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이 장기화되고 논란이 확산되면서, 노동계와 시민사회, 그리고 정치권까지 달라붙어 ‘사회적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진을 뺐다. 노사와 시민사회, 정치권 등은 숱한 의견차이와 대립을 거치며 사회적합의를 이뤄냈고, 외부적으로 갈등은 봉합됐다.
하지만 실제로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은 ‘사회적합의’ 이후에도 여전한 장기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회사가 사회적 약속을 모르쇠로 일관하고, 노사의 사회적합의서가 헌신짝처럼 내팽개쳐졌기 때문이다. 합의 이행에 대한 어떠한 강제성도 없는 사회적합의가 노동자들을 두 번 울리고 있는 셈이다.
조합원 몰래 야반도주 한 기륭전자, ‘사회적합의’ 사실상 파기
7일 오전, 텅 빈 기륭전자(현 렉스에이앤지) 사무실에는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이 9일째 철야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달 30일 오전, 회사가 조합원들 몰래 야반도주하듯 사무실을 이전하면서, 오갈 데 없는 조합원들은 한기가 서린 빈 사무실에서 ‘황당함’에 몸을 떨었다.
▲ 기륭전자 조합원들이 철야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회의실 앞. |
기륭전자분회는 해고자 원직복직과 정규직화 등을 요구하며 무려 1,895일 동안 공장점거, 삭발, 두 차례의 고공농성, 94일간의 단식 등 벼랑 끝 투쟁을 진행했던 곳이다. 노사 갈등 악화와 투쟁의 장기화, 사회적 논란이 확산되면서 노동계와 시민사회, 정치권 등이 중재에 나섰으며 지난 2010년 11월 1일, 노사는 가까스로 사회적합의를 도출했다.
사회적합의 이후 2년 6개월의 유예기간을 거쳐 작년 5월 1일, 10명의 조합원들은 8년 5개월 만에 기다리던 일터로 복직했다. 복직 첫 날, 새 옷과 새 신발을 신고 나온 조합원들은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다”며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회사는 그들에게 일을 주지 않았다. 복직 첫 날부터 장장 8개월간, 조합원들은 회의실 테이블에 앉아 업무가 주어지기를 기다렸다. 회사는 월급도, 4대 보험도 지급하지 않은 채 업무대기를 하라고만 했고, 조합원들의 임금은 8개월째 체불됐다. 이것으로도 모자랐는지, 회사는 지난해 12월 30일 조합원들 몰래 사무실을 이전했다.
▲ 텅 빈 기륭전자 사무실. |
조합원들은 매일 아침 최동렬 회장 자택으로 찾아가지만, 문 앞에서 경찰에 끌려나올 뿐이다. 유흥희 기륭전자분회장은 “정보과 형사가 최동렬 회장을 만나 어떻게 할 거냐고 물으니, 최 회장이 ‘밖에서 떠드는 저 사람들과 나는 상관이 없다. 저들 중 우리 회사 직원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며 “최동열 회장은 사회적 합의를 사실상 폐기하겠다는 입장”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켜지지 않는 ‘사회적합의’, 한진중공업 노동자들 잇따라 목숨 끊어
한진중공업 역시 상황이 다르지 않다. 한진중공업 사측의 정리해고에 맞서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85호 크레인 고공농성에 돌입하고, ‘희망버스’ 바람이 몰아치자 한진중공업 노사는 2011년 11월 정리해고 철회를 비롯한 협상을 타결했다.
하지만 곧바로 노동자들은 장기휴업자 신분이 됐고, 손배가압류를 포함한 노조탄압이 이어졌다. 노조탄압과 손배가압류로 최강서 열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후, 조합원들은 공장점거투쟁에 나서며 다시 한 번 격렬한 노사 대치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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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
사태가 장기화되고 문제가 확산되자 정치권이 중재에 나섰고, 지난해 2월 23일 노사는 사회적합의를 도출했다. 합의안은 휴업자를 제2노조와 차별하지 않고 합리적으로 복귀시키고, 현재의 불균형을 최단 시일 내에 복구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적합의가 도출된 지 1년도 채 안된 지난해 11월 30일, 한진중공업에서는 또 한 명의 조합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망한 김 모 조합원은 2011년 정리해고를 당한 후 현재까지도 현장에 복귀하지 못한 채 휴직자 생활을 했다.
김 씨 뿐이 아니다. 현재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에 소속된 휴업자 100여 명은 아직까지 현장에 복귀하지 못한 채,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아르바이트 생활을 하고 있다. 비율상 9:1이었던 기업노조와 금속노조 조합원 사이의 현장투입 불균형 해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조합원 A씨는 “아파트 경비원 생활을 하고 있다. 알고 보니 한진중공업지회 휴직자 대여섯 명이 같은 아파트에서 경비일을 하고 있다”며 “언제 현장으로 복귀 할지 몰라 기약 없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강제성 없는 사회적합의,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휴지조각으로 전락
사회적합의가 매번 휴지조각으로 전락하면서,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사회적 문제로 확산돼 정치권까지 나서 어렵게 합의를 이끌었지만, 강제성이 전무해 회사로서는 합의를 지키지 않아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유흥희 기륭전자 분회장은 “민사소송에서는 복권에 당첨되기 전, 친구에게 돈을 나눠주기로 한 약속도 지켜야 한다고 했다. 하물며 국회에서 사회적으로 약속한 사회적합의를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며 “하지만 기륭전자 노사는 국회에서 조인식까지 열며 사회적합의를 했지만 회사는 이 조차 지키지 않고 있다. 합의 이행을 위한 강제성이 없다면 사회적합의는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유 분회장은 “사회적 합의로 약속된 고용문제에 대해 회사가 책임지지 못할 경우, 정부와 지자체가 책임을 지는 강제 조항이 필요하다”며 “또한 사회적 합의를 지키지 않는 사업주에 대한 처벌도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사회적합의가 파기된 기륭전자 노동자 등은 조만간 법률가단체, 국회 등과 토론회를 개최하고 사회적합의 이행을 위한 논의를 이어나간다는 계획이다. 기륭전자분회의 경우 사회적합의 이행을 위한 대책 마련과 회사의 무분별한 투기 규제를 위한 투쟁을 준비 중이다.
하지만 사회적합의 이행을 법률적으로 강제하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따를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민주당 은수미 의원실 관계자는 “사회적합의는 계약이나 단체협약이 아닌, 말 그대로 ‘신사협정’이다. 거기에 강제성을 붙이는 게 사실상 논리적으로 맞지 않을 수 있다”며 “노조 측 주장대로 법으로 명문화한다면 본래 취지에도 맞지 않고, 사회적합의를 할 회사도 없다. 대안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공감하지만 쉽지 않은 문제라 답답하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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