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센터가 좋아서

유베이스 수원 콜센터 상담원 박미경 씨의 이야기

유베이스 콜센터 상담사 12명이 징계 해고되어 복직 싸움을 하고 있다. 해고되지 않은 조합원 10명은 B2B 부서에서 일하며 노동조합을 유지하고 있다. 콜센터 작은 노동조합을 지키고 있는 유베이스 상담사의 이야기를 담았다.

콜센터 상담사 13년차 박미경 씨는 콜센터가 좋다. 결혼해 아이를 키우다가 다시 일을 시작한 곳이 콜센터였다. 수원시 일자리센터에 소개받은 콜센터 협력사 GCS에 처음 찾아갔을 때 미경 씨는 ‘나이가 많아서 안 되겠다’는 말을 들었다. 자리가 나면 연락하겠다는 형식적인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 두 달을 기다려도 연락이 없었다. 집에서 가까운 일자리가 아쉬워 미경 씨는 회사에 직접 전화를 걸었다. 회사는 한 번 와보라더니 면접도 보지 않고 일을 시켰다. 회사는 자신을 AR이라고 불렀다. 한참 뒤에야 자신이 알바라는 걸 알았다. 아르바이트로 일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일을 계속했다. ‘이거는 진짜 내 일이야’ 싶을 만큼 일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미경 씨가 처음 일한 곳은 영업 CMI, 해피콜으로 알려진 아웃바운드 부서였다.

신제품이 판매되면 고객에게 전화를 걸어 제품 만족도를 조사했다. 전화를 받은 고객들은 신제품을 쓸 생각에 설레고 들떠 있었다. 미경 씨까지 덩달아 행복했다. 특히 나이가 많은 분들과 통화하는 게 미경 씨는 특별했고 그들과 나눈 대화가 늘 기억에 있었다. 어르신들이 ‘당신 덕분에 잘 쓸 수 있게 됐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미경 씨는 일이 좋아졌다. 대리점에 비치해둔 카탈로그를 펼쳐 제품 설명을 ‘달달달달 외우면서’ 공부했다.

콜센터에 와서 알았다. 자신이 말하는 걸 좋아한다는 걸. 고객과 이야기를 나누고 감정을 나누는 게 좋았다. 하루에 다섯 시간 넘게 쉬지 않고 통화를 해도 즐겁고 행복했다. 힘든 때도 있었지만, 힘든 건 통화할 때뿐 끊으면 끝났다. 통화는 한 번으로 끝이 나고 그날의 일은 그날 끝나는 게 좋았다. 다른 사람은 앉아서 일해서 힘들다고 하지만 그마저도 좋았다. 자신은 서 있는 걸 못 한다며 미경 씨는 자신이 콜센터에 최적화된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콜센터는 정말 좋아요. 하루종일 앉아 있어도 괜찮고 떠들어도 괜찮아요. 물론 감정 노동 있지만 저는 여기 그만두면 다른 일 못 할걸요. 서서 일을 못 하니까. 여기가 딱 평생직장이라고 생각한 거죠.”

일한 지 두 달 만에 알바에서 정직원이 되었다. 그리고 두 달 뒤에 회사가 유베이스로 바뀌었다. ‘어차피 그냥 협력사에서 협력사로 바뀌는 것’일 뿐 모든 게 똑같았다고 했다. 미경 씨도 차이를 느끼지 못했고 평생직장이라는 생각에도 변함이 없었다. 협력사나 부서가 바뀌기 전에도 임금은 ‘어차피 최저시급’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집에서 가까웠고 내가 번 돈으로 아이들 학원을 보낼 수 있었고 일 년에 한 번 여행이라는 ‘유일한 낙이고 사치’를 부릴 수도 있었다. 콜센터는 평생직장 삼고 싶은 일자리였으며 동시에 숨 쉴 공간이었다. 살림과 육아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공간이었으며 끝나지 않는 가사 노동에서 잠시 해방되는 시간이었다. 다양한 이유로 콜센터에 오지만 상담사 대부분 기혼에, 육아를 하는 맞벌이였다. 직장 동료는 ‘같은 일을 하면서 같은 말을’ 하는 ‘맞장구쳐 줄 수 있는 또래들’이었다. 그것도 콜센터를 좋아할 이유였다.

협력사가 바뀌고, 부서가 달라지면서 입사 6년 만에 처음으로 ‘감정 노동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서비스 CMI는 제품에 불편을 느낀 고객들을 상대했다. 옮긴 부서에서는 죄송하다는 말 밖에는, 화난 고객의 기분을 풀어주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다. ‘하는 일 없이 거기 왜 앉아 있냐’는 말을 들으면 ‘어차피 일이니까’ 싶다가도 답답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미경 씨는 부서 이동이 있을 때 ‘그때 그만두겠다고 손을 들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으로 속상한 마음을 달랬다.

