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모술에서 북동쪽으로 20마일도 채 떨어지지 않은 작은 마을에 태양이 작열하고 있었다. 열네 살의 밀리시아와 열세 살의 여동생 마들린은 다른 억양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독일어로 대문 앞에서 나를 맞이했다. 두 아이는 가족이 방 하나를 임대해 살고 있는 회색의 직사각형 단층 건물 안뜰로 나를 안내했다.
우리는 더위 속에 앉았고, 아홉 살과 열 살인 두 남동생과 어머니도 함께했다. 그들의 눈에는 희망과 절망이 뒤섞여 있었다. 마치 내가 그들이 잃어버린 세계로 이어지는 다리이자, 동시에 그 세계를 상기시키는 존재인 듯했다. 소녀들은 조심스럽게 보관해 온 플라스틱 파일 하나를 내밀었다. 그것은 독일에서 받은 학년 말 학교 성적 평가서였다.
나는 서류를 넘기다 교사의 소견 하나에 눈길이 멈췄다. “마들린은 독일어가 모국어가 아님에도 항상 명확하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었다. 그는 수업에 열의 있게 참여했고, 새로운 내용을 열린 태도로 받아들였으며, 언제나 자신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추구하려 했다. 글쓰기 과제에서도 집중력을 유지했고, 노력하려는 의지가 분명했다.”
이 파일은 1년 전 갑작스럽게 산산이 부서진 삶을 보여 주는 몇 안 되는 물리적 흔적 가운데 하나다. 2024년 10월까지 이 가족은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의 작은 자치단체인 아들코펜에서 살았다. 그러나 내가 2025년 8월 말에 그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2000마일이 넘는 거리를 이동해 이라크의 반자치 지역인 이라크 쿠르디스탄에 속한 바비라(쿠르드어: 바비레)라는 마을에 와 있었다.
마들린과 밀리시아의 가족은 평범한 귀환민이 아니다. 이들은 이라크 북부에 토착한 비무슬림 종교 소수자인 야지디인(Yazidis)이다. 2014년 이슬람국가(IS)는 야지디인을 상대로 대규모 학살, 납치, 노예화, 성폭력, 강제 사상 주입을 포함한 공격을 자행했고, 이 참상은 국제적인 헤드라인을 장식했으며 수천 명을 피난길로 내몰았다.
독일과 영국을 포함한 여러 국제기구와 서방 국가들은 IS가 야지디인에게 자행한 잔혹 행위를 공식적으로 집단학살로 인정했다.
이라크 밖에서 가장 큰 야지디 해외거주인이 사는 독일은 처음에는 IS를 피해 도망친 이들을 보호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망명 승인율은 급락했다. 2023년에 이라크와 비공식 재입국 합의를 체결한 이후, 독일은 야지디인들을 그들이 탈출했던 나라로 추방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은 난민이자 인권 연구자인 나의 관심을 끌었고, 나는 집단학살, 강제 이주, 유럽 난민법이 어떻게 교차하는지를 탐구하게 되었다. 나는 진행 중인 연구의 일환으로 이라크 쿠르디스탄에서 독일로부터 추방된 야지디인들을 만나 그들의 경험을 기록하고, 독일의 접근 방식이 초래한 인간적 결과를 직접 목격했다.
밀리시아의 가족은 최근 추방된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이 가족은 거의 6년 동안 독일에서 살았다.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며 언어를 배웠고, 밀리시아에게 삶은 나이에 비해 훨씬 무거운 책임을 의미했다. 그는 가족을 위해 번역하고 통역하며 옹호자 역할을 맡았다. 이제 그는 한때 자신의 집이라 불렀고, 그 언어를 말하며 그 가치를 받아들였던 나라로부터 깊은 배신감을 느낀다.
밀리시아는 추방 날짜를 기억한다. 그날은 그의 기억에 깊이 새겨져 있다. 2024년 10월 5일이다. 그는 독일어로 당시 상황을 회상하며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새벽 5시였다. 우리가 자고 있을 때 경찰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집을 둘러쌌다. 사회복지사가 문을 열었다. 그는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너무 무서웠다 … 정말 끔찍했다 … 우리에게도 권리가 있다.”
경찰은 가족을 분리했다. 어머니와 소녀들은 한 차량에, 아버지는 소년들과 함께 다른 차량에 태웠고, 곧장 공항으로 향했다. 밀리시아는 무력감과 믿을 수 없음의 감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짐조차 쌀 수 없었다. 미리 편지라도 보냈다면 변호사를 구할 수도 있었고, 학교 선생님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편지조차 보내지 않았다.”
2014년에 벌어진 일
야지디인은 소수의, 주로 쿠르드어를 사용하는 비무슬림 종교 소수 집단이다. 이들은 수세기 동안 박해와 고대 신앙에 대한 왜곡에 시달렸고, 종종 ‘이교도’나 ‘악마 숭배자’로 낙인찍혔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에서 2014년에 벌어진 IS의 공격과 맞먹는 사건은 없었다. 추정에 따르면 약 5000명의 야지디인이 살해되었고, 약 7000명의 여성과 소녀가 납치되어 다수가 노예화와 학대를 당했다. 2500명 이상이 여전히 실종 상태다.
