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로부터의 탈출⟫(In Escape From Capitalism)에서 경제학자 클라라 마테이(Clara Mattei)는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설명을 단호하게 옹호하며, 경제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주장한다.
[서평] 클라라 마테이(Clara Mattei)의 ⟪자본주의로부터의 탈출: 개입⟫(Escape From Capitalism: An Intervention)
현대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사회주의적 흐름 가운데 다수는 금융화, 독점의 강화, 규제 완화, 기업의 정치 장악 등으로 드러나는 부패와 쇠퇴에 주목한다. 이들은 금융 기생, “테크노봉건” 지배자들의 지대 추출, 정치 부패를 자본주의의 경쟁력을 약화시킨 일탈로 본다. 그 결과 불평등이 급격히 확대되고 노동계급의 삶이 불안정해졌으며, 결국 오늘날의 신파시즘적 트럼프주의로 이어졌다고 설명한다.
동시에 이러한 설명은 사회민주주의적 계급 타협 정치로 나아간다. 노동자와 “생산적” 산업 자본가, 즉 그들의 고용주가 기술 독점이나 과도한 금융 투기를 억제하고 정부 지출을 확대함으로써 “경쟁력 회복”이라는 공동의 이해를 공유한다고 가정한다. 따라서 사회주의 전략은 다소 더 진보적인 외양을 띠더라도 미국 자본주의를 재활성화하는 데 맞춰져야 한다고 본다.
클라라 마테이의 ⟪자본주의로부터의 탈출⟫은 이러한 관점에 중요한 교정을 제시한다. 여러 면에서 이 책은 우리가 기다려온 책이다. 이 책은 자본주의에 대한 입문서이자 신고전파 경제학에 대한 비판을 제공하면서도, 기업의 탐욕, 대형 금융, 독점 권력을 주요 정치적 문제로 지목하는 단순화된 포퓰리즘적 틀을 거부한다. 마테이는 문제는 자본주의 그 자체라고 주장한다. 자본주의는 고장 나서 수리가 필요한 체제가 아니라, 제대로 작동하고 있으며 폐지되어야 할 체제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윤의 논리”와 “필요의 논리” 사이에는 근본적 모순이 존재한다. 다수의 박탈은 체제의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에 이익을 주고 심지어 자본이 요구하는 조건이다. 노동자의 빈곤화와 권위주의의 강화는 자본주의의 실패가 아니라 그 기본적 동력의 결과다. 한편 경쟁력은 노동자에게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다.
마테이는 착취를 유지하려면 일정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 핵심이 바로 긴축이다. 국가는 긴축을 통해 생활의 불안을 키우고, 이를 수단으로 노동자를 통제한다. 또한 그는 주류 경제학이 자본주의의 이해관계를 ‘중립적 과학’처럼 포장함으로써 긴축을 정당화해 왔다고 지적한다. 객관성을 내세우고 복잡한 수학 모형에 의존하는 방식은 경제 문제를 정치의 영역에서 떼어내었다. 그 결과 경제 정책은 선출되지 않은 ‘전문가’에게 맡겨졌고, 권위주의적 통치가 강화했다.
마테이에 따르면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면 경제 체제, 경제 정책, 경제 이론을 계급 권력이 형성되고 행사되는 불가피하게 정치적인 공간으로 인식해야 한다. 마테이가 하듯이 자본주의를 역사적으로 분석하면 이러한 각 영역에서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가 드러난다. 그리고 어떤 결과도 예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는 오늘날 노동계급 동원을 가로막는 주요 장벽인 숙명론에 강력한 도전을 제기한다.
자본 질서
이 책은 “자본 질서”가 두 개의 “기본 기둥”, 즉 노동시장과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위에 세워져 있으며, 이 기둥들이 이윤이라는 “지붕”을 떠받친다고 명료하게 설명하며 시작한다. 마테이는 시장이 자본주의의 본격적 등장 이전에도 존재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전 경제 체제와의 결정적 질적 단절을 이루는 것은 단순한 교역의 양적 확대가 아니라 일반화된 시장 의존이다. 오늘날 사회는 생존과 재생산을 시장에 의존한다.
마테이는 칼 마르크스의 “이른바 시초적 축적”(so-called primitive accumulation) 분석을 다시 떠올린다. 그는 자본주의가 생산성 향상과 함께 평화롭게 시장이 확대되면서 등장했다는 신고전파의 설명이 신화에 불과하다고 강조한다. 절대적 사유재산권은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것이 아니라, 국가가 주도한 광범위하고 폭력적인 수탈을 통해 확립되었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인류의 연대기에 피와 불의 글자로 기록된” 과정이었다. 마테이는 시장이 국가를 밀어낸 것이 아니라, 경쟁의 강제 법칙과 국가 권력이 함께 작동해 자본주의 질서를 세워 왔다고 주장한다.