  미경 씨가 일하는 책상. ‘원래도 짐 없는 사람’이었지만 협력사가 바뀌고 또 부서가 몇 번 바뀐 뒤로는 ‘언제든지 가라고 하면 몸만 가게끔’ 짐을 갖다 놓지 않게 됐다고 한다. 그의 책상 위에 개인 물품이라곤 물컵과 거울, 음료가 전부였다. 여름이 되면 미니 선풍기가 하나 추가된다. [출처: 사진제공 박미경]

‘파리 목숨’같은 상담사에게 노동조합이라는 방패막

유베이스 수원사업장을 폐쇄한다는 통보를 들었다. 일을 하려면 부천으로 가란다. 갑작스러웠고, 모두가 당황했다. 회사가 바뀌고 부서가 바뀌어도 참고 일했지만, 부천으로 가라는 말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말 그만둬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절박한 상황’에 떠오르는 건 노동조합뿐이었다.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 노조를 만든 건 자연스러운 순서였다. 상담사 50명이 금속노조를 다같이 찾아갔다.

“건물에 들어가는 발걸음이 무서웠어요. 하면 안 되는 걸 하나 싶고.(웃음) 그런데 비빌 언덕은 있어야 되니까 그 자리에서 가입을 했죠. 회사에서 일방적으로 폐쇄 통보하고 부천으로 가라는 것 자체가 탄압이잖아요. 이렇게는 억울해서 못 가겠다는 마음이 컸고, 노조를 믿고 따라가 보자 하면서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2019년 노동조합이 설립되고 상담사들은 수원에서 계속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미경 씨는 B2B (기업대상 유지보수 상담)로 부서가 바뀌었다. 콜센터 일이 좋던 미경 씨는 B2B 부서가 힘에 부쳤다. 매일같이 업데이트되는 기업의 공지사항을 빨리 알아차려야 해 긴장감이 컸다. 실수로 안내를 잘못 전달했다가 ‘등골이 오싹할’ 말을 들은 뒤로는 더 긴장하게 됐다.

무엇보다 인바운드 콜은 ‘빨리빨리 끝내’는 게 중요했다. 계속 ‘밀려오는 수신’을 내가 받지 않으면 동료에게 넘어간다. 조바심과 부담감에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콜을 ‘쳐줘야’했다. 영업 CMI에서 익힌 경험과 팁들이 무의미했다. 통화도 길게 하면 안 됐고 목소리 톤도 더 정중해야했다. 너무 친절한 말투는 ‘왜 유치원생 대하듯 말을 하냐’는 핀잔을 듣는다. 그렇다고 너무 딱딱한 말투도 안 된다. 웃고 있는지 아닌지, 목소리에 묻어나는 감정을 고객들은 ‘무섭게’ 알아들었다. 웃는 말투로 들리는지, 너무 무뚝뚝하지 않은지 예민하게 촉을 세울 때마다 ‘모니터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일이 익숙해질 때쯤, 수원사업장을 폐쇄한다는 소식이 또 들렸다. 전보를 거부하자 조합원 가운데 CMI 상담사 12명이 해고되었다. 해고된 조합원들은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에 서울과 부천을 오가며 선전전을 시작했고, 다른 조합원들은 수원에서 점심시간 피켓 시위로 조합활동을 이어갔다. 버스 정거장 앞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는 30분이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피켓을 들고 걸어갈 때도 들고 서 있을 때도 쭈뼛거리고 머뭇거렸다. 어느 순간 피켓을 들고 있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지나가는 사람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면 아무렇지 않게 설명해주는 자신을 발견했다. 우리는 이렇게 ‘절박’한데 이걸 못하겠나 싶었고, 옆에는 동료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도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피켓 시위도 노동조합도 미경 씨에게는 적지 않은 변화였다.

“선전전하는 동료들한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모르는 사람한테 전단지 나눠주는데 그거 안 받으면 상처 입잖아요. 그런데 꿋꿋하게 하는 거 진짜 용기 있다고. 저한테 변화가 있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일을 하고 있고 또 노조 활동에도 잘 참여하지 못해서. 그래도 노조는 같이 가는 거니까, 피켓 드는 것도 당연히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생각해보니, 저도 용기가 생겼던 것 같아요.”

