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는 늘 정치적이다. 참사 자체가 사회적 모순을 드러내기에 그렇고, 참사에 대응하는 우리의 방식이 우리가 오늘날 속해있는 체제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렇다. 정치 세력이 이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정책의 큰 줄기가 달라지거나 이후 정국이 크게 요동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가령 서울 시청역 인근 교차로에서 9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사고는 어떤가? 기술적으로 본다면 이 사고는 차량 운전자의 과실을 따지는 문제다. 언론 보도는 크게 두 가지 경우의 수를 제시한다. 첫째는 착오와 운전 미숙, 둘째는 ‘급발진’이라고들 하는 차량의 근본적 결함이다.
첫째 경우라면 먼저 도로의 구조적 문제를 들여다 봐야 한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사고가 난 현장과 인근의 일방통행로는 평소에도 잘못 진입하는 차량이 종종 있다고 한다. 이 길들은 과거엔 양방향통행로였지만 2004년 서울광장 조성 이후 일방통행로로 변경되면서 부자연스러운 구조가 됐다는 것이다. 언론 보도에 등장하는 인근의 상인들은 “일주일에 한두 번은 차량이 역주행했다”고 말한다. 이를 토대로 추론해보면 운전자가 실수로 일방통행로로 진입해 당황한 상태에서 페달을 오인해 사고가 빚어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둘째 경우라면 차량 제조사가 인정하지 않는 ‘급발진 의심’ 사례가 또 하나 추가되는 셈인데, 대개 그렇지만 이번 사고의 경우도 급발진이라는 당사자의 주장만 있고 이를 뒷받침할 명확한 증거는 나오지 않은 상태다. 물론 급발진이 아니라고 볼만한 결정적 증거도 부족하다. 사고기록장치(EDR)에 가속페달 작동 기록이 있다지만 오작동 가능성도 있다. CCTV를 통해 보조브레이크등이 켜지지 않은 상태를 확인했다는 보도도 있으나 역시 급발진 사례가 아니라 운전 미숙일 수 있다는 간접 증거라는 판단도 가능하다.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일부 언론은 벌써부터 고령자 운전 면허 회수 촉진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참사의 정치적 측면은 여기서 분명해지기 시작한다. 서울시의 경우 면허증을 자진 반납하는 70세 이상 노인에게 10만 원 상당의 선불 교통카드를 지급한다. 다른 지자체도 최대 30만 원 가량의 교통카드 또는 상품권 등을 지급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노인 입장에선 면허를 반납하는 대가로 생각하기에는 별 효용이 없는 대가다. 비수도권의 경우는 그나마 대중교통 사정도 여의치 않은 경우가 많아 면허 반납의 유인은 더욱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정공법은 면허를 반납하는 노인들에게 운전을 포기해도 불편함이 없을 정도의 파격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전반적인 대중교통 시스템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런 대안적 조치 없이 참사를 근거로 노인들의 운전 면허 반납의 필요성을 강변하는 것은 이미 발생하고 있는 사회적 비용을 노인에게 떠넘기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유사한 사고 발생을 막는 것에 우선 집중하고 싶다면 운전 미숙이 발생하기 쉬운 도로 환경을 정비하고 ‘급발진’ 의심 사고에 대한 제조사의 책임을 명확히 하는 일 등을 논의하는 게 먼저다. 그런 것도 없이 고령자 운전 면허 반납부터 먼저 말하는 건, 그러한 제도의 정당성과는 별개로, 현상 유지에 도움이 되는 가장 편리한 대안으로 직행하는 것이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최근 화성 아리셀 공장 화재 사건도 참사는 정치적 문제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사례다. 지금까지 확인된 바, 희생자들의 대부분은 이주노동자들이다. ‘위험의 외주화’가 아니라 ‘위험의 이주화’라는 자조섞인 평가가 신문 지상에 등장할 정도다. 또, 언론 보도를 보면 현장은 불법파견이 일상화 돼있는 상태였다. 사내하도급으로 위장한 듯 하고 있으나 별개의 업체가 사고가 난 공장에 주소를 등록해 놓고 노동자를 고용한 것이다. 업무지시 등은 전부 현장에서 원청이 했다고 한다. 파견 허용 업종이 아닌 제조업에서 노동자를 간접고용해 인건비를 줄이고 산재 등의 책임소재를 불명확하게 하려 한 게 아닌가 의심되는 사례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노동권 위협이나 위험의 외주화, 불법파견 등은 이미 오래된 얘기고 이제는 고전적 소재다. 그러나 요 근래에 들어서는 아리셀 공장에서 불이 나기 전까지 사실상 다들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에 가까운 상황이 되었다. 그러던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참사 이후 이러한 문제를 쟁점화할 수 있는 조건은 나름대로 형성된 측면이 있다. 참사의 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이주노동자의 노동권 보장 요구 등을 포함한 정치적 실천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보더라도 참사와 이에 대한 대응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적인 것’과 ‘정파적인 것’이 다르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한국어에서 ‘정치적’이란 말의 뜻은 대개 ‘정파적’이란 말로 치환할 수 있다. 그러나 참사의 경우 이에 가장 잘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은 정파적 이해관계에 휩쓸리지 않으면서도 참사가 갖는 정치적 성격을 명확히 하고 이에 충실한 문제 해결 방안을 내놓는 것이다. 즉, 참사를 둘러싼 정치는 ‘정파적인 것’과는 멀어지면서도 근본적 모순과 맞닿아 있는 고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을 중단없이 기울일 때에야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면, 누군가 참사를 소재로 이와 반대 방향의 맥락에서 정치적 제스처를 취하는 경우, 이를 ‘참사를 이용하는 나쁜 정치’라고 규정하는 것에 큰 무리가 따르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사례의 대표격으로는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에 대해 보수정치가 유권자들에게 보여줬던 모습을 들 수 있다.
