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2024년8월14일 KBS1 <뉴스광장> 영상 갈무리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가 복권됐다. 이를 둘러싼 여의도 논쟁은 지루했다. 김경수 전 지사가 선거에 출마할 수 있게 되면 당장 비명-친문의 구심점이 될 거고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은 현실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김경수 역할론’은 지난 정권 말기부터 여의도 언저리에서 유력한 시나리오처럼 회자하여 왔다. 이것은 두 가지 조건 때문에 그렇다.
첫째는 이재명 전 대표의 불안한 입지다. 이재명 전 대표는 더불어민주당을 거의 완전하게 장악한 상태지만 대선까지 해결이 불투명한 사법적 리스크를 안고 있다.
이재명 전 대표가 힘을 쓸 수 있을 때라면 김경수 전 지사가 굳이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나서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여의도 호사가들의 전망이다. 그러나 이재명 전 대표의 운명은 사법부에 달렸다고들 하는 상황에서, 대선에 나가지 못하게 될 경우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럴 경우엔 ‘김경수 역할론’이 실체를 가질 수 있다.
김경수 전 지사 입장에선 되든 안 되든 움직일 수밖에 없는 명분이 형성되는 거다.
다만 이런 시나리오가 현실이 될 것인지를 보려면 아직은 여러 불확실성을 고려해야 한다.
둘째는 ‘김경수 역할론’ 자체가 아니라 그걸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각자의 정치적 이해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가령 이번 광복절 특사는 애초 용산에게 있어서는 ‘꽃놀이패’가 될 전망이었다. 실제 윤석열 대통령이 사면에 힘을 실은 이들은 조윤선, 안종범 등 국정농단 사범과 원세훈 전 국정원장 등인데, 누가 봐도 욕을 먹을만한 인사들이다. 그런데 김경수 전 지사를 여기에 끼워 넣으면 야당이 크게 반대하기 어려워진다. 혹여 반대하려고 하면 김경수 전 지사 사면으로 인한 ‘야권 분열’이 두렵냐고 되물으면 그만이다.
특히 김경수 전 지사는 이 정권에서 원세훈 전 원장과 계속 짝을 맞춰왔다. ‘댓글’에는 ‘댓글’이란 식인데, 2022년 말 김경수 전 지사가 사면(잔여 형기 집행 면제) 받을 때 원세훈 전 원장은 잔형 감형 대상이 돼 가석방 출소했다. 그때도 말이 많았는데 이번에도 똑같은 방식으로 형평을 맞추는 시늉을 한 셈이다. 원세훈 전 원장은 주지하다시피 이명박 전 대통령과 각별하다. 마침 윤석열 대통령은 이명박 전 대통령과 지난 12일 부부동반 만찬을 했다. 서로에게 좋은 기억이 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김경수 전 지사 복권에 반대하면서 스텝이 헝클어졌다. ‘꽃놀이패’가 순식간에 복권을 시켜줘도 문제, 안 시켜줘도 문제인 사안으로 바뀐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김경수 전 지사 복권을 그대로 밀어붙였지만, 국민의힘 지지층은 벌집을 쑤신 듯한 상태라고 한다. 원세훈 전 원장과 국정농단 사범들을 사면해 보수 결집을 모색하려던 게 오히려 보수 분열의 소재가 된 거다.
한동훈 대표는 왜 이렇게 나왔을까? 민주주의를 파괴한 범죄를 저지른 김경수 전 지사가 정계 복귀를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건 옳지 않다는 식인데, 이상한 논리다.
