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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2일, 원주의료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장성희 씨의 영정. [출처: 비마이너] |
이름 없는 사람, 장성희
“그녀는 자신의 진짜 이름이 없습니다. 장 씨가 만들어준 이름으로 그녀는 불렸습니다.”
지난 23일 열린 어느 장례식 추모시의 첫 문장이다. 이름이 없다는 것, 분명히 존재하나 부를 ‘이름’이 없다는 것.
이름에는 한 사람의 고유한 삶이 담긴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 이름엔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스며든다. 이름은 그 사람의 ‘있음’과 함께하는 것. 그런데 그 이름이 없다. 아니, 있다. 우리는 그녀를 장성희라 불렀다. 하지만 이는 그녀의 진짜 이름이 아니다.
장애인을 ‘목’숨바쳐 ‘사’랑했던, 원주 귀래 사랑의 집
지난 22일, 원주의료원에서 조촐한 장례식이 진행됐다. 장례식장은 넓었으나 찾아오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드문드문 찾아온 이들은 오래 머물다 갔다. 지난 2002년에 사망한 고 장성희 씨의 장례식. 항소심에서 재판부가 이는 명백한 시체유기라고 판결해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장례는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지 1년 7개월이 지난 후에야, 그녀가 냉동고에 갇힌 지 12년이 지나서야 치러졌다.
30여 년 전, 장애인을 ‘목’숨바쳐 ‘사’랑한다며 스스로 목사라 칭한 남자가 있었다. 방송에선 부모도 버린 불쌍한 장애인들을 거둬 키운다며 그를 천사아버지라고 소개했다. 그렇게 장아무개 씨는 스물한 명의 장애인을 자신의 친자로 등록했다. 그러나 두 해 전 여름, 방송을 통해 이 모든 것이 거짓임이 드러났다.
원주 귀래 사랑의 집이라고 불리는 그곳은 입구에서부터 철문으로 굳게 가로막혀 있었다. 장 씨는 21명을 친자로 등록했으나 발견 당시 그 안에는 네 명의 지적장애인만이 살고 있었고, 병원 냉동고에는 10년과 12년 전에 죽은 두 장애인의 시신이 방치되어 있었다. 병원 측이 밝힌 바로는 사망 당시 한 명은 극심한 기아 상태로 장이 꼬여 있었으나, 장 씨는 ‘의료사고’라 주장하며 사망신고도 하지 않았다.
방송이 보도된 뒤 수십 년 전에 장 씨에게 자식을 맡겼다는 가족들이 나타났다. 그중 한 가족은 유전자 검사 끝에 병원에 12년째 방치되어 있던 시신의 가족으로 밝혀졌다. 어린 시절 사랑의 집에서 살다가 탈출했다는 이도 나타났다. 그의 팔에는 그가 열 살 때 장 씨가 새긴 조잡한 문신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사랑의 집 생존자 임지훈 씨는 농아인으로 9살에 맡겨져 15살이 되던 해, 다섯 번의 탈출 끝에 사랑의 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탈출을 시도하다가 다시 잡혀온 그를 장 씨가 대바늘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을 실명했고, 장 씨가 치아를 망치로 내리치고 손톱을 뽑았다고 임 씨는 진술했다.
사랑의 집에 살던 장애인 네 명은 방송보도 후 장 씨로부터 분리되어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사건해결을 위해 장애인단체를 중심으로 대책위가 꾸려졌다. 장 씨는 장애인차별금지법 위반, 사기·사문서위조·위조사문서행사, 사회복지법 위반 등으로 기소됐으나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기소하지 못한 악행이 더 많았다. 그는 항소심에서 3년 6월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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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관식을 하던 중 원주대책위 활동가들이 오열하고 있다. [출처: 비마이너] |
사랑의 집 피해자가 시신 인도 받아 장례 치러
고 장성희 씨의 보호자는 여전히 장 씨로 되어 있으나 장남 장영민 씨(가명)가 시신을 인도받는 것으로 하여 장례는 치러졌다. 영민 씨는 사랑의 집에서 나온 뒤 현재 타지역 체험홈에서 살고 있다. 지적장애가 있으나 사랑의 집에서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던 그는 그곳을 나온 뒤 체험홈에서 배운 한글 실력으로 ‘사체 인도확인서’ 인도자 인적사항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입관식에서 영민 씨는 고 장성희 씨의 시신에 한참을 손을 올리고 있었다. “오빠가 동생 장례 치러주러 왔다, 이야기하면 돼요.” 한 활동가의 말에 입관식에 참석하고 있던 사람들은 오열했다. 2년 전, 고 장성희 씨와 함께 냉동고에 시신이 12년째 방치됐던 고 장성광(본명 이광동) 씨의 동생 이미화 씨도 함께했다.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요.”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는 울음과 섞였다.