2014년 8월의 공격은 야지디인 35만 명 이상을 고향에서 내몰았다. 이들은 시리아 국경 인근에 위치한 이라크 북서부의 산악 지대이자 공동체의 역사적 중심지인 신자르(쿠르드어: 싱갈)에서 탈출했다.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기대되었던 대규모 귀환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2025년 기준으로 강제 이주된 이들 가운데 절반도 채 되지 않는 사람들만이 돌아갔다. 약 10만 명은 여전히 자신들의 원래 거주지가 아닌 쿠르디스탄 지역의 국내실향민(IDP, Internally Displaced Persons) 캠프에서 살고 있다.
수만 명은 합법적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위험한 경로를 통해 유럽과 다른 서방 국가들로 향했다.
깨진 약속
야지디 사례는 집단학살의 표적이 된 공동체에 유럽 난민 보호 체계를 적용할 때 그 한계가 얼마나 분명하게 드러나는지를 보여 준다. 망명법은 개인에 대한 박해를 입증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대규모 잔학 행위 이후에 뒤따르는 집단적이고 구조적인 피해를 다루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간극은 세계에서 가장 큰 야지디 해외거주민이 사는 독일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독일에는 과거 이주 세대를 포함해 23만 명이 넘는 야지디인이 살고 있다. 2014년 이후 약 10만 명의 이라크 출신 야지디인이 독일에서 망명을 신청했다.
2014년 8월, 이라크 북부 쿠르디스탄 지역 자코 국경 검문소 인근에 위치한 야지디 난민 캠프.
IS의 공격이 벌어진 직후, 독일은 관대하게 대응했다. 2014년부터 2017년 사이 이라크 출신 야지디인의 망명 신청 가운데 90% 이상이 승인되었다. 이와 함께 여러 연방주는 특히 위험에 처한 야지디 여성과 아동을 지원하기 위해 표적 수용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이러한 노력 가운데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특별 수용 할당제는 두드러졌는데, 이를 통해 IS 포로 생활에서 살아남은 약 1100명이 독일로 이주할 수 있는 경로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2017년 IS가 영토 통제력을 상실한 이후 독일의 접근 방식은 바뀌었다. 당국은 집단을 겨냥한 박해가 종료되었다고 결론지었고, 이는 사실상 집단학살에 법적 종료선을 설정한 것이었다.
승인율은 급격히 하락했다. 2023년에 이라크 출신 야지디인이 제출한 약 3400건의 신청 가운데 40%도 채 되지 않는 비율만이 승인되었고, 약 40%는 즉각 기각되었다. 또 다른 7.5%는 추방의 일시적 유예로 이어졌는데, 이는 장기적인 안전을 보장하지 않았다. 나머지 사례들은 망명 신청의 책임을 다른 유럽연합 회원국에 부여하는 더블린 규정에 따라 부적격으로 각하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동일한 소수 집단 내부에 보호의 위계를 만들어냈다. 2018년 이전에 도착한 이들은 대체로 난민 지위를 유지한 반면, 이후에 도착한 이들, 종종 같은 캠프 출신이고 동일한 강제 이주 경험을 지닌 이들은 거부되었다.
동시에 이라크의 상황은 여전히 집단학살의 결과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 신자르는 여전히 폐허 상태에 놓여 있고 재건은 더디다. 기반 시설은 대부분 파괴되었고, 무장 단체들은 계속 활동하며, 치안 상황은 불안정하다. 이 지역의 지위는 분쟁 중이며, 넓은 지역이 지뢰로 오염되어 있다. 온전한 주거 구역들이 방치된 채 남아 있고, 기본적인 공공 서비스는 극히 제한적이다. 집단 매장지가 여전히 지형 곳곳을 표시하고 있다.
쿠르디스탄 지역에서 강제 이주된 야지디인들은 취업에서 차별을 겪고 사회적으로 주변화되어 있다. 수만 명은 10년이 넘도록 국내실향민 캠프에서 살아왔으며, 귀환이나 통합으로 이어질 실질적인 경로가 없다. 이러한 조건은 많은 이들에게 집단학살적 폭력의 지속적인 유산으로 남아 있다.
2023년 1월, 독일 연방의회는 야지디 집단학살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의원들은 그 영향이 여전히 “도처에 존재”하고 있으며, 수만 명의 야지디인이 여전히 캠프에서 살고 있고, 신자르로의 귀환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인정은 대체로 상징적 수준에 머물렀다. 이는 망명 결정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이러한 단절은 야지디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깨진 약속”으로 받아들여졌다. 2024년 1월부터 2025년 6월 사이 1000명이 넘는 이라크인이 추방되었다. 정부는 세분화된 자료를 공개하지 않지만, 그 가운데 야지디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보도가 빈번하게 나오고 있다.
