗄 수 없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들 또한 저 위임권력들을 통제하는 ‘주권자’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주권을 빼앗아 간 그들에 의해 자꾸만 죽음과 삶의 경계로 내몰리는 그런 허울뿐인 ‘벌거벗은 주권자’는 아닌지요.
사정이 이런데 그런 그들을 향해 권력과 자본이, 그 어떤 이들이 대중을 선동하는 진보, 좌파, 심지어 ‘빨갱이’라고 역설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오히려 사회구성원의 최소한의 삶과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는 국가가 바로 그들이 하고 있는 그런 역할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오히려 억압하고 탄압하니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다양한 영역에 존재하는 부당한 사회관계들, 권력관계들을 해소,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부르는 것이라면, 그것을 무슨 수로 피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 비난이 무서워 수탈, 억압, 차별, 배제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약탈당하는 자연과 생태에 눈 감는다면, 그것을 어찌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자, 진보, 좌파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어찌 ‘인간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제2의 노무현’이 아니라 그 시대의 문제들을 진정 자기 것으로 삼은 너무도 아름다운, 너무도 인간적인 청년 전태일이 그리워지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시공간을 넘어 ‘산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만큼 ‘인간적인 것’이, 따라서 ‘정치적인 것’이 어디에 있나요. 그것을 부정하는 모든 것은 반인간, 반정치입니다. 아직도 150일 이상을 병원의 차가운 냉동고에 보관된 용산의 주검들, 삶의 기로에 선 이 땅의 해고노동자들과 고통 받는 수많은 이들, 이미 찢기기 시작하여 신음하는 4대강과 같은 자연과 생태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저편에 많은 이들의 추모 속에 국민장을 마친 한 시대의 정치지도자이자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의 죽음이 있습니다.
차별 없는 주검의 세상을 꿈꾸며 고인들의 명복을,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안전을 진심으로 빕니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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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일 님은 성공회대 정치학 연구교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