12년을 냉동고에서 보낸 고인의 장례는 그렇게 이틀 동안 짧게 진행됐다. 삶도 죽음도 괴로웠을 긴 시간의 끝은 그렇게 흘렀다.
다음날인 23일 고 장성아 씨의 장례 1주기 추모제도 열렸다. 고 장성아 씨는 사랑의 집에서 분리조치되었을 때 이미 직장암 4기로 세상으로 나온 지 6개월 만에 결국 사망했다.
세상에 알려진 지 1년 7개월, 사랑의 집에 있었던 사람 중 현재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9명이다. 이 중 네 명이 사망했다.
보편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건의 기괴함
이 사건은 사회복지서비스가 권리가 아닌 시혜와 동정으로 주어졌을 때 어떠한 일이 발생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이는 현재 많은 시설이 안고 있는 공통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30년 전, 삶은 너무 가난했고 사회와 정부는 그 가난을 오로지 개인의 몫으로 돌렸다. 장애아동을 가족의 품으로 기꺼이 껴안을 수 있는 복지시스템은 없었다. 가족도 버린 장애아동 20여 명을 한 사람이 제대로 보살필 수 있을 리 없었음에도 언론은 그를 ‘천사 아버지’로 소개했고 그가 사는 곳은 ‘사랑의 집’이라는 팻말이 붙었다. ‘사랑’의 울타리 안에서 사회가 외면한 그들은 굶어 죽고 맞아 죽고 소리소문없이 사회에서 삭제됐다.
사회복지서비스가 시혜와 동정이 아닌 권리로서 작동하기 위해서는 서비스를 받는 대상, 즉 장애인도 보편적인 권리가 있는 ‘인간’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사회는 여전히 장애인이 이러한 감금 상황(시설)에 처해있는 걸 끔찍이도 ‘이해’하고 있었다.
2012년 6월, 장 씨에게 자식을 보냈다는 가족들이 장 씨 집 앞으로 찾아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걸린 철문 앞에서 가족들은 원주시 공무원과 경찰에게 이 문을 열어 달라 호소했다. 그러나 공무원과 경찰은 “이곳은 시설이 아니라 가정집이기에 압수수색 영장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라는 말만 반복했다. 장애인 21명을 ‘친자’로 등록했기에 이곳은 법적으로 장애인시설이 아닌 가정집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절차’만을 앞세우며 자신들의 책임은 그 뒤로 숨겼고 도리어 “이것이 무슨 학대냐?”라고 되물었다. 어느 경찰은 “장애인들은 비정상인이라서 이렇게 해놓은 거다”라는 장 씨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결국 다음날, 현장에 있던 장애인단체 활동가들이 직접 철문을 절단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 상황은 역시나 참혹했다. 그 안에서 마주한 것은 방바닥에 앉아 밥을 먹고 있던, 겁에 질린 네 명의 눈동자였다. 그들은 똑같이 머리를 밀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낡고 유치한 원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적인 시설의 문제만으로 이 사건을 설명하기에 사랑의 집에서 벌어진 일들은 너무 기괴하고 잔혹했다.