  유베이스 조합사무실은 휴게공간이고 회의공간이었다가 간식봉투를 포장할 때는 간식공장이 된다. 지난 가을 유베이스 집회에 연대 온 금속노조 동지들에게 선물할 동백꽃을 만드느라 사무실은 뜨개공방이 되었다. 원래는 노동권을 상징하는 장미를 만들려고 했지만 너무 어려워서 동백꽃이 되었다고… [출처: 사진제공 유베이스수원지회 인스타그램 콜센타그언니]

해고된 노동자는 미경 씨가 입사할 때부터 같이 일하던 동료였고 친구였다. 마음 한 켠,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이 늘 있다. 자신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또 거기서 ‘안도감’을 느끼는 ‘솔직한 마음’에. 추울 때마다, 더울 때마다 길에 있는 동료들 생각에 미안함이 커졌다. 그랬다가도 선전전 마친 동료들이 함께 걷거나 카페에서 대화하는 사진을 보고 있자면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미안함과 부러움과 온갖 감정들이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했고 미경 씨는 그럴 때마다 사람이 참 간사하다고 느꼈다.

지금 ‘안주하고 있는’ 자신을 볼 때도 그랬다. 처음 금속노조 사무실에 찾아갈 때는 ‘분노와 의리’로 뜨거울 때였다. 대의원이 되었고 주말도 없이 노조 활동에 ‘열심’이었다. 동료들과 같은 조끼를 입고 같은 구호를 외칠 때면 뭔가 모를 힘이 생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뜨거움이 조금씩 식어간다는 걸 미경 씨는 느꼈다. 몸이 따라주지 않았고 자신은 ‘여기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큰 수술 이후에는 대의원도, 주말 회의도 ‘조금씩 한발씩 빼는 게’ 익숙해졌다. 동료들이 ‘어련히 알아서 잘 할까’ 싶어 자꾸만 뒤로 물러나게 됐다. 동료들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이지만 그래도 미안함이 사라지진 않았다. 미경 씨는 자신의 성향을 잘 알았고 감정에 솔직했다. 동료들의 의견에 묵묵히 따라가는 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여겼다.

미경 씨는 콜센터가 좋다고, 할 수만 있다면 계속 콜센터에서 일하고 싶다고 꽤 여러 번 말했다. 그 말 다음에는 동료들도 같이 다녔으면 좋겠다는 말을 꼭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그게 쉽지는 않을 거라고 ‘계란으로 바위 치기’ 아니겠냐고 자조했다가, 그래도 ‘(해고 조합원과) 같이 가는 게 맞다’고 ‘그게 결론’이라고 못을 박았다. 노동조합을 하는 이유였다.

“해고된 동료들이 투쟁한 만큼 제대로 마무리가 됐으면 좋겠어요. 정말 잘 돼서 복직하고 수원에서 같이 일하다 정년퇴직하면 제일 좋죠. 일 년 가까이 투쟁을 했고, 옆에서 지켜봤는데 계란으로 바위치기 맞잖아요. 그런다고 회사가 흔들리지는 않겠지만 흠집이라도 나면, 그걸 사람들에게 한 번 보여줬으면 좋겠다 이거죠. 그래서 우리가 투쟁한 시간이 아깝지 않게, 우리가 목소리를 냈고 그래서 콜센터가 좀 나아졌으면 좋겠고…. 노조하면서 접할 수 없는 걸 해본 거잖아요. 많이 보고 배웠어요. 동료들끼리 그런 얘기해요. B2B만 정년퇴직하겠다는 건 욕심이고요, 같이 마무리가 되어야죠.”

노동조합을 만들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지금처럼 이렇게 일할 수 없을 거라고, 유베이스에 ‘살아남지’ 못했을 거라고 미경 씨는 생각한다. 부천 콜센터로 출근을 하지는 못했을 테고 아마도 일을 그만뒀겠지, 아니면 CMI 부서가 없어질 때 B2B도 같이 없어졌겠지 생각한다. 지금 유베이스에서 일을 하고 있는 건 노동조합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해고되지 않은 조합원들은 절절하게 느끼고 있다. 노조 집행부 ‘뒤편에 숨어’ 있지만 덕분에 일할 수 있다고, 우리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그게 유베이스 콜센터에 낸 흠집이라고 미경 씨는 느낀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들이 ‘파리 목숨’이라는 걸 안다고 했다. 언제 잘려도, 어디로 옮겨져도 문제 될 것 없는 콜센터 노동자들. 노동조합이라는 ‘방패’가 있어 오늘 하루, 어쩌면 올 한해 파리와도 같은 목숨이 연장되었다.

*정윤영 작가는 싸우는 노동자를 기록하는 사람들 기록팀 <싸람> 멤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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