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빴다. 아침에 움직이자 마자 바로 움직여야 했다. 함양까지 열두 시 전까지 닿기로 한 약속. 유랑 꽃마차와 봉고차를 타고 함양으로 떠났다. 타자마자 잠이 들었던가? 아니다. 봉고차 뒷자리에 앉아 단편 소설 한 편을 읽었다. 정지아 씨 소설 <행복>. 빨치산이었던 부모님과 함께 여행을 다니는 이야기. 빨치산에 대한, 역사와 신념 그 안에서 개인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결코 해묵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다 읽고 난 뒤 선택과 신념, 굴레, 자유, 복종, 행복… 같은 말들이 되뇌어지는 글이었다. 내가 내린 결론, 문제는 '순정'이다. 그 확신이 만약 교조와 같은 거였더라면 '살아남은 자의 참혹'이라고까지 표현한 그 늙은 빨치산 부부의 삶은 그야말로 참혹하기만 했을 거다. 순정은 머리와 몸과 마음이 함께 가는 것이다. 머리로 생각한 것 그대로 마음이 움직이는 거며, 그것이 깨어있지 않을 때조차 몸에 배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교조라면 생각과 생활과 자연스런 욕망이 서로 일으키는 배반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순정한가? 그러고 나서 잠이 들었나 보다. 잠을 깼을 때가 어느 휴게소였고, 다시 차가 떠나고 곧 잠이 들었다.
차 오르는 희망과 답답한 공허함
본격 순례길이 시작하면서 지금 이게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떠나지 않는다. 그건 실은 울진에 있을 때부터였다. 처음 공연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할 때에는 만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저 마음이 가득 차 올랐다. 순간마다 함께 나누는 교감에서 희망을 찾았고, 무언가 살아 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차츰 비슷한 공연, 비슷한 만남이 계속되면서 '만난다는 것'만으로 다 족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냥 '만나기'만 하는 건 아니다. 파병철회와 철군, 이라크 평화를 이야기한다. 노래한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구체적인 다음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아니, 전혀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러한 공허함이 들 때와 차 오르는 마음이 들 때는 차이가 있던 것 같다. 먼저 이 길 위에서 기쁘고, 힘나고, 희망을 느끼던 때는 우리가 말하는 정말 보통 사람들을 만날 때였다. 시장에서 아주머니, 할매 들을 만났을 때.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날 때, 거리에서 지나다니는 시민들을 만났을 때. 그 때에는 기운이 모자라는 한이 있어도 일부러 한 걸음이라도 더 다가가서 말을 건네었다. 우리 군인들 돌아와야 한다고, 이라크에서는 지금도 사람들을 떼로 죽이고 있다고, 어서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그럴 때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 눈을 맞추는 건 희망이었고, 커다란 힘이었다. 그런데 반해서 내가 고민에 들게 되고, 힘이 빠지게 되는 때는 그런 분들이 아니라 뭐랄까 이른바 운동을 하고 있는 분들을 만나는 자리에서였다. 그런 분들 앞에서는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싶었다. 무엇을 어떻게 하자고 해야 할지 답답했다. 전쟁에 반대하는 마음, 파병한 군대를 돌아오게 해야 한다는 생각 그것이야 더 말하지 않아도 같다. 그러면 그 위에 무엇을 더 말해야 할까? 게다가 점차 파병철회 문제는 운동 사회 안에서 우선으로 삼는 이슈에서 뒷자리에 놓여지고 있다. 이야기를 하다보면 서로 답답할 뿐이다.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것, 하루라도 속히 철군을 해야 한다는 것, 이 당위에는 누구도 동의하지 않는 것 아니지만 역시나 '몹시 안타깝기는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전쟁반대, 파병반대, 이라크 평화. 이러한 가치야 이미 당위로 여기고 있는 이들과 만났을 때는 누구나 동의하는 그 가치를 말하는 것은 오히려 더 힘을 빠지게 한다. 그래서? 그래서 지금, 무얼, 어떻게 하자는 건데? 우리가 답해야 할 것 또는 토론해야 할 것은 그래서,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철군과 반전, 평화라는 가치를 대세로 만들어 가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동시에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이루어 내기 위해 구체적인 행동에 대해 제안하고 움직이게끔 하는 일이다. 앞서 말한 것, 그것은 순례 뿐 아니라 그 전부터 울진 군청 앞 군민들을 만나면서도 계속 해오던 일이었다. 장에 나왔다 들어가는 할매, 아지매 그리고 교복을 입고 집에 가는 학생들, 무언가 관심 가지고 들여다보시던 버스 아저씨, 택시 아저씨. 순례를 다니면서도 아이들을 만나거나 하루하루 일상이 더 바쁜 보통 사람들을 만날 때는 기운 내어 철군과 반전을, 평화를 이야기했다. 종이학 접기를 하면서, 또는 평화사탕이라고 이름 붙인 사탕을 나누어드리면서 전쟁반대 이야기를 한 마디라도 더 가까이 나누어보고 싶어했다. 그건 언제나 희망을 찾는 일이었고, 힘이 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런 가치 위에서 함께 철군으로 가는 구체적인 행동을 이야기해야 하는, 토론해야 하는 자리에서는 늘 답답했다. 파병을 막아야 합니다, 막아야 합니다, 동의안을 막아야 합니다, 막아야 합니다 하고 말하는 것은 그것만으로는 얼마나 공허할 뿐인가?