마테이는 자본주의가 처음부터 한 극에서는 부의 축적을, 다른 극에서는 빈곤의 축적을 낳아 왔다고 말한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축적의 절대적 일반 법칙”이라 부른 현상이다. 이것은 이윤의 논리가 필요의 논리와 근본적으로 충돌한다는 마테이의 주장의 토대가 된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목적은 인간의 번영을 뒷받침하는 사용가치의 창출이 아니라,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의 노동을 통제함으로써 교환가치를 끝없이 축적하는 데 있다. 신자유주의가 노동계급을 황폐화한 현실을 자본주의의 실패가 아니라 그 내적 논리의 연장으로 보아야 한다. 이를 실패로 간주하면 필요와 이윤, 자본과 노동 사이의 대립을 탈정치화하게 된다. 이는 강력하고 경쟁적인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노동자에게 이익을 준다는 함의를 낳고, 따라서 노동자와 자본가의 이해관계가 본질적으로 대립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실제로 자본의 힘은 언제나 인간의 필요를 이윤의 명령에 종속시키는 데 기초해 왔다.
마테이는 경제 성장이 “자본가 계급의 논리적 전개”를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기술 발전은 착취를 극대화하려는 명령에 의해 추동되며, 일정 시간 안에 각 노동자가 더 많은 생산을 하도록 만든다. 노동 조직이 부재한 상황에서 체제는 가장 높은 임금을 받는 일자리를 자동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노동자를 일자리에서 밀어내고 실업자를 늘리며, 모든 임금에 대한 경쟁 압력을 강화한다. 한편 임금이 생산성보다 빠르게 상승해 착취율이 낮아지고 자본가의 수익이 줄어들면, 이윤 부족은 투자 축소와 해고로 이어진다. 이는 다시 실업 예비군을 확대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안에서 노동자는 궁극적으로 승리할 수 없다. 임금 인상은 단지 자본의 힘에 자신의 운명을 묶어 두는 “스스로 만든 황금 사슬”이 잠시 “다소 느슨해졌을” 뿐이다. 성장은 흔히 주장되듯 자본과 노동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윈윈이 아니다. 계급 규율은 그 논리 속에 내장되어 있다. 그러므로 노동계급 정치는 더 높은 임금을 요구하는 데 머물 수 없으며, 자본주의 자체로부터의 탈출을 목표로 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 경제 이론에 기초한 이러한 토대는 마테이의 분석이 “억만장자 계급의 탐욕”에 대한 포퓰리즘적 외침을 넘어설 수 있게 한다. 그런 외침은 대개 부가 생산되는 근본 과정이 아니라 소득 분배에 초점을 맞춘다. 마테이는 소득의 층화와 계급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보여준다. 계급은 얼마를 버는가가 아니라 그 소득이 어디에서 오는가, 즉 생산 관계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와 관련된다.
이 틀은 인종과 성별 불평등 역시 그러한 집단들 사이와 내부의 위계를 구조화하는 계급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밝히는 데 도움을 준다. 포퓰리즘적 틀이 주장하는 장점은, 부와 권력의 불평등이 지닌 구조적 뿌리를 밝히는 보다 실질적인 경제 이론이 “너무 어렵고”, “너무 복잡하고”, “너무 위협적”이어서 대중에게 전달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러나 마테이의 글은 초심자를 위축시킬 수 있는 전문 용어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정치적 긴박성을 희생하지 않는다. 사회의 권력 관계가 지닌 체계적 근원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일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체계적 변화를 가리킨다.
특히 중요한 것은 축적을 추동하는 중심적 힘으로서 경쟁을 이해하는 마테이의 관점이다. 이는 오랫동안 비주류 경제학을 지배해 온 “독점 자본” 논지를 거부한다. 경쟁은 자본주의의 초기 단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체제의 놀라운 역동성과 회복력을 낳는 원천이다. 마테이는 시장 지배가 본질적으로 일시적이며 언제나 경쟁자의 압력에 놓여 있다고 주장한다. 혁신을 향한 경쟁과 가격 인하 경향은 “멈출 수 없다.” 자본이 집중과 중앙집중을 통해 성장할수록 이러한 경향은 더 큰 규모, 더 파괴적인 형태로 재생산된다.