추방된 이들 가운데에는 학령기 자녀를 둔 가족들도 포함되어 있으며, 이들의 삶은 갑작스럽게 중단되었다. 밀리시아의 가족은 유일한 사례가 아니다. 2025년 여름, 독일 언론은 여섯 식구로 이루어진 카심 가족이 법적 항소에서 승소한 바로 그날 신자르로 송환되었다고 보도했다. 다만 그 결정은 그들의 비행기가 이륙한 뒤에야 내려졌다.
“이라크에서는 학교에도 갈 수 없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
이라크의 대부분의 야지디인은 신자르 출신이지만, 밀리시아의 가족처럼 니네베 평원의 두호크 인근 마을에서 살아온 이들도 있다. 이들이 현재 살고 있는 바비라는 공동체들이 뒤섞인 지역에 자리 잡고 있으며, 아랍인이 다수를 이루는 마을들로 둘러싸여 있다. 그곳에 도착하기 위해 나는 아랍어 표지판이 걸려 있고 전통적인 디쉬다샤를 입은 남성들이 보이는 정착촌들을 지나야 했다.
바비라는 신자르에서 북동쪽으로 약 80마일 떨어져 있다. 2014년 8월, IS가 신자르로 진격해 그들의 마을을 향해 다가오자 밀리시아의 가족은 도망쳤다. 그들의 마을은 점령당하지는 않았지만, IS는 이 지역을 통과하며 야지디 사원을 파괴했다. 가족은 쿠르디스탄 지역의 수도인 에르빌 인근으로 피신해 4개월 동안 국내실향민 캠프에서 지냈다. 결국 돌아왔을 때 그들의 집은 약탈당한 상태였다.
불안감은 끝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아이들의 어머니인 서른다섯 살의 나즈와는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는 늘 두려웠다 … 언제든 다시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항상 했다. 그 감정은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다.” 그 무렵 이미 그의 형제자매 여러 명은 독일에 살고 있었고, 부모 역시 2016년에 후원을 받아 독일로 갔다. 2년 뒤, 그는 남편과 함께 그들을 따라가기로 결심했다. “우리는 차와 가재도구, 양 몇 마리를 팔았고, 밀입국 브로커에게 돈을 지불하고 아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기 위해 저축한 돈을 모두 썼다.”
2018년 말, 이들은 튀르키예를 거쳐 독일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했다. 막내 아이는 두 살이었다. 이들은 플라스틱 보트를 타고 물길을 건넜고, 이후에는 도보로 이동했다. 나즈와는 이렇게 말했다. “밀입국 브로커들은 우리를 검은색 차에 태웠고, 독일까지 가는 내내 우리를 숨겼다.”
도착한 뒤 이들은 망명을 신청했다. 처음에는 뉘른베르크 인근의 접수 센터에 머물렀고, 이후 공동 주거 시설을 거쳐 국가 지원을 받는 작은 방 두 개짜리 아파트로 옮겼다. 아버지는 식당에서 시간제로 일했고, 나즈와는 아이들을 돌보며 학교에 데려다주었다. 아이들은 빠르게 적응했다. 독일어를 말했고, 친구를 사귀었으며, 학교와 유치원 생활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들이 2018년에 독일에 도착했다는 이유로 망명 신청은 거부되었다. 당국은 이라크에서 야지디인을 대상으로 한 집단적 박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항소는 2022년 5월에 기각되었고, 2023년 10월에는 추방을 유예해 달라는 요청도 거부되었다. 당국은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했지만, 독일에서 보낸 성장기의 세월, 독일어에 대한 유창함, 이라크에서의 교육 전망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밀리시아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독일에 왔을 때 나는 일곱 살이었고 여동생은 여섯 살이었다. 남동생들은 아주 어렸다. 지금 우리는 열네 살과 열세 살이다.”
추방은 이들의 삶을 완전히 뿌리째 뒤흔들었다. 2024년 10월 이후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있다. 이 지역의 학교들은 지역 교육과정에 대한 사전 이수를 요구하는데, 아이들은 그런 체계에 한 번도 속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쿠르드어도 아랍어도 읽고 쓰지 못한다. 밀리시아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서로 독일어로만 말한다. 독일에서는 내가 7학년에 있었다. 2년만 더 지나면 직업훈련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를 다시 돌려보냈다. 이제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의 여동생은 조용히 덧붙였다. “가끔 마을 아이들이 우리가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고 놀리기도 한다.”