첫째, 김경수 전 지사가 정계 복귀를 할지 안 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특정인의 정계 복귀 의사를 사면 복권기준으로 삼는 건 법 제도의 자의적 적용이다. 이 점은 법조인 출신이 더 잘 알 거다. 둘째, ‘민주주의 파괴’에 방점을 찍으려면 원세훈 전 원장과 국정농단 사범들에 대한 사면 복권 역시 반대해야 한다. 즉, 한동훈 대표의 주장이 논리적 윤리적으로 올바른 유일한 경우는 대통령의 사면권 남용 전반에 대한 비판의 맥락에서 제기될 때뿐이다. 그런데 한동훈 대표는 김경수 전 지사 복권에 반대한다면서 동시에 대통령의 사면권은 존중한다는 태도였다. 이러면 논리가 궁해진다.
정치인이 궁한 주장을 하면 그 배경과 의도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동훈 대표의 김경수 전 지사 복권 반대는 무엇을 노린 것일까? 첫째, 보수층 여론의 반영이다. 보수 유권자층은 김경수 전 지사 복권에 대체로 부정적이다. 이를 대변하겠다는 거다. 더불어민주당 사람들이 ‘강성 지지층’의 여론을 따라가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둘째,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차별화 전략이다. 한동훈 대표는 차기 대권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현직 대통령과 차별화해야 한다는 거다.
그런데 차별화도 차별화 나름이다. 그간 ‘윤-한 갈등’의 초점이었던 ‘제삼자 추천 특검’이나 김건희 여사 문제는 보수 유권자층이 수용할 수 없는 문제이거나, 수용할 수 있는 의제더라도 ‘배신자’로 각인될 위험성이 있는 종류의 것이다. 보수정치에서 ‘배신자’가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유승민 전 의원이 이미 보여준 바 있다.
그러나 김경수 전 지사 복권 문제는 보수 유권자층의 눈으로 보면 한동훈 대표가 아니라 윤석열 대통령이 ‘배신자’가 아닌지 의심하게 되는 사안이다. 이전에 ‘박영선 총리-양정철 비서실장’ 사건도 있지 않았던가? 혹시 윤석열은 좌파인가? 등등.
이 전선에서 한동훈 대표는 윤석열 대통령이 아니라 보수층의 편에 서는 포지션을 선택한 셈이다. 차별화하기는 하는데, 안전한 방식으로 하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앞서도 잠시 지적했듯 문제는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가 충분히 보수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의적인 방식으로 남용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왕년에 ‘진보’를 자칭하던 인사들도 이런 본질적 부분엔 관심이 없고 윤석열 대통령이 이재명 전 대표와 한동훈 대표를 동시에 견제하기 위해 벌인 일이라는 식의 정치적 무협(?) 서사에만 관심을 보인다. 제도의 취지 및 본질은 몰각되고 ‘민주당도 하지 않았느냐’는 식의 남 탓과 ‘법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는 우격다짐만 남기는 게 이 정권의 특징이다.
인사를 보면 이런 특징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을 대통령 국가안보실장으로 임명하고, 김용현 대통령 경호처장을 신임 국방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한 것은 도대체 이 정권이 무슨 기준으로 인사를 하고 있는지 의문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신원식 국가안보실장은 최근 정보사령부를 둘러싼 일련의 사태에 책임이 있는 인사이다. 정보사는 최근 휴민트 정보가 유실된 사건에 더해 지휘부끼리 고소전을 벌이는 사태에 직면해있다. 그런데 정보사 비밀사무실을 임대해 지휘부 간 갈등의 소재가 된 민간연구소의 경우 신원식 실장의 육사 동기가 이사장으로 있다.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그런데 책임지고 관가를 떠나야 할 인사를 오히려 용산으로 불러들였다. 이를 위해 외교안보특보 자리를 새로 만들어 장호진 전 국가안보실장을 예우해야 했다.
김용현 국방부 장관 후보자는 익히 알려진 것처럼, 대통령실 용산 이전부터 ‘입틀막’ 경호, 해병대원 순직 사건에 이르기까지 이름이 거론되지 않는 데가 없을 정도다. 이런 인사를 교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국방부 장관으로 보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유가 뭐든 대통령이 군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인상을 줄 수밖에 없다. 군을 신뢰하지 못하니 대통령의 고교 선배로 ‘실세’라는 것 말고는 약점밖에 없는 인사를 국방부 장관으로 보내 ‘그립’을 강화하려는 것 아닌가?