"기소인단이 되어주십시오!"
울진에서 마지막 밤 순례단원들이 모여 이 순례에 대한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도 그런 생각을 했다. 한 사흘을 지나고 나면서 나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질문. 단식을 왜 하는가? 그것도 순례라는 것을 하면서 왜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가? 단식, 그것만으로 보면 (여전히 단식이라는 방법에 대해서는 흔쾌히 동의하지 않는 분들은 많지만) 그것은 한 개인의 결단, 어떤 양심의 실천 같은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순례라는 것, 사람들을 만나고 다닌다고 하는 것에서는 단지 개인의 결단, 양심의 실천이라는 부분만으로는 아주 모자라다. 그건 어떻게 보면 기껏해야 '나는 전쟁에 반대해서 이렇게 오래 굶고 있습니다, 전쟁에 반대합니다' 하는 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들의 관심 또한 단식자에게 쏠리고, 단식자의 몸 상태라거나 개인 경험들에 더 눈길을 두는 것 같기도 하다. 적어도 이렇게 긴 단식을 하는 몸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다닌다고 한다면 그 절실한 목소리로 무언가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건 함께 반전, 철군 운동을 하는 이들에게는 <구체적인 제안>이 되어야 하며, 파병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정권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요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순례단이 가진 구체적인 제안, 구체적인 요구란 과연 무엇인가? 있기라도 한가? 솔직히 말해 나 개인으로서는 아직 뚜렷한 것이 없다. 물론 한국군의 철군이라는 뚜렷한 바람이 있기는 하지만 나나 수사님이나 우리가 하는 단식으로 이 정권이 철군을 해줄 수도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김선일 씨가 목 앞에 칼을 두고서 절규했어도 눈 하나 꿈쩍 않는 게 이 정권이었고, 지율 스님은 '환경영향평가'를 다시 하자는 최소한의 요구를 가지고 단식 58일을 했어도 꿈쩍 않는 게 이 정권이었으니 말이다. 환경영향평가를 하자는 요구에도 그렇게 외면하는데 철군이라니. 이 단식 순례가 지금 시기에 철군 운동에서 힘을 가질 수 있으려면 당장 정권에 대한 어떤 '요구'에 중심을 두는 것보다는 순례단이 만나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제안'을 하는 것에 그 중심을 두어야 하는 까닭도 그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구제적인 제안이라는 것도 없었다. 그저 파병을 왜 해서는 안 되는가 하는 이야기에 파병을 하고 난 뒤의 슬픔을 내 보이는 것에만 그치고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두 단식자는 우리에게 무얼 어떻게 하자고 말을 하는 것인가요?' 누가 직접 내게 이렇게 물은 건 아니었지만 사람들의 눈을 보면서 오히려 내 안에서 이런 질문들이 나오곤 했다. '나는 단식을 하고 있습니다, 어서 철군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말고, 우리 이렇게 합시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이 필요하지 않나? 뭐 거창하고 대단한 제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무슨 서명운동을 하니 그것에 동참해 달라는, 이라크인들을 위한 성금 모금에 함께 해 달라는, 촛불시위가 있으면 그 자리를 같이 만들어가자는, 그런 계획과 제안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나는 32일째 단식을 합니다, 어서 철군을 해야 합니다' 하는 말만으로는 너무 공허하다. 그건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답답할 뿐이다.
