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사회운동가 마릴린 캐츠(Marilyn Katz)는 8일 미국 독립언론 <인디즈타임스> 기고에서 디트로이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1967년 7월 폭동 전 이미 유령도시였다고 지적한다. 당시 폭동은 흑인 베트남 참전 군인 복귀 후 인종 차별과 자동차산업 이전에 따른 실업에 대한 불만으로 발발, 43명의 사망자를 냈다. 캐츠는 여기에 연방정부와 자동차 대기업의 책임이 크다며 이들이 어떻게 디트로이트를 몰락시켰는지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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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inthesetimes.com/] |
캐츠는 우선 디트로이트의 친노조 정책이 도시를 파산으로 몰고 갔다는 미국 정치인과 보수 언론의 선동을 지적한다. 이를테면, <월스트리트저널>의 스티브 마란가와 <워싱턴포스트>의 마릴린 샐린저는 디트로이트 몰락을 1967년 7월 폭동 여파로 지적하는 한편, <더 포스트>의 편집진은 디트로이트 현 정부와 노조 지도부를 비난해왔다.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시장은 한술 더 떠 디트로이트처럼 파산하지 않으려면 뉴욕시도 퇴직연금 및 건강보험 지출을 줄여야 한다고 7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캐츠는 디트로이트 다수의 시장들이 많은 잘못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지만 도시 몰락을 초래한 것은 이들이 아니라, 자동차산업 그리고 이들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인들이 추동한 연방 교통 및 주거 정책이라고 지적한다.
2차 세계대전 후 디트로이트 부흥...1967년 이미 인구 감소
캐츠에 따르면, 1930년대 말과 40년대 사이 미국은 전쟁에 총력을 기울이며 탱크와 비행기 제조 산업의 성장을 낳았고 이는 인구 팽창으로 이어져, 디트로이트 인구는 1930년 150만 명에서 1950년 180만 명으로 성장했다.
같은 기간 수많은 이들이 포드, 크라이슬러, 패커드와 제너럴모터스와 같은, 노동조합의 보호 아래 상대적으로 저숙련 노동이지만 고임금을 받을 수 있었던 일자리를 찾아 왔다. 그러나 자동차산업 이전으로 인해 1950년 180만 명이었던 디트로이트 인구는 1967년 8월 이미 30만 명 이상 감소했고 이후 인구 감소는 매 10년 마다 동일하게 이어졌다.
<더 네이션>은 여전히 디트로이트를 “자동차 도시”라고 부르지만 이 도시는 1950년대 말부터 이미 그렇지 않았다. 포드, 제너럴모터스와 크라이슬러 등 자동차 대기업은 2차 세계 대전을 통해 낸 수익을 기반으로 그리고 자동차산업 수요 확대를 기대하며, 디트로이트 외곽과 오하이오, 인디애나 그리고 캐나다 등 농지에 신규 공장을 세웠고 디트로이트 도심에서 이곳으로 공장을 이전했다. 1947년과 1958년 사이, ‘빅쓰리’라고 불리는 이 3대 기업은 25개의 공장을 지었지만 이중 디트로이트에 건설된 것은 전무하다.
자동차 대기업의 디트로이트 공장이전, 노조 약화 전략이기도
캐츠는 자동차 대기업의 공장 이전은 디트로이트에 당시 자동화된 신규 공장에 적합한 지대가 부족하기 때문인 것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역사학자 토마스 서그루 등은 이에 대해 전시에 유례없는 이윤을 낸 자동차회사가 전국자동차노동조합(UAW)을 약화시키기 위해 취한 조치였다고 본다. 그러니까 자동차대기업이 디트로이트에서 공장을 이전한 것은 활성화된 노동조합 약화를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디트로이트에서는 1960년대 이미 자동차산업과 함께 일자리도 사라졌다. 캐츠는 1960년, 크라이슬러만 디트로이트에서 자동차를 생산했으며 디트로이트 노동자 수는 10년 전 12만 명에서,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1947년부터 1967년까지, 디트로이트는 자동차산업에서만 128,000개의 일자리를 잃었다.
디트로이트의 몰락은 연방 정부의 교통정책과 부동산 대출 정책에도 책임이 있다.