무엇보다 경쟁은 신고전파 경제학이 주장하듯 노동자에게 이익이 아니다. 신고전파는 노동자가 공정한 보상을 받지 못하면 다른 고용주를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경쟁은 마르크스의 “일반 법칙”을 떠받치며, 기업이 착취를 극대화하도록 강제하고, 잉여 인구의 생산을 보장한다. 마테이에게 경쟁은 “이윤의 논리”를 지탱하는 핵심 요소이며, 노동자를 규율하고 시장에 대한 의존을 강화한다.

마테이의 주장은 금융화와 아마존 기업에 대한 우리의 연구와도 맞닿아 있다. 우리는 ⟪미국 금융의 흥망성쇠⟫(The Fall and Rise of American Finance)에서 금융화가 자본의 이동성을 높여 지리적·부문 간 순환을 용이하게 한 만큼, 세계적 차원에서 체제의 경쟁적 역동성을 강화했음을 보여주었다. 상대적으로 낮은 수익을 내는 자산에서 자본을 쉽게 회수해 더 높은 수익을 내는 자산으로 배분할 수 있을수록, 모든 투자에 대해 수익 극대화를 강제하는 경쟁 규율은 더욱 강해진다.
마찬가지로 마테이가 핵심 사례로 언급한 아마존에 대한 우리의 연구는, 흔히 주장되듯 아마존이 독점 기업이 아니라 극도로 경쟁적인 기업임을 보여주었다. 독점 이론이 예측하듯 높은 가격, 기술 정체, 비효율, 과도한 이윤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아마존은 끊임없는 혁신과 구조조정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 갱신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싸워야 했다. 특히 유통 시간과 비용을 최소화해 최소 시간 안에 이윤 생산을 극대화하고, 가격을 대폭 인하하는 방식으로 경쟁했다.
이 분석은 “테크노봉건” 가설에 도전한다. 그 가설은 오늘날의 많은 경제·사회적 문제를 “생산적” 자본가들로부터 가치를 빨아들이는 일부 기술 기업의 독점 권력 때문에 자본주의가 오작동한 결과로 돌린다. 이러한 설명은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 연방거래위원장을 지낸 반독점 전문가 리나 칸(Lina Khan)의 작업에 크게 기대면서, 보다 급진적으로 들리는 언어로 포장하는 경우가 많다.
이 가설이 함의하는 바는 “경쟁 회복”이 노동자와 산업 자본가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아마존은 경쟁이 노동자에게 얼마나 해로운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다. 치열한 가격 경쟁은 임금에 대한 끊임없는 하향 압력을 통해 가장 가혹한 착취를 낳았고, 수천 명이 일하는 창고에서 노동 과정을 자동화하고 감시하고 규율하는 지속적 혁신을 초래했다. 이는 ⟪자본론⟫ 제1권의 한 구절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투기적” 금융을 겨냥한다고 해서 자유주의자들이 그리워하는 “좋은” 산업 주도 자본주의가 등장할 가능성도 낮다. 마테이의 분석은 신자유주의 시기에 노동자에게 가해진 막대한 피해가 경쟁의 부재가 아니라 경쟁 그 자체의 결과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긴축과 자본주의 국가
오늘날 자본주의를 병든 체제로 보는 좌파가 적지 않지만, 유럽 사회민주주의(혹은 그보다 훨씬 제한적인 형태인 뉴딜)는 흔히 그 치료제로 제시된다. 이는 노동자와 자본가가 강력하고 경쟁력 있는 자본주의를 “회복”하는 데 공동의 이해관계를 갖는다는 주장을 확장한 것이다. 실제로 사회민주주의 체제는 자본주의와 사회적 정의, 사적 이윤의 우선성과 민주주의·평등의 우선성 사이의 모순을 해결한 사례로 간주되곤 한다. 이러한 체제들이 점점 더 가혹한 긴축을 시행하고 있음에도, 무한한 경제 성장을 유지하면서 소득 재분배와 복지국가에 대한 민주적 요구를 수용할 수 있다는 증거로 호출된다.
그러나 마테이에게 이 체제들의 위기와 함께 강화된 긴축은 단순한 정책 선택이나 정치적 실패가 아니다. 그것은 “이윤의 논리”가 “필요의 논리”와의 적대성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부과되는 구조적 필연이다. 따라서 긴축에 맞선다는 것은 더 진보적인 자본주의를 도입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을 요구한다.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방어할 것이 아니라, 그 내부 개혁의 한계를 폭로하고 다른 경제·사회 질서를 주장해야 한다.