그러한 제안, 계획이 처음부터 없지는 않았다. 처음 이 순례단을 준비할 때 함께 하는 이들은 두 단식자와 평화바람, 그리고 전범 민중재판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평화바람이야 워낙 지난 겨울부터 온 나라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평화의 메시지로 공연을 하고 다니는 팀이었고, 전범 민중재판 운동을 준비하는 이들도 이 운동을 풀뿌리에서부터 탄탄히 세워내기 위해 곳곳의 고장이나 모임을 직접 발로 뛰어 찾아다니려 한다고 알고 있었다. 여기에 단식자들이 붙박고 앉아 하는 단식이 아니라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겠다고 생각을 했으니 다들 돌아다니는 사람들이라면 함께 모여 같이 돌아다니자 해서 '단식평화순례단'이라는 이름으로 묶은 것이었다. 여기에서 나는 전범 민중재판 운동에 아주 관심이 많았고, 전국으로 다니는 이 단식순례가 전범 민중재판 운동의 전도사가 되어 9월 중순 이후로 시작하는 이 운동에 밑불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워낙 이 순례단이라는 게 거의 아무런 준비가 없다시피 한 속에서 시작한 거였기 때문에 순례단 안에서도 서로간의 상이 조금씩 달랐고, 상이 같다고 해도 하루하루 공연과 간담회를 해가기에도 벅찬 사정이었다. 여기에 전범 민중재판 운동을 준비하는 단위 또한 서울에서 실무 준비에 힘을 쏟느라 순례의 많은 일정에는 함께 하지 못하고 있다.
나름으로 혼자 이런 평가와 반성을 하면서 앞으로는 어떤 자리에서 이야기를 하는 순서가 오면 전쟁의 참상이나 한국군 철군의 당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전범 민중재판 운동에 대해 소개하는 데에 더 힘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전쟁을 반대합니다가 아니라 전쟁을 막기 위해서 이렇게 합시다를, 그냥 철군을 해야 합니다가 아니라 철군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하자고 하는 말을 말이다. 사람들과 만나 간담회를 하거나 아니면 조그만 거리공연들을 할 때라도 한 번쯤 읽어볼 유인물이나 얇은 자료집 같은 거라도 있으면 더욱 좋겠지만,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 직접 책상 하나를 내놓고 그 자리에서 기소인단을 모집하면서 이야기한다면 훨씬 더 전달이 강하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하나도 마련되어 있지 못하다. 전범 민중재판 운동에 관심을 많이 두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임시게시판에 오른 정도 내용으로 알뿐이다. 며칠 전 두 번째 초동 모임을 가지면서 기조나 목표, 그리고 커다란 수준의 틀거리를 마련하는 회의를 가진 모양이었다. 당장 이 순례 동안부터 힘있게 민중재판 운동을 알렸으면 좋겠지만 그리 급하게 생각할 건 아니다. 일단 남은 순례 기간 혹시 말을 해도 좋을 자리가 있다면 한 마디라도 보태야겠다는 생각이다. 전범 민중재판 운동의 핵심 슬로인 <전쟁은 끝난다, 우리가 원한다면!>을 그대로 따서 "전쟁은 끝납니다, 우리가 원한다면. 9월 중순부터 우리를 전범국가의 국민으로 만든 범죄자 노무현 대통령을 민중법정에 세우기 위한 기소인단을 모을 예정입니다. 전쟁을 끝내고자 한다면 기소인단이 되어주십시오! 전쟁은 끝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한다면" 하고 말을 하며 말이다.