현재 가족은 회색으로 빛이 바랜 벽에, 장롱 하나와 낡은 천장 선풍기만 놓인 방 하나를 임대해 살고 있다. 아버지는 임시 일용직 노동을 하며 하루에 약 1만 이라크 디나르, 약 6파운드를 번다. 그는 독일에서 받은 수술 이후 지속적인 건강 문제를 겪고 있으며, 인터뷰 당시에는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2025년 8월, 독일에서 추방된 뒤 밀리시아의 가족이 살고 있는 방 하나. 알렉산드라 안치테-예피파노바
“여기서 어떻게 삶을 다시 꾸려 나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나즈와는 말했다. “남편이 버는 돈으로는 겨우 생존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라크에 속해 있다고 느끼지 못한다.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 나는 아이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주고 싶을 뿐이다. 나는 이라크에서 살고 싶지 않다.”
그는 갈등의 역사가 복잡한 아랍 공동체들로 둘러싸인 마을에서 살아가는 것이 가족의 취약감을 더욱 키운다고 덧붙였다.
불확실한 상태에 갇힌 채, 가족은 비록 비정규적이고 위험한 경로를 택해야 하더라도 독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여전히 붙들고 있다. “합법적인 방법을 찾지 못하더라도 다른 방법을 시도할 것이다”고 나즈와는 말했다. “그러나 이제 밀입국 브로커에게 줄 돈도 없고, 지금은 선택지가 남아 있지 않다.”
지속되는 불확실성의 상태
쿠르디스탄 지역에 사는 다른 야지디인들 역시 신자르에서 강제 이주된 상태다. 최근 독일에서 추방된 스물네 살의 사드는 많은 이들이 처한 불확실성을 그대로 보여 준다. 그는 원래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쿠르디스탄에서 안정적인 삶을 재건할 수도 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
나는 또 다른 야지디 마을인 셰흐카에서 사드와 그의 어머니를 만났다. 우리는 그들이 임대해 살고 있는 집에서 바닥 쿠션에 앉았다. 이 집은 신자르를 떠난 지 11년 만에 거쳐 온 다섯 번째 집이다. 사드의 아버지는 2007년에 살해되었는데, 그때 그의 어머니는 스물다섯 살이었고 사드는 다섯 살이었다. 2014년 8월 IS가 신자르로 진격했을 때, 당시 열두 살이던 사드는 어머니와 두 남동생과 함께 탈출했다. 이들은 시리아에 도달한 뒤 결국 쿠르디스탄 지역에 이르기 전까지 며칠 동안 신자르 산에 고립되어 있었다. 걷지 못했던 그의 조부모는 젊은 여성 친척 한 명과 함께 붙잡혔다. 가족은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끝내 알지 못했다.
쿠르디스탄 지역에서 이들은 처음에 학교 건물에 몸을 숨겼다. 이후 셰흐카 마을에 살던 사드 어머니의 친척들이 머물 수 있도록 초대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집주인들이 건물을 되찾으면서 이들은 다섯 채의 집을 전전했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정착한 적이 없었다”고 사드의 어머니는 말했다. 가족은 채소를 수확하거나 정원을 청소하는 등 허드렛일로 생계를 이어갔다.
사드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는 강제 이주 이후 단 반 년만 학교에 다녔다.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겪은 일들, IS를 피해 달아나고 총성을 듣고 사람들이 우는 모습을 본 뒤에는 아이들이 집중할 수 없었다. 아이들은 너무 큰 트라우마를 안고 있었다.”
2021년 사드는 벨라루스–폴란드 경로를 통해 유럽으로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족은 밀입국 브로커에게 돈을 지불하기 위해 신자르에 있던 조부의 땅을 팔았다. 그해 10월 그는 바그다드에서 다마스쿠스로, 다시 민스크로 비행기를 탔고, 이후 숲을 통과해 폴란드 국경으로 이동했다.
그는 추위와 비, 그리고 반복적인 강제 송환을 견뎌야 했다. 사드는 이렇게 회상했다. “한 번은 폴란드 경비대가 우리의 소지품, 심지어 여권까지 버려 버리고 우리를 모욕했다.” 결국 그는 우크라이나 출신 밀입국 브로커의 차를 타고 폴란드에서 독일로 이동했다.
독일에서 그는 망명을 신청했지만, 그의 신청과 항소는 모두 기각되었다. 그는 통합 과정을 이수했고, 맥도날드에서 일했으며, 공동 아파트에서 살면서 어머니의 수술비와 기본적인 생계비를 마련하기 위해 집으로 돈을 보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적어도 나는 스스로를 부양할 수 있었고 가족을 도울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경찰이 그의 집 문을 두드렸다.
“그들은 문이 부서질 것처럼 세게 두드렸다. 그들은 나에게 짐을 쌀 시간으로 40분을 주었고, 곧바로 공항으로 데려갔다.”
사드는 추방에 대한 어떠한 사전 통지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현재 그는 가족과 함께 호주에 거주하는 야지디 여성 소유의 집을 임대해 살고 있다.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회상했다. “한 번은 그가 두 달 동안 머물 예정이라며 우리에게 나가 달라고 했다. 우리는 갈 곳이 없다고 애원했다. 결국 그는 우리가 계속 머물 수 있게 해 주었다.”