마테이는 자본주의 경제가 계급 권력과 착취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권위주의적 정치 관리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거시경제 정책은 사회적 통제 체계에 불과하다. 정책의 손잡이를 조정하고, 레버를 당기고, 나사를 죄어 지배계급의 권력을 확보하면서도 이윤 축적의 범위 안에서 노동자의 요구를 수용한다. 특히 국가는 긴축을 강제함으로써 노동자가 시장에, 곧 자본가 고용주에게 의존하도록 만든다. 임금 노동 밖에서 생존할 수 있는 수단을 박탈함으로써 의존을 지속시킨다.
신고전파 경제학은 이 질서를 정당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그것은 착취를 보이지 않게 만들고, 국가 정책의 계급적 성격을 객관적 과학 전문성이라는 베일 뒤에 숨긴다. 이른바 “순수 경제학”은 민주주의를 “정치 영역”으로 축소하고 “경제”를 그 밖으로 밀어낸다. 그 결과 정치 영역조차 탈정치화되고, 순수한 기술적 문제를 중립적으로 해결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기술관료에게 권력이 집중된다.
자본주의 국가는 세 가지 형태의 긴축을 시행한다. 첫째, 사회 지출을 억제하는 재정 긴축이다. 둘째, 금리 정책을 통한 통화 긴축이다. 셋째, 노동권을 제한하는 산업 긴축이다. 신자유주의 시기 착취를 강화하는 데 있어 “노동조합 자유에 대한 공격”이 복지 축소와 함께 핵심적이었다는 점은 널리 지적되어 왔다. 덜 명확하게 보이는 것은 최근 수십 년간 중앙은행 권한이 강화되면서 중요성이 커진 통화 긴축의 역할이다. 마테이가 설명하듯 통화 정책은 이른바 필립스 곡선에 의해 안내된다. 이는 인플레이션과 실업 사이에 역의 관계가 있다고 가정한다. 하나가 오르면 다른 하나는 내려간다.
금리를 인상하면 실업이 증가하고, 일자리를 둘러싼 노동자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임금은 하락 압력을 받는다. 명시적 목표는 경제학자들이 NAIRU(Non-Accelerating Inflation Rate of Unemployment, 비가속적 인플레이션 실업률)라 부르는 수준, 즉 노동계급의 순응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적정” 실업률을 유지하는 것이다. 마테이는 “인플레이션 통제”라고 부르는 것이 실제로는 “이윤 보호”이며, 목표 착취율을 달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업은 인간 사회의 자연 상태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의 필수적 특징이며 정치적 선택의 산물이다.
긴축이 반복적으로 의미 있는 경제 성장을 촉진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좌파의 케인스주의 비판자들은 이러한 정책을 “실패”로 조롱해 왔다. 그들은 재분배와 재정 확대를 통해 총수요를 자극하고 고용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테이의 핵심적 지적은 긴축이 성장을 만들어내기 위한 잘못된 시도도 아니고, 실제로 실패한 것도 아니라는 데 있다. 긴축의 시행은 기술적 오해나 이론적 오류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심층적으로 정치적인 메커니즘이다. 그리고 긴축은 우연적 선택이 아니라, 수익성을 떠받치는 계급 규율을 유지하기 위한 구조적 필연이다.
따라서 긴축은 “신자유주의적 일탈”이 아니라 거시경제 거버넌스의 지속적인 특징이다. 모든 공공지출은 이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의 경제 정책은 단순히 경제 사상의 변화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계급 투쟁의 도가니 속에서 단련된 자본주의 전략이다. 국가는 노동자의 요구에 대응해 개혁을 추진할 수 있다. 그러나 긴축은 그 개혁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에 엄격한 한계를 설정한다. 자본주의가 의존하는 노동의 상품화를 훼손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마테이는 이 역사적 전개를 충분히 탐구하지는 않지만, 그의 틀은 사회민주주의 정치의 구조적 한계를 분명히 드러낸다. 사회민주주의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나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경계를 문제 삼지 않으면서 노동자에게 유리한 개혁을 확보하려 한다. 명목상 사회주의를 표방했음에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역사는 사회주의로의 점진적 전진이 아니라 “관리된 자본주의”를 최종 정치적 지평으로 수용한 역사였다.