"전쟁은 끝난다, 우리가 원한다면!" 전범 민중재판 운동의 임시 소통 게시판 |
녹색 꿈을 꾸며 사는 사람들
함양으로 들어와 우리가 차에서 내린 곳은 조그만 폐교를 고쳐서 만든 녹색대학 운동장이었다. 매체로만 보고 들었지만 참 아름다운 사람들이 꾸리는, 그리고 용기 있는 사람들이 모여 공부하는 곳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와 보니 좋다. 이곳 비슷하게 지난 7월 풀무학교에 갔다가 들러서 둘러본 풀무학교 전공부가 생각났다. 이 녹색학교도 그곳과 비슷하게 삶을 바꾸고자 하는 이들이 용기 있게 소비에 기대고, 개발에 기댄, 자본에 기댄 삶을 바꾸고자 자연의 삶을 공부하는 곳이라 알고 있다. 삶을 바꾸기에는, 가진 것을 버리기에는 너무 늦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나이가 많은 분들도 선택하는 그것. 이곳에서 꾸는 녹색 꿈은 바로 생명에 대한 꿈일 것이고 그것은 평화와 닿아 있을 것이다. 푸른빛과 자연, 목숨, 평화.
온돌방이라고 이름 붙은 교실에서 이곳 학생들과 모여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목숨을 가꾸고 목숨을 살리는 공부를 하는 이들 앞에서 전쟁을 막아야 하는 까닭 같은 거야 따로 말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했다. 말하지 않아도 같은 마음, 같은 뜻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현실 움직임으로 만들어 내고, 실제로 전쟁을 막아낼 수 있을까 하는 대목에 가서는 여전히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되어야 했다. 이곳에서 공부하는 분들, 이 배움의 공동체에서 살고 있는 분들은 이미 많은 것을 거부하고, 복종을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문명과 개발과 자본의 논리.
몇 해 전부터 나는 생태적 삶을 찾아 사는 분들을 알게 되고, 그 분들의 삶을 보면서 그 삶에서 많은 걸 배우고 느꼈다. 그래서 한 동안은 '집회판'으로 빗대어 말할 수 있는 그러한 운동에 대해서 대단히 회의를 하면서 저마다 각자가 대안적 삶, 체제와 문명을 거부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만이 세상을 실제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도 시골로 살림을 옮기면서 그런 삶을 배워 살고 싶다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삶을 바꾸어내는 것이 핵심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이 지금 시대에 당장 일어나고 있는 폭력과 억압에 대해 침묵하면서 자신의 삶만 대안적이고 불복종하는 삶을 사는 것만으로는 그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을 지나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의 삶에서 대안을 만들어 가는 동시에 이 시대의 문제 앞 정확히 조응하는 것, 세상을 바꾸어 가는 건 그 둘을 함께 할 때에만 가능할 거라고 말이다. 이오덕 선생님이나 권정생 선생님, 스코트 니어링이 우리 시대의 큰 어른일 수 있는 까닭은 문명을 거부하는, 자본주의 질서를 복종하지 않는 삶을 살지만 동시에 지금 시대의 문제, 역사의 문제, 사회의 문제 앞에서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그것을 아파했고 싸웠기 때문이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더 반문명, 반자본의 생태적 삶을 사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지만 도시를 떠나는 것이 결코 이 시대의 모순이나 아픔마저도 떠나는 것으로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오늘은 이곳 녹색대학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사는 이주미 선생님 댁에서 묵는다. 선생님은 녹색대학을 처음 열 때부터 이곳에서 일을 해 온 분인데, 지난 겨울 대학로에서 16대 국회 파병 동의안 통과를 반대하며 단식을 할 때에도 일부러 함양에서부터 다녀가곤 했던 분이다. 오늘은 찾아오는 줄을 모르고 있다가 깜짝 놀라더니 긴 날 동안 단식 중이라는 말에 눈물을 많이 흘리기도 했다. 풀벌레 소리가 좋고, 밤 공기 내음이 참 좋다. 내일은 칸쿤에서 돌아가신 이경해 열사의 1주기가 되는 날로 온 나라 곳곳에서 쌀개방 반대 농민대회가 있다고 했다. 내일은 이곳 함양 읍내에서 농민 분들과 함께 쌀개방 반대를, 침략전쟁 반대를 말한다. 울진에서도 쭉 평화모임을 함께 해온 태규 아저씨와 영숙 어머니가 쌀개방 반대를 외치겠지? 어제 오늘 동안 무겁던 마음이 이제 많이 가벼워졌다. 힘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