신자르로 돌아가는 것은 선택지가 아니다. 고향 마을에 있던 집은 파괴되었고, 안정적인 전기나 물 공급도 없으며, 사드의 어머니는 정기적인 치료가 필요한 만성 질환을 앓고 있다. 무엇보다 2014년의 트라우마가 여전히 생생하다.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신자르에 가면 모든 것이 떠오른다. IS가 우리를 공격하고, 우리 집을 불태웠던 일들 말이다.” 그들은 친척을 만나거나 사드의 아버지 무덤을 찾기 위해서만 가끔 그곳을 방문한다.
독일에서 추방된 뒤인 2025년 10월, 신자르를 방문한 사드. 출처: 사드 나와프 압도
독일 당국은 종종 야지디인들이 쿠르디스탄 지역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야지디인들처럼 쿠르드어 쿠르만지 방언을 사용하는 사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학교를 마치지 못했다. 나는 아랍어도, 이라크 쿠르디스탄의 주요 방언인 소라니어도 하지 못한다. 내가 어떻게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와 그의 어머니는 현지 무슬림 쿠르드인 일부 집단으로부터의 왜곡된 인식과 온라인 혐오 발언의 영향도 받고 있다. 사드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야지디인을 모욕하는 글을 올린다. 아무도 그것을 막지 않는다. 우리는 가장 낮은 존재로 취급받는다.”
귀환 이후 사드와 현재 열아홉 살과 스무 살이 된 그의 형제들은 계절성 농업 노동을 하고 있다. 이들은 새벽 3시부터 늦은 오전까지 채소를 수확하며 하루에 각각 약 1만 4000이란 이라크 디나르, 약 8파운드를 번다. 이 일은 1년에 몇 달 동안만 가능해 가족의 총소득은 쿠르디스탄 지역의 빈곤선 근처이거나 그 이하에 머문다.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사드가 독일로 갔을 때 우리는 그가 합법적으로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드의 여권에는 이제 추방 도장이 찍혀 있어 합법적인 재입국이 불가능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다시 독일에 가고 싶지만 합법적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는 그리움 속에서 독일을 떠올렸다. “그곳에서는 내가 일할 수 있었다. 해가 뜨기 전부터 일어나 햇볕 아래서 감자를 캐지 않아도 되었다 … 그런데 이제 여기서 하던 그 일마저도 끝났다. 계절이 지났기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는 조용히 덧붙였다. “사드가 돌아왔을 때 그는 매우 좋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어머니이자 아버지가 되어야 했다. 나는 그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늘 캠프에서 살아왔다”
밀리시아와 사드의 가족이 야지디 마을에서 살고 있는 반면, 10만 명이 넘는 야지디인들은 여전히 두호크 인근의 국내실향민 캠프에서 지내고 있다. IS의 첫 공격이 있은 지 11년이 지난 지금, 원래는 임시 보호소로 설계되었던 이 캠프들은 쿠르디스탄의 풍경 속에 고착된 존재가 되었고, 기다림과 불확실성이 지속되는 영구적 정착지가 되었다. 많은 이들에게 해외로 떠나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을 제공한다.
국내실향민 캠프로의 송환조차도 야지디인들을 독일의 추방으로부터 보호하지 못한다. 당국과 법원은 캠프에서 기본적인 필요가 충족될 것이라는 좁은 해석을 채택해 왔다. 이러한 접근은 사람들이 한때 탈출했던 바로 그 캠프로 다시 보내지는 사례를 낳았고, 독일에서 이루어진 수년간의 통합을 무효화하며 강제 이주와 절망의 순환을 강화하고 있다.
스물일곱 살의 사베르는 그와 같은 사례 가운데 하나다. 독일 언론은 그가 쿠르디스탄 지역의 샤리야 국내실향민 캠프로 추방된 뒤의 상황을 보도했다. 그는 독일에서 4년을 보낸 뒤 현재 그 캠프에서 텐트에 살고 있다. 그는 독일에서 전일제로 일했고,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일상생활에 잘 통합되어 있었다.
독일에서 불안정한 체류 지위를 가진 다른 이들 역시 비슷한 위험에 직면해 있으며, 종종 캠프에 남아 있는 가족과 떨어져 지내고 있다. 가족 재결합에 대한 독일의 제한은 수년 동안 많은 가족을 갈라놓았다. 아내들은 홀로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은 아버지 없이 자라며, 독일에 있는 남성들은 법적 불확실성 속에서 기다리는 동안 가족들은 텐트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가족들에게 독일은 지속 가능한 해결책을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마흔 살의 라일라와 그의 아이들은 2014년 신자르에서 탈출한 이후 칸케 국내실향민 캠프에서 살아왔다. 내가 캠프를 걸어 다니는 동안 텐트들은 가지런한 줄로 늘어서 있었고, 아이들은 먼지투성이 길에서 놀고 있었다. 이들은 캠프 밖의 삶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세대다. 표준 텐트에서 반복적으로 화재가 발생한 뒤, 주민들은 콘크리트 블록을 사용해 거처를 다시 지을 수 있도록 허용되었고, 지붕만은 임시 구조물로 남아 있다. 라일라의 가족은 이제 플라스틱 의자 몇 개와 소파, 텔레비전, 냉장고만 놓인 작은 방 하나를 사용하고 있다.