노동자의 요구를 자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명령과, 그 요구를 자본주의 국가 기구 안에 흡수하는 과정은 이 정당들의 위로부터의 관료적 구조를 강화했다. 그들은 활동성을 억누르고 정치 참여를 선거 경로로 한정했으며, 사회주의적 전환에 필요한 민주적 역량을 키우지 않았다. 이러한 지향은 케인스주의 경제학의 부상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케인스주의는 개혁이 이윤을 위협하기보다는 이익이 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자신들을 보수적 경쟁자들보다 더 나은 자본주의 관리자로 자리매김하며, 자본과 노동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윈윈”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사회민주주의는 마테이가 지적한 긴축 형태들에 의존해 시장 규율을 유지해 왔다. 사회 프로그램은 재정적 절제나 통화 정책의 상쇄적 수단을 통해 조정되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임금 노동을 수행해야 한다는 강제를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요구는 산업적 긴축을 통해서도 억제되었다. 특히 노동조합과 기업 단체를 국가에 통합하는 코포라티즘적 장치는 계급 갈등을 관리했다.
이 제도들은 “소득 정책”을 통해 임금 상승이 이윤을 잠식하지 못하도록 통제했다. 그러나 전후 호황의 종식과 1970년대 위기는 긴축의 망치를 본격적으로 내리쳤다. 이윤 하락은 실질임금과 사회 지출을 삭감해 착취를 강화할 것을 요구했다. 분배 타협과 계급 규율을 떠받치던 코포라티즘적 장치는 사회민주주의 체제가 “세계적 경쟁력”이라는 새로운 현실을 수용하면서 임금 억제를 확보하는 수단으로 전환되었다. 자본주의의 제약을 근본적 정치 한계로 오랫동안 받아들여 온 이 정당들은 신자유주의적 긴축과 시장 개혁에 대한 대안을 상상하거나 만들어낼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이러한 분석은 사회민주주의 체제가 덴마크 사회학자 예스타 에스핑안데르센(Gøsta Esping-Andersen)이 말한 노동의 “탈상품화”를 결코 이룰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물론 이 국가들은 의료, 교통, 교육과 같은 일부 사회 서비스를 시장 구매가 아니라 무상 제공함으로써 탈상품화했다. 이러한 개혁은 노동자의 중요한 성취이며, 시장 의존에서 해방되어 사회적 필요 충족을 지향하는 체제가 어떤 모습일지를 비추어 준다. 그러나 가장 광범위한 복지국가조차 노동 그 자체를 탈상품화하지는 못했고, 그럴 수도 없었다.
노동자가 임금 노동을 하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은 사실상 무제한 파업 기금을 부여하는 것과 같다. 실제로 이러한 체제에서 노동력 참여율은 “자유주의적” 모델보다 낮지 않았고, 오히려 더 높았다. 만약 임금 노동의 강제가 실제로 완화되었다면 낮아졌어야 한다. 사회민주주의 체제는 오히려 노동자를 시장 관계 속에 더 깊이 편입시켰다. 가장 강력한 복지국가에서도 사회 전체와 모든 국가 지출은 여전히 경쟁력과 수익성에 의존했다.
세계화와 제국
책의 끝에서 두 번째 장에서 마테이는 자본주의를 세계적 체제로 분석한다. 그는 세계 시장의 지속적 위계를 설명하려 하면서도, 세계 자본주의의 가장 결정적 갈등이 국가 간이 아니라 국가 내부에서 벌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핵심부와 주변부 경제 모두에서 노동자에 대한 착취가 세계 자본주의의 생명선이라고 주장한다.
이 관점은 세계 핵심부 노동계급이 주변부 노동자와 농민을 “착취”한다는 일부 설명이 잘못되었음을 뜻한다. 이러한 주장은 종종 “제국적 생활양식”이라는 개념에 기대며, 글로벌 노스의 독점 기업이 글로벌 사우스 노동자의 초과 착취를 통해 자국 노동자를 더 높은 임금과 소비 수준으로 매수했다는 “노동 귀족” 테제를 활용한다. 이 틀은 역설적으로 핵심부 노동자가 세계화의 주요 피해자가 아니라 수혜자였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실제로 세계화는 경쟁을 약화시킨 것이 아니라 강화했다. 그것은 시장 의존을 확대하고 어디에서나 긴축을 공고화했다.
동시에 마테이는 세계 주변부의 “종속”과 국제 체제 구조를 통한 “저발전의 발전”이라는 관점으로 장을 구성한다. 1960년대에 등장한 이러한 이론은 주변부가 값싼 1차 상품을 수출하고 비싼 부가가치 상품을 수입하는 “불평등 교환”을 통해 핵심부에 체계적으로 가치를 이전당한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착취는 각 사회 내부의 계급 관계보다 국제 무역을 통해 작동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핵심부 노동계급은 변혁의 주체가 되기 어렵고, 오히려 자신의 특권적 위치가 의존하는 제국적 지배를 지지할 가능성이 높다. 폴 바란과 폴 스위지는 ⟪독점 자본⟫에서 혁명적 주체가 있다면 그것은 이른바 제3세계의 민족해방운동에서 등장할 것이며, 이는 미국 내부의 주변화된 집단에게도 유사한 민족적 투쟁을 촉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노동자, 농민, 민족 부르주아 사이의 민족적 계급 동맹을 요구했다.