연방정부, 자동차 대기업에 편향된 개발 정책 펴
마릴린 캐츠는 1950년 디트로이트는 백인이 우세한 도시였지만 1970년까지 많은 백인은 외곽으로 이주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백인들의 엑소더스는 자동차 공장 폐쇄로 인한 일자리 손실 외에도 연방 정부 정책에 의해 촉발됐다는 견해다.
그에 따르면 1949년, 미국 의회는 연방주택법을 통과시켰다. 이후 처음으로, 사람들은 3% 이하 낮은 금리로 부동산 대출을 할 수 있게 됐다. 미국 연방주택청(FHA) 가이드라인은 전후 수요를 충족시키며 새로운 외곽 도시를 조성했다.
도시 외곽으로 이주한 백인 노동자들은 출퇴근을 위해 시내 전차가 아닌, 자동차 대기업의 로비와 납세자의 비용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고속도로를 이용, 디트로이트 도심은 더욱 비어졌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는 모기지 제한...백인은 도주, 흑인은 혼란 속으로
흑인들에게 이는 상당히 다르게 전개된다.
1930년 이후 약 20만 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디트로이트로 이주해왔다. 1950년까지 흑인은 이곳 인구의 16.8%를 차지했다. 이들 또한 외곽으로 이전된 일자리를 따라가길 원했지만 이는 불가능했다. 도시개발업자와 부동산 기업은 흑인을 차별했고, 정부 조치에 따라 은행들은 흑인에 대한 대출을 매우 위험하다고 봐 대출을 꺼렸기 때문이다.
1940년대와 50년대 고속도로를 건설했던 흑인들은 점점 더 격리됐고, 고속도로 건설에 연방 기금이 집중되며 공공교통기금은 말라갔다. 이 때문에 1956년, 시내전차시스템 또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50년 디트로이트는 3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51개의 지역으로 구성됐다. 미국의 완전고용 시대였던 1960년대에도, 디트로이트에서 백인 실업자는 7%, 흑인 실업자는 13.8%였으며, 1970년 흑인 남성 실업자는 18%로 치솟는다.
1961년 디트로이트는 1,600만 달러의 세입 축소로 인해 첫 번째 예산 적자를 겪는다. 이후 시 정부는 40년 동안 ‘피플무브’, ‘르네상스센터’ 등 도시 재생 정책을 추진했지만 일자리 정책, 도시 재구조화 등을 도외시 하며 모두 실패했다.
캐츠에 따르면, 도시의 4분의 1 이상이 이 기간, 연방 고속도로 건설과 도시 재생 정책의 영향으로 파괴됐다. 주는 대형스타디움, 카지노와 컨벤션센터를 건설하며 도시를 격리시켰다. 주는 이 사업을 선전하며 일자리와 시장 확대를 약속했지만 빚만 지고 말았다.
디트로이트에는 70만 명이 살고 있지만 사실상 어떠한 공공교통도 없고, 학교는 130개교, 2만개의 제조업 일자리만이 있다. 이 때문에 캐츠는 디트로이트에서 흑인 남성의 실업률이 미국에서 가장 높은 50%에 육박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본다.
캐츠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당시 정책을 추진한, 디트로이트 전 시장 제롬 카바노프[1962-1970년 사이 민주당 시장], 루이스 마리아니[1957–62년 사이 공화당 소속의 마지막 시장]와 주지사 조지 롬니[디트로이트가 속한 미시간 주 공화당 출신 주지사이자 전미자동차협회 전 의장]의 책임이 크다고 본다.
이러한 지적은 디트로이트 시정부가 연금이나 사회복지비 등에 대해 친노조 정책을 펴 도시를 몰락하게 했다는 주류 언론의 시각과는 전혀 다르다. 디트로이트의 몰락은 노조 약화 전략, 일자리 정책 없는 도시 개발, 인종주의적 주택 및 대출 정책을 주도한 연방정부와 자동차 대기업이 낳은 비극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캐츠는 디트로이트 몰락에서 얻어야 하는 교훈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 요구, 공공재산 보호와 함께 인종주의에 대한 반대라고 제기한다.
디트로이트는 지난달 18일, 185억 달러의 부채를 이유로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이후 공화당 스나이더 주지사가 비상관리인으로 임명한 케빈 오르는 전현직 공무원에 대한 연금 삭감, 사회보장비 삭감 등을 추진하고 있다. 케빈 오르는 파산법률회사 존스데이 소속으로 디트로이트 부채를 소유한 월스트리트 다수의 은행을 대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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