2025년 8월, 삶의 대부분을 살아온 칸케 국내실향민(IDP) 캠프에 있는 라일라의 아이들. 출처: 알렉산드라 안치테-예피파노바
라일라의 남편은 2017년에 비정규 경로를 통해 독일로 떠났다. 그의 망명 신청은 처음에는 거부되었지만, 이후 추방 유예를 의미하는 둘둥(Duldung)을 받았다. 이 지위는 가족 재결합을 허용하지 않았고, 그 결과 가족은 캠프에 발이 묶였다. 그는 현재 하노버의 맥도날드에서 일하고 있으며, 이제는 가족 재결합이 가능한 체류 허가를 취득했다. 그러나 그 시점은 라일라의 두 아들에게는 이미 너무 늦었다. 두 아들은 여전히 캠프에 살고 있고, 이제는 성인이 되었다. 현재 가족 재결합 자격을 유지하는 사람은 라일라와 딸뿐이며, 그마저도 아버지가 충분한 소득을 벌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다. 2021년에 비정규적으로 이주한 스무 살 초반의 장남은 이제 같은 캠프로 다시 추방될 위기에 놓여 있다. 열세 살인 라일라의 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전화로만 이야기한다.”
라일라는 이렇게 덧붙였다. “남편 없이 사는 것은 매우 어렵다. 아이들에게는 아버지가 있어야 한다. 나는 병원 일부터 장보기까지 모든 것을 혼자 처리한다. 모든 부담이 나에게 쏠려 있다.”
신자르로 돌아가는 것은 선택지가 아니다. 그들의 집은 파괴되었고, 그 지역은 버려진 상태다. 라일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마을 출신 중 그곳에 사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그의 딸에게 캠프는 영구적인 삶의 터전이 되었다. “나는 신자르를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늘 이 캠프에서 살아왔다.” 어머니 역시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우리가 어디 출신이냐고 물으면 우리는 ‘캠프 출신이다’라고 말한다.”
독일은 희망을 상징한다. 라일라는 이렇게 말했다. “독일에는 안전이 있고, 인권이 있고, 일이 있다. 나는 어린 나이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독일에 있다면 다시 학교로 돌아가 마칠 것이다. 여성들은 일할 수 있고 삶을 가질 수 있다.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어머니와 딸은 모두 독일어를 배우고 있다. 딸은 온라인으로 공부하고 있으며, 이제 독일어로 자기소개를 할 수 있다. “만약 독일에 가게 된다면 공부하고 싶다. 의사가 되어 아픈 사람들을 돕고 싶다.”
라일라는 독일의 정책 변화에 대한 좌절감을 드러냈다. “우리는 독일이 계속해서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처음에는 지지를 받고 있다고 느꼈고, 사람들이 우리 편에 서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들은 멈췄다. 우리는 수많은 집단학살을 살아남았다. 매번 우리는 살아남고, 그리고 또다시 그런 일이 벌어진다.” 독일을 향한 그의 메시지는 단순하다.
“우리는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야지디인에 대한 추방을 멈춰 달라. 그들에게 영구 거주권을 부여하고 가족을 재결합시켜 달라.”
“우리는 괴물들에게서 도망쳤다”
같은 캠프 인근에서 서른여덟 살의 마지다는 여섯 명의 아이들과 함께 작은 방 하나에서 살고 있다. 이 캠프는 2014년부터 그들의 집이었다. 그의 남편 카말은 보호를 확보하고 궁극적으로 가족을 재결합하기를 바라며, 그렇게 성공한 친구의 뒤를 따라 2017년에 독일로 떠났다.
2025년 8월, 칸케 캠프에 있는 열한 살에서 열여덟 살 사이의 여섯 자녀와 함께한 마지다. 출처: 알렉산드라 안치테-예피파노바
그러나 그의 망명 신청은 반복해서 거부되었고, 그 결과 그는 불안정한 법적 지위에 놓인 채 가족을 데려올 수 없었다. 마지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8년 동안 그를 보지 못했다.”
2014년 이전, 카말은 신자르의 마을에서 집을 짓기 위해 수년간 일했다. 마지다는 이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것은 우리의 꿈이었다. 우리는 이사해 들어가 겨우 1년을 살았을 뿐인데 IS가 왔다. 그 뒤 우리는 도망쳤고, 집은 파괴되었다.”