이 두 관점 사이의 긴장은 마테이의 분석을 다소 불분명하게 만든다. 종속 이론은 1950~60년대 세계 무역 구조를 정확히 묘사했지만, 이후의 역사적 전개는 국가 간 갈등보다 국가 내부의 계급 투쟁이 우선적임을 강하게 시사한다.
1950년대 미국 국가는 이른바 수입대체산업화(ISI)를 지원했다. 이는 보호된 국내 산업이 핵심부 수입을 대체하도록 하는 정책으로, 주변부 경제를 미국 주도 질서에 통합하는 더 넓은 프로젝트의 일부였다. 이후 경제 발전 과정에서 강화된 주변부 부르주아지는 더 깊은 미국 제국 통합을 추구하며 보호 장벽을 제거하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다.
레오 패니치와 샘 긴딘이 주장했듯, 미국 제국은 상당 부분 “초대에 의한 제국”으로 작동했다. 미국 국가는 국경을 넘는 무역과 투자 흐름으로 엮인 통합된 세계 자본주의의 형성을 감독하면서 세계 자본의 일반적 이해를 대변하게 되었고, 고유한 “국가적” 부르주아지의 경계를 약화시켰다.
이러한 재구성은 핵심부와 주변부 모두에서 계급 타협의 토대를 약화시켰다. 전후 브레턴우즈 체제는 자본 이동에 일정한 제약을 가해 미국 제국의 공고화와 세계 통합에 안정적 틀을 제공했다. 그러나 1970년대 위기 이후 자유로운 자본 이동 체제가 도입되면서 자본가는 거의 비용 없이 전 세계로 투자를 이동시킬 수 있게 되었다. 자본이 가장 저렴한 노동력과 규제 비용을 찾아 생산을 이전할 수 있게 되면서, 노동자가 국내 분배 타협을 강제하기는 점점 어려워졌다.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의 국제화를 문제 삼기보다는, 보조금과 노동력 숙련도 향상을 통해 국내 투자를 유치하려는 “진보적 경쟁력” 전략으로 이를 수용했다. 그러나 주변부의 숙련 노동 확대와 저임금 지역에 첨단 기술을 적용하는 과정은 산업 고용을 핵심부에서 주변부로 이동시켰고, 불안정과 불평등을 심화시켰으며, 복지국가 프로그램에 대한 압박을 증대시켰다.
미국 제국 내부에서 세계적 통합이 심화되면서 경쟁 규율은 강화되었고, 통화·재정·산업적 긴축이 공고해졌다. 그 결과는 종속 이론이 예상했던 것과 정반대였다. 핵심부 국가의 가장 특권적인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탈산업화와 임금, 고용 안정, 생활 수준에 대한 하향 압력이 나타났고, 동시에 주변부에서는 산업화가 진행되었다.
체제를 하나로 묶은 금융의 세계적 통합은 국가들을 재정 긴축에 묶어 두었고, 세금 인하와 사회 지출 삭감을 압박했다. 노동자를 위한 프로그램 삭감은 부유층에 대한 대규모 감세와 동시에 이루어졌고, 소득의 상향 재분배를 강화했다. 세계화는 산업적 긴축도 강화했다. 그 결과 노동권과 단체교섭 체제는 심각한 압박을 받았고, 노동자 동원, 임금 인상, 그리고 모든 형태의 산업 민주주의에는 엄격한 제약이 가해졌다. 한편 변동환율 체제는 강력한 중앙은행과 이를 관리하는 기술관료에게 인플레이션 억제와 통화 안정 유지를 위한 지속적 개입을 요구했다. 이는 통화 긴축을 통해 계급 규율을 확보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마테이의 역사적 분석은 대체로 1920년대에 머문다. 따라서 이 책은 사회민주주의, 발전주의, 미국 제국의 상호 연결된 역사를 충분히 다루지 않는다.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평가하는 일은 긴축의 구조적 성격에 대한 그의 주장을 입증하는 데 결정적이다. 왜냐하면 이 체제들은 흔히 긴축의 반대 사례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1970년대 이후 이 체제들의 위기와 후퇴는 미국 제국에 대한 오랜 수용과 자본주의에 도전하려 하지 않은 근본적 태도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이러한 선택은 전후 “영광의 30년” 동안의 성과를 자본 이동 자유화와 함께 사실상 되돌릴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실제로 세계화는 노동계급에게 긴딘이 말한 “선택의 양극화”를 강요했다. 즉 세계화와 단절하고 투자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거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수용하는 것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이는 마테이의 주장과 긴밀히 맞닿아 있지만, 동시대적 맥락에 대한 그의 제한된 논의는 그 관점의 긴박성과 현재적 관련성을 약화시킨다.