언론은 미 대선을 앞둔 상태에서 안보라인이 외교안보 정책의 키를 잡게 된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단순한 구도 같지만 들여다보면 좀 더 복잡한 속내가 드러난다. 정권 실세 중 하나라 불리는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 때문이다. 직전까지 국가안보실장이던 장호진 특보는 외교부 출신이다. 주러 대사 출신인 장호진 실장 체제에서 김태효 1차장은 뜻을 100% 펼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신원식 신임 국가안보실장은 군 전문가이긴 하지만 외교 전문가는 못 된다. 신원식 실장 체제에서 김태효 1차장은 ‘100%’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태효 1차장은 한미일 협력 구도를 상식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이상의 수준으로 강화하는 걸 지론으로 삼고 있는 걸로 알려져 있다. 북한과 러시아가 군사동맹 수준의 합의에 이른 것에 국가안보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은 김태효 1차장으로선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실제 장호진 특보를 비롯한 외교라인은 이번 인사를 직전까지 몰랐다고 한다.
이제 윤석열 대통령이 앞으로 하려는 게 뭔지가 대략 눈에 보인다. 총선에서의 기록적 패배로 국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대한민국 대통령제에서 대통령은 여전히 권한을 쥐고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일단 이미 휘어잡고 있는 군을 더욱더 휘어잡는다. 그게 북한과의 극단적 대치를 가정한 것인지 아니면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 대하여 군심의 동요를 막기 위한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어쨌든 그렇다. 신원식-김태효 체제를 통해 한미일 협력 구도를 더욱더 강화하며 대북 강경책을 밀어붙인다. 국내정치적으론 보수 결집에 나서면서 이러한 정책 방향의 동력을 확보한다.
이러한 구상은 제대로 작동할까? 이런 식으로 한다면, 그렇게 될 리 없다. 뉴라이트 인사들의 기용으로 보수 결집부터 제대로 안 되는 걸 보라. 김용현 국방부 장관 후보자와 신원식 국가안보실장 인사에 대해선 보수언론도 일제히 비판한다. 한동훈 대표의 얄팍한 계산 때문인지 아니면 ‘강성 지지층’ 때문인지 하여간 여당도 맞장구를 쳐주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앞서 인사로 재구성해 본 정책적 ‘구상’이 존재하는 게 맞긴 하는지에 대해 모두가 의심부터 한다는 거다. 단지 누군가가 대통령의 눈 밖에 난 것 뿐인 게 아닌가? 그마저도, ‘대통령’의 눈 밖에 난 게 맞긴 한가? 다른 사람 눈 밖에 난 게 아닌가? 이상한 얘기만 횡행한다. 통치를 저질로 하니 평론도 저질로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런 이상(異常)적 리더십의 끝은 무엇일까? 대안이 아닌 것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정상’을 자처하며 ‘대안’으로서 또다시 등장하는, 익숙한 광경을 다시 목도하는 것이다. 앞서 한동훈 대표의 행보를 통해 보았듯, 차기 대권을 노리는 사람들은 모두 이 연극의 주인공이 되기 위한 경쟁에 이미 돌입한 상태다. 확실히 윤석열 정권이 권력을 자의적으로 휘두르며 법적으로 그래도 된다고 우기는 모습은 ‘비상사태’의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이미 이전에 이런 내용의 연극을 몇 차례나 되풀이해서 봤다. 아마 결과는 뻔할 것이다. 이게 지겹다면, 다른 주인공을 찾기보다는 무대 자체를 부숴버려야 한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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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하는 정치·사회 평론가, 칼럼니스트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에서 일하며 한국의 진보정치가 현실적 대안으로 자리 잡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했으나 무엇이 잘못됐는지 기대만큼 잘되지 않았다. 지은 책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 『냉소 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