처음 캠프에 도착했을 때, 이들은 그것이 임시적일 것이라고 믿었다. “처음에는 며칠만 지속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아무도 우리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지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여기에서는 미래를 보지 못한다. 캠프에서도, 신자르에서도 그렇다.” 가족은 최근 신분증 발급 절차를 밟기 위해 신자르를 방문했는데, 이는 10여 년 전 탈출한 이후 첫 방문이었다. 마지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곳에 갔을 때 모든 것이 떠올랐다. 나의 어린 시절, 이웃들, 살해된 사람들, 우리가 어떻게 탈출했는지가 모두 떠올랐다. 나는 울었다. 그러나 아이들을 구할 수 있었던 것에는 감사했다. 우리는 괴물들에게서 도망쳤다.”
이라크 정부는 귀환해 재건에 나서는 각 야지디 실향 가구에 400만 이라크 디나르, 약 2300파운드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야지디인들과 인권 단체들은 이 금액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마지다의 가족은 집을 짓는 데 약 3000만 디나르, 약 1만7000파운드를 썼다.
마지다는 쿠르디스탄 지역에서도 자신이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캠프 생활은 대체로 고립되어 있으며, 이 지역의 지배적 집단인 무슬림 쿠르드인들과의 접촉은 거의 없다. 이러한 조건은 불안감을 키운다. 마지다는 야지디인이 더 넓은 공동체의 일부로 여겨지지 않는다고 믿는다.
두려움과 불신은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쿠르디스탄 지역에 새 집이 지어진다 하더라도, 마지다는 무슬림 다수 지역의 2층짜리 집보다 다른 야지디인들과 함께 있는 캠프를 여전히 더 선호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정부를 신뢰하지 않는다.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내 아이들에게도 다시 일어날까 두렵다. 이웃 도시의 놀이터에 아이들을 데려가도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고용에서의 차별 역시 이러한 감정을 더한다. 야지디인은 비무슬림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할랄’ 음식 취급과 양립할 수 없다는 인식 때문에 식품 산업 일자리에서 종종 배제된다.
마지다의 여섯 자녀는 이제 11세에서 18세 사이가 되었다. 홀로 아이들을 키우는 일은 몹시 고된 일이었다. 마지다는 남편 없이 보냈던 초기의 세월을 떠올리며 울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콩을 팔았다. 남편은 독일에서 숨어 지내며 일도 하지 못했고, 돈도 보내지 못했다. 이후 비정부기구들이 나에게 재봉 기술을 가르쳐 주었고, 나는 작은 재단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돈은 늘 부족했다. 병원과 의사에게 너무 많은 돈을 썼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데도 돈이 들었다. 그래도 충분하지 않았다.”
절박함 속에서, 그리고 가족 재결합을 위한 합법적 경로를 기다리는 데 지친 나머지, 마지다는 2023년에 아이들과 함께 튀르키예를 거쳐 비정규적인 방식으로 유럽에 가려 했다. 그러나 이들은 적발되어 이라크로 되돌려졌다.
현재 18세인 아들 가운데 한 명은 이렇게 말했다. “독일에서는 미래를 만들 수 있다. 학교에 가고, 일할 수 있다. 여기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또 다른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학교를 마치면 우리는 독일로 갈 방법을 찾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
마지다의 남편 카말은 현재 마흔다섯 살로, 하노버 인근의 독일 도시 브라운슈바이크에 살고 있다. 나는 그를 화상 통화로 따로 인터뷰했다. 카말은 난민 숙소에서 다른 남성과 작은 방을 함께 쓰며, 물류 창고에서 교대 근무를 하고 있다.
망명 거부, 비정규 체류 기간, 수백 유로에 이르는 법률 비용이 이어진 8년 끝에, 카말은 최근 2년짜리 임시 체류 허가를 받았다. 이 허가는 향후 영주권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있지만, 가족 재결합은 예외적인 인도적 경우에만 허용하며, 그 기준은 너무 높아 여전히 가족과의 재결합은 요원하다.
인터뷰 도중 카말은 눈물을 터뜨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라크에는 우리의 미래가 없다. 야지디인은 늘 표적이 되어 왔고, 나는 그것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독일이 우리 가족을 보호해 줄 것이라 기대하며 이곳에 왔다. 모두가 이곳에서는 인권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내 삶은 멈춰 있다. 매일 밤 아이들이 그리워서 운다. 나는 그들을 수년 동안 보지 못했고, 이제 아이들은 나를 알지 못한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나에게는 더 이상 인간성이 남아 있지 않고, 독일에 대한 희망도 잃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평생 이렇게 혼자 남게 될까? 때로는 삶을 끝내는 생각까지 한다. 너무 벅차다.”
신자르는 다시는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독일에서의 가족 재결합 대신, 많은 야지디 남성들은 이제 캠프로 다시 추방될 위험에 직면해 있다. 이것이 바로 마흔두 살의 알리에게 일어난 일이다. 2023년 가을, 그는 야지디인 추방에 반대하는 베를린 시위에 참여해 의회 앞에서 독일 언론과 인터뷰했다. 불과 몇 주 뒤인 2023년 12월, 알리는 독일에서 5년을 보낸 끝에 본인 역시 추방되었다. 그는 처음에 신자르를 탈출한 뒤 2014년부터 아내와 일곱 자녀가 살아온 쿠르디스탄 지역의 국내실향민 캠프로 돌아갔다.