이름 하나를 여러 명이 썼다. ㄱ이란 이름을 쓴 사람이 사라지면 다른 사람이 ㄱ의 이름을 썼다. 사랑의 집 생존자 임지훈 씨는 그곳에 있을 당시 ‘장성대’로 불렸다. 그의 팔에는 ‘장성대’라는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사랑의 집에서 분리조치 된 네 명 중 한 지적장애인의 팔에도 ‘장성대’라는 이름의 문신이 새겨져 있다. 임 씨가 사라지자 장 씨는 다른 사람을 ‘장성대’라는 이름에 등록한 것이다. 장 씨는 주민등록을 이중·삼중으로 등록해 부정수급하기도 했다. 또한 장 씨에게 입양된 장애인들은 호적에 등록된 성별과 실제 생물학적 성이 달랐다. 장 씨와 함께 살았던 네 명의 장애인 중 한 명은 실제로는 여성임에도 호적에는 남성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즉, ‘살아 있다/죽어 있다’라는 것 이외에 이 사람의 ‘신원’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사람도 누군가의 배에서 태어나 장 씨에게로 보내졌을 텐데 그 이야기를 알 수도 없다. 장 씨와 살면서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지, 어떠한 것을 경험했는지 한 사람이 전 생애를 살면서 겪었을 그 이야기에 대해 알 방법도 없다. 지적장애인 피해자들은 이에 대해 스스로 명확히 진술할 수 없었고, 장 씨 이외에 사회적 관계망 또한 없었다. 관리 감독 기관인 원주시청 공무원에게도 사랑의 집은 그냥 오래된 '시설'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적장애인이라고 하여 자기결정권을 박탈하고 사회에서 분리·배제해서는 안 된다. 사건이 터진 후 장 씨에게서 분리된 지 1년 7개월. 지적장애인들은 사랑의 집에서 나와 한글을 배우고 미술 공부를 하며,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을 선택해 먹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많이 변화했다. 수다스러워졌고 웃음이 많아졌으며 머리를 기르고 취향에 따라 치마도 입게 되었다.
이들의 변화한 모습을 통해 지적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삶을 박탈하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지 한 눈에 알 수 있다. 각자의 개별성을 지우고 ‘지적장애인’이라는, 그를 구성하는 한 부분의 정체성에 그의 모든 삶을 함몰시키는 이 사회가 얼마나 끔찍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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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장성희 씨의 관 [출처: 비마이너] |
‘진짜 이름’이 없다
‘장성희’라 불린 고인을, 사랑의 집에서 함께 살았던 영민 씨는 ‘성자’라 불렀다. 죽을 때까지 33년가량을 살았을 텐데 그녀가 태어났을 때 불렸던 이름은 무엇인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저 아는 것이라곤 그녀가 장 씨의 손에서 자랐고, 죽어서도 12년 동안 냉동고에 갇혀 있었다는 것뿐.
‘사람이 살았고 죽었다’라는 것은 단지 물리적 현상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사람의 의지가 사라졌다고 하여 그 몸을 물건처럼 함부로 다루진 않는다. 물리적으로 그 존재가 사라졌다고 하여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우리는 기억 속에서 그 존재와 계속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진짜 이름’이 없었다.
‘장성희’라고 부르나 이 사람 이름 같지가 않다. 다른 이름이 있을 것 같다. 마치 장성대로 살았으나 그 이름이 임지훈이었고, 장성아로 살았는데 원래 이름은 최수경이었으며, 장성광이라 불렸으나 본래 이름은 이광동이었던 사람들처럼.
당신 이름은 뭘까. 그 이름을 되찾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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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소를 지키고 있는 사랑의 집 피해자 장영민 씨와 고 장성광 씨(본명 이광동) 동생 이미화 씨. [출처: 비마이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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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장터 안으로 들어가는 고 장성희 씨의 관 [출처: 비마이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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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장이 진행되는 모습을 지켜보던 중 이미화 씨를 비롯한 원주대책위 활동가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출처: 비마이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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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장성희 씨의 유골함을 안고 화장터를 나오는 이미화 씨 [출처: 비마이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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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3일 광화문 해치마당에서 고 장성희 씨 추모제와 고 장성아 씨 1주기가 열렸다. [출처: 비마이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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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성희 씨 추모제와 고 장성아 씨 1주기 가 열린 지난 23일 광화문 해치마당에 사랑의 집 생존자 임지훈 씨도 참여했다. 방송 보도 뒤, 임 씨는 헤어진 가족들을 만났으며 그의 손에 새겨져 있던 문신도 이제 깨끗이 지워졌다. [출처: 비마이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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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이광동 씨가 안치된 수원 납골당에 고 장성희 씨 유골함도 함께 안치됐다. [출처: 비마이너] |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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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민 기자는 비마이너 기자입니다. 이 기사는 비마이너에도 게재됩니다. 참세상은 필자가 직접 쓴 글에 한해 동시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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