사회주의와 계급 형성
마테이의 가장 중요한 핵심 주장은 노동자가 자본을 강화하는 데 이해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긴축, 독점, 금융 투기 등의 “실패”에 초점을 맞추는 관점은 자본주의의 정상적 작동이 낳는 사회적 해악을 가린다. 이러한 시각은 정치를 자본주의 내부의 투쟁으로 한정하고, 노동계급을 이윤과 경쟁력을 높이는 친노동 정책을 수용할지도 모를 “진보적” 자본의 일부와 잠재적 동맹으로 상정한다.
그러나 실제로 노동계급의 불안정성 증가는 자본주의의 붕괴 징후가 아니라 그 힘의 조건이다. 경제 성장은 노동자가 더 높은 임금과 향상된 생활 수준을 쟁취하도록 허용할 수 있지만, 필요의 충족은 언제나 수익성에 종속된다.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가 얼마나 인간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것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에 놓인 가혹한 한계와 긴축·박탈·착취의 구조적 필연성은, 이 체제가 유용한 재화를 생산하는 논리가 아니라 비인간적이고 “유령 같은” 가치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마테이는 자본주의의 붕괴가 아니라 축적의 이러한 모순이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권위주의적 극우의 부상을 낳았다고 주장한다. 수십 년에 걸친 생활 수준 하락 압력과 점점 더 가혹해진 긴축을 통한 복지국가 후퇴는 자본에 매우 기능적이었지만, 극우 정치가 자라날 비옥한 토양을 만들었다.
그러나 집권한 이러한 세력은 긴축을 심화시켰고, 노동자와 빈곤층에 대한 잔혹한 공격을 가했다. 더욱이 자본 질서의 핵심인 계급 권력과 착취는 대체로 보이지 않으며, 긴축을 통한 시장 의존 심화는 노동자 간 경쟁을 강화한다. 이 때문에 MAGA와 같은 운동은 이러한 불만을 자본이 아니라 이주민과 인종화·젠더화된 타자에 대한 분노로 전환할 수 있었다.
마테이는 보편적 소외의 세계를 극복하려면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필요하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이는 경제·사회 생활에 대한 의식적이고 집단적인 통제를 확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경제 이론, 경제 정책, 경제 자체를 민주화하는 상호 연관된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그에게 긴축에 맞선 투쟁은 단지 다른 경제 정책을 도입하는 문제가 아니라 전혀 다른 경제 질서로 나아가는 문제다. 이를 지지하려면 신고전파 경제학이 은폐하는 사실, 즉 착취·실업·긴축이 자연법칙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법칙이라는 점을 중심에 두는 경제 이론이 필요하다.
사회적 제공 프로그램은 필연적으로 이윤의 논리와 충돌하기 때문에, 이를 지속하려면 자본주의와의 단절이 요구된다. 어떤 좌파 정부든 결국 긴축으로 후퇴하거나 전진하는 선택에 직면한다. 그 순간이 오면 노동자는 자본주의와의 단절을 준비한 조직된 힘이어야 한다. 필요의 논리를 우선시한다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한 지속적 확대 투쟁과 자본에 대한 점점 더 급진적인 도전을 뜻한다.
따라서 개혁 투쟁은 자본을 강화하거나 경쟁력을 높이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자본 질서와 결별할 역량을 구축하는 노력으로, 사회주의적 언어로 제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제의 핵심인 계급 형성은 마테이의 분석에서 충분히 다뤄지지 않는다.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강조했듯이, 이는 “프롤레타리아트를 하나의 계급으로, 나아가 정치적 당으로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계급은 추상적이고 “객관적인” 의미에서는 이미 존재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소득 수준, 직업, 교육 배경, 젠더와 인종 조건 등에서 심각하게 분절되어 있다.
계급 형성은 이러한 개인들이 자신을 이윤의 논리에 맞서는 공통 이해를 가진 하나의 계급으로 인식하게 되는 정치적 과정이다. 사회주의 정당의 고유한 역할은 정치 교육, 토론, 집단 행동을 통해 노동자의 민주적 역량을 발전시키는 데 있다. 이 과정에서 정당은 단순히 노동계급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변혁할 수 있는 정치적 힘으로 노동계급을 적극적으로 구성한다.