알리는 2018년 말 독일에 도착했으며, 언젠가 가족을 데려올 수 있기를 바랐다. 그는 밀입국 브로커들에게 약 1만 달러를 지불 했는데, 이는 친척들에게 빌린 돈과 자신의 저축을 합친 것이었다. 그의 망명 신청과 이후의 항소는 모두 기각되었다. 독일에 머무는 동안 그는 건설 현장에서 일했다. 2023년 가을, 그는 추방 통지를 받았다.
2017년 12월, 폐허가 된 신자르의 텅 빈 거리. 출처: 셔터스톡/토마스 다비도프
나는 내가 두호크에 있고 그가 신자르에 있을 때 전화로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캠프를 떠난 뒤 몇 달 전에 신자르로 옮겼다. 현재 다섯 살에서 열여덟 살 사이인 그의 아이들은 그를 거의 알지 못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캠프로 돌아왔을 때 아이들이 ‘이 남자는 누구야?’라고 물었다. 내가 뭔가를 주려고 했지만, 아이들은 나를 모르기 때문에 받지 않았다. 아이들이 나에게 조금이라도 익숙해지는 데 거의 1년이 걸렸다. 지금도 아이들은 내 앞에서 정상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아이들 중 누구도 나와 함께 자지 않는다. 항상 엄마와 함께 잔다. 나는 늘 아이들에게 낯선 사람처럼 느껴진다. 가까이 가서 아이들을 안거나 입맞추려 해도 아이들은 응답하지 않는다. 이상한 느낌이다.”
알리와 그의 가족은 그가 추방된 뒤 11개월 동안 캠프에서 지냈다. 그는 정신 건강에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신자르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들의 집은 완전히 파괴된 상태였다. 알리는 정부가 제공하는 400만 이라크 디나르의 보상금을 신청했지만, 가족은 아직 그 돈을 받지 못했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집에서 살고 있다. 집주인들이 돌아오면 우리에게 나가 달라고 할 것이다.” 그들이 살던 거리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파괴되었거나 버려져 있다.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가족은 과수원에서 채소를 심는 일을 하지만, 소득은 불안정하고 계절적이다. 알리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든 캠프든, 두 곳 모두 나쁘다.”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가
이슬람국가는 군사적으로 패배했지만, 야지디인들에게 가해진 피해는 2017년에 끝나지 않았다. 단일 지역에 뿌리를 둔, 역사적으로 박해받아 온 소수 집단에게 존엄을 해치는 조건에서의 장기적인 강제 이주는 집단학살의 장기적 결과를 지속시킨다. 실질적인 지역 내 해결책이 없는 상황에서 해외 이주는 많은 야지디인들이 삶을 재건할 수 있는 유일하게 현실적인 방법이 되었다.
결정적으로, 관련 인원 수는 많지 않다. 2016년에 약 3만7000건으로 정점을 찍은 뒤, 독일에서 이라크 출신 야지디인의 연간 망명 신청 건수는 최근 약 4000건 수준이거나 그 이하로 감소했다. 독일 최대의 난민 지원 비정부기구인 ‘프로 아질’(Pro Asyl)은 현재 최대 1만 명의 야지디인이 이라크로 추방될 위험에 처해 있다고 추산한다.
최소한 독일은 2017년 이후 도착한 야지디인들에게 노동과 가족 재결합 권리를 포함한 안정적인 임시 체류 지위를 부여하고, 영구적 지위로 이어지는 명확한 경로를 제공해야 한다. 밀리시아의 사례에서 보듯이 교육과 소속감이 상실되는 일을 막기 위해 아동의 권리를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
독일 녹색당이 제안한 법안 초안은 2025년 7월까지 도착한 이라크 출신 야지디인들에게 3년짜리 체류 허가를 부여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는 이라크의 지속적인 불안정성과 집단학살을 인정한 이후 독일이 지는 특별한 책임을 함께 인정하는 것이다. 이 법안이 통과될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궁극적으로 야지디 문제를 해결하려면 집단학살 생존자를 별도의 취약 집단으로 인식하고, 강제 이주와 피해의 지속을 막을 수 있는 지속 가능한 해법을 제공하는 맞춤형 접근이 필요하다.
알리는 여전히 야지디인들에게 유일한 장기적 해결책은 해외 이주라고 믿는다. 그는 독일이 안전, 종교의 자유, 그리고 미래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본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우리의 종교를 묻지 않고, 아무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 우리는 미래를 가질 수 있다. 여기, 신자르는 2014년 이전처럼 결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항상 마음속에 두려움을 안고 산다.”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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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라 안치테-예피파노바(Aleksandra Ancite-Jepifánova)는 중앙유럽대학교(CEU) 민주주의 연구소 연구 협력연구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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