출처 : 참여연대
김진표 전 국회의장은 최근 출판한 회고록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2022년 12월 5일 국가조찬기도회 등을 이유로 독대한 자리에서 이태원 참사에 대한 음모론적 세계관을 드러냈다고 주장했다. 이상민 행전안전부 장관 사퇴의 불가피성을 역설하니 “이태원 참사에 관해 지금 강한 의심이 가는 게 있어 아무래도 결정을 못 하겠다”면서 “특정 세력에 의해 유도되고 조작된 사건일 가능성”을 언급하더라는 것이다.
대통령의 이러한 발언은 참사를 오직 정파적 이해득실의 구조로만 바라보고 있음을 드러낸다. 세월호 참사가 그랬듯 이태원 참사도 집권세력에게는 정치적 손해가 되는 사건이다. 그러나 통치를 책임지는 집권 세력의 입장에서 그러한 ‘정파적 판단’은 맨 나중이어야 한다. 참사의 원인이 된 구조적 요인을 파악하고 같은 비극이 일어나는 일을 막기 위한 대안을 제출하는, 즉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책임자 처벌이 제대로 될 수 있도록 하는 게 우선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윤석열 정권은 이 대목에 있어선 의지를 찾아볼 수 없었고 매우 무성의했다.
정권이 대신 힘을 실은 것은 정치적 부담을 덜 수 있는 ‘형사적 원인’을 밝혀내는 것, 즉 비유하자면 ‘범인 찾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여당 소속 의원들이 국회에 나와 특정 세력과 연계된 ‘각시탈을 쓴 사람’이 사고를 유도했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거나 인파 관리에 실패했다는 평가를 피하기 힘든 용산경찰서장이 야당과 유착됐다는 뉘앙스를 풍기거나 한 게 여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범인 찾기’에 필요한 근거를 제공한 것은 극우 유튜브였다. 희생자 유가족들에 의하면 검찰과 경찰이 피해자에 대한 마약 검사를 포함한 부검을 요구한 사례가 파악된 것만 십 수건이 있었는데, 이 역시 특정 유튜브 등에서 참사 원인 중 하나로 마약과 관련한 의혹을 제기한 것과 관련이 있는 거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다.
당시 수사기관은 여러 음모론들에 대해 대부분 조사해보니 근거가 없더라고 국회에 보고했는데, 윤석열 대통령은 이마저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다. 참사 한 달 반이 지나도록 음모론적 관점에 사로잡혀 국회의장과 독대하는 자리에서까지 이 얘기를 꺼내며 행안부 장관을 감쌌으니 말이다. 대통령이 수사기관의 공식 입장보다 극우 유튜브의 의혹 제기를 더 신뢰하는 것처럼 돼버렸으니, 황당한 일이다. 이런 황당한 일이 일어난 것은 단지 대통령의 교양 문제가 아니라, 앞서 언급한 것처럼 참사에 명확한 책임이 있는 ‘범인’이 나왔을 경우 그에게 모든 부담을 떠넘길 수 있다는, 기대와 욕망이 뒤섞여 반영된 결과로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정권이 이렇게 정파적 이해득실에만 신경쓰는 무책임한 행보로 일관한 덕에 위기는 더 심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처리를 요구하는 국민청원에 동의하는 참여자가 100만 명을 돌파한 것이다. 김진표 전 의장의 회고록 논란은 청원에 참여하는 속도를 가파르게 올린 계기라고 한다. 누구는 “인기투표에 불과하다”고 했지만 유권자의 경고라는 점에서 가볍게만 볼 일은 아니다. 이미 경고는 여러번 있었는데 대통령이 변하질 않으니 그 수위가 점점 더 높아져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다른 일도 아니고 ‘참사’에 대한 인식이 그렇다고 하면, 그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도 참사는 최대한 정공법으로 다루지 않으면 안 되는, 민감한 정치적 소재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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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하는 정치·사회 평론가, 칼럼니스트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에서 일하며 한국의 진보정치가 현실적 대안으로 자리 잡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했으나 무엇이 잘못됐는지 기대만큼 잘되지 않았다. 지은 책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 『냉소 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