마테이의 분석에 존재하는 이러한 공백은 사회민주주의 비판의 중요한 차원을 놓치게 만든다.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노동계급과 그 이해를 사회주의적 개념과는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 무엇보다 이들은 사회적 필요를 위한 투쟁이 반드시 자본주의 자체에 맞서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인상을 주면서, 이윤의 논리와 필요의 논리 사이의 적대를 흐린다.
계급 형성에 대한 분석이 부재한 탓에, 마테이는 노동자의 즉각적인 경제적 요구, 예컨대 임금 인상이나 심지어 직장 그만두기와 같은 행동을 명시적으로 사회주의적인 정치와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그는 1979년 연방준비제도가 금리를 거의 20%까지 인상해 대량 실업을 유발하고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 했던 ‘볼커 쇼크’를 노동자의 임금 요구뿐 아니라 태동하던 “반자본주의적 대안”까지 억눌렀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 사건과 그 여파가 실제로 드러낸 것은 임금 투쟁에 요구를 한정하고 작업장 권력을 구축하지 못했던 노동조합 모델의 한계였다. 더 넓은 정치적 전환을 추진하는 것은 더욱 미비했다. 자본이 투자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유지한 상황에서, 이윤과 실질임금 상승이 충돌하자 착취는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더 흥미로운 질문은 왜 반자본주의적 대안이 진지하게 의제에 오르지 못했는가이다. 노동운동과 노동계급 정치에서 무엇이 결여되어 있었기에 신자유주의적 긴축 이외의 경로를 열지 못했는가. 그 시기에 존재하던 것을 더 많이 확보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민주당 표를 더 얻거나, 주변적 분파 정당을 더 만들거나, 노동조합 조직률을 더 높이는 것만으로는 신자유주의적 공세를 막을 수 없었다. 필요한 것은 노동계급에 뿌리를 둔 대중적이고 조직된 사회주의 운동이었다. 그것은 실질적 권력을 갖추고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했다.
이러한 조건이 부재한 상황에서 1970년대 노동자의 방어적 투쟁이 패배하자, 다수는 경쟁력과 수익성의 제약에 적응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보았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규정한 노동계급의 깊은 패배는 자본과 국가의 억압 때문만이 아니라 노동운동 내부의 지속적 한계에서도 비롯되었다. 과거의 투쟁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나은 지점으로 나아가려면 노동조합을 계급투쟁의 기관으로 전환해야 하며, 이는 정당의 조정과 조직을 요구한다.
이는 마테이가 제기했지만 충분히 전개하지 않은 또 다른 핵심 문제로 이어진다. 자본주의가 시장 의존으로 규정된다면, 그것을 벗어나는 길은 경제 계획으로의 전환을 포함해야 한다. 노동자 협동조합이나 지역 공동체가 운영하는 금융기관은 여전히 시장 규율에 종속된다. 그 결과 이들 역시 이윤의 논리를 재생산한다. 즉 임금에 대한 하향 압력, 환경 비용의 외부화, 긴축을 지지할 경쟁적 이해를 낳는다. 이를 극복하려면 사적 기업 간 경쟁을 거시적 차원의 조정으로 대체해야 한다.
마테이가 지적하듯, 이러한 계획은 기업 내부에서 수행되는 계획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기업은 수익률과 가격 신호에 따라 투자를 배분한다. 그러나 사회적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거시적 계획은 훨씬 복잡하다. 이는 단순히 “은행을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금융을 공공 서비스로 운영할 국가 역량을 구축하는 프로젝트를 상상하고 이를 위해 투쟁하는 것을 의미한다. 민간 자본이 시급히 필요한 녹색 전환을 위한 투자를 동원하는 데 실패한 상황에서, 이는 더 이상 정의롭고 평등한 미래를 꿈꾸는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파국을 피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출처] Under Capitalism, Democracy Stops at the Economy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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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메이어(Stephen Maher)는 뉴욕주립대학교 코틀랜드(SUNY Cortland) 경제학 조교수이자 ⟪사회주의 레지스터(Socialist Register)⟫ 공동편집자다. 스콧 어콰노(Scott Aquanno)는 온타리오 공과대학교(Ontario Tech University) 정치학 조교수다. 그는 스티븐 메이어와 함께 ⟪미국 금융의 흥망성쇠: J. P. 모건에서 블랙록까지(The Fall and Rise of American Finance: From J. P. Morgan to BlackRock)⟫를 공저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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