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복직은 교섭이 아니라 김주익 열사의 죽음으로 따낸 것”

13년 해고자 생활 보낸 박성호 열사정신계승사업회장 인터뷰

같이 입사해 같이 민주노조 운동을 시작한 친구이자 동지

같은 직업교육을 받고 같은 날 같은 사업장에 입사하던 갓 스물에 만난 두 친구가 있다. 쥐똥이 섞인 540원짜리 도시락은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어서 800원짜리로 바꿔 달라며, 앞장서 걷던 동료가 크레인 낙하물에 압사하는 광경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어서, 통근 버스에서 관리자는 앉아가고 생산직은 서서 가야 하는 더러운 꼴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회사 앞잡이 노릇하는 어용노조 끝장 내려고 둘은 나란히 노조 활동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존경하고 따르던 노조 선배였던 믿음직한 위원장이 수감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그 시신마저 병원 영안실 벽을 부수고 침입한 경찰들에게 탈취 당하고 말았다. 한 친구는 노조 교선부장을 맡고 있었고 한 친구는 문체부장을 맡고 있었다. 결국 교선부장은 구속과 해고의 길을 걸었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문체부장은 회사에 남을 수 있었다. 교선부장이 기약없는 해고자 신분으로 박창수 열사 추모사업회, 전해투, 민주노총 부산본부를 거쳐 국가기관인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민주노총 파견자의 신분으로 선배 박창수 위원장을 비롯한 여러 의문의 죽음 뒤의 검은 손들을 파헤치는 동안, 문체부장은 친구에 대한 미안함을 간직한 채 현장 활동가의 길을 걸었다.

김주익 열사가 129일의 고공농성 후 목숨을 끊은 85호 크레인(참세상 자료사진)

번갈아가며 짊어지게 된 살아남은 자의 슬픔

살아남의 자의 슬픔이 너무 큰 탓이었을까? 남은 하나는 박창수 열사가 맡았던 바로 그 자리를 책임지게 됐다. 회사의 일방적 구조조정, 손배가압류, 노조 탄압에 맞서던 새 위원장은 35미터 높이의 85호 크레인에서 홀로 129일 동안 버텼다. 작열하는 태양 속에서도, 거대한 크레인을 다섯바퀴나 돌려버린 태풍 매미에도 홀로 크레인을 지키던 새 위원장은 마침내 자기 몸을 노동조합의 깃발로 크레인에 매달았다. 그 몸이 매달린 85호 크레인은 그대로 일하는 사람의 십자가가 되었다. 깃발로 매달렸던 몸뚱아리는 한 달 만에야 박창수 선배가 먼저 잠든 솥발산 묘역에서 쉴 수 있었다.

그 십자가로 인해 해고자 신분이었던 친구는 13년 만에 복직을 했다. 그토록 다시 걸치고 싶었던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마침내 다시 입은 것이다. 이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오롯이 그의 몫으로만 남았다.

태어난 지 스무 해 만에 만나 그보다 더 긴 스물 한 해 동안을 동지이자 친구로 지낸 김주익 열사를 일년 전 떠나보낸 박성호 한진중공업 열사정신계승사업회 회장을 만났다.

십삼 년 만에 먹는 기름밥이 힘들어 죽겠다며 후배들이 왕따 시킨다고 엄살을 떠는 박성호 열사정신계승사업회 회장과 한진중공업노조의 어제와 오늘, 김주익 열사, 추모사업 진행 상황 그리고 오늘의 노동 현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전해투 활동가 였던 박성호 회장은 비정규직 투쟁을 특히 강조했다. 박성호 회장은 “정규직들이 정신 못 차리면 비정규직 철폐 투쟁이 아니라 정규직 투쟁에 나서야 할 판” 이라며 “다 비정규직이 되버리면 최소한 우리끼리는 안 싸우지 않겠냐”며 정규직 조합원들의 맹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 인터뷰는 ‘김주익, 곽재규 열사 1주기 추모제’ 가 개최되기 하루 전인 10월 14일 오후 부산 영도에 위치한 한진중공업노조 사무실에서 진행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개인 이력이 바로 노동운동 역사인 십삼 년 해고자

박성호 한진중공업 열사정신계승사업회 회장
박창수 열사 투쟁 당시 해고 됐다가 작년 김주익 열사로 인해 복직됐다고 들었다. 이력을 간략하게 소개해달라

박>간략한 이력이 아니다(웃음) 82년 8월에 김지회장(김주익 열사: 박성호 열사정신계승사업회 회장은 인터뷰 내내 김지회장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과 같이 입사했다. 박창수 열사가 사망한 91년 싸움 때 해고됐고 김지회장도 열사가 되버린 지난 해 12월에 복직했다.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나? 청춘에 해고되서 중년에 복직한 것 아닌가

박>맞다. 서른에 해고된 후 마흔둘에 복직했다. 지금 내가 해고되던 또래의 조합 간부들을 보면서 ‘내가 저렇게 어렸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해고 기간이 십삼 년이었는데 어떤 활동을 하며 지냈나

박>해고 직후 수배 생활을 하면서 박창수 열사 추모사업회 발기인 조직화에 전념했다. 당시 전국 단위에서 천여 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추모사업회가 발족한 후 구속됐고 출감해서 추모사업회 활동을 했다.

93년에는 해고자 신분으로 노조활동을 했고 김지회장은 당시에 부위원장이었다. 94년 조선노협 발족간사를 맡았다가 또 구속됐다. 출감 후 95년에는 전해투 활동을 하며 조수원열사 투쟁에 참가했다. 96년 민주노총 발족과 더불어 민주노총 부산본부에서 문체부장, 쟁의국장 등을 맡으며 쭉 활동했다. 2000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하면서 박창수 열사, 조수원 열사 투쟁 경력 때문에 민주노총에서 진상규명위로 파견됐다. 1기 조사관을 마치고 03년 2기 출범과 함께 다시 조사관직을 수행하다가 김지회장 소식을 듣고 사표 내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12월 복직해서 지금은 기관부 기장 파트에서 일하고 있다. 메인 엔진을 조립하는 일이다.

박성호 회장의 이력이 바로 지난 십여 년 우리 운동의 역사란 생각이 든다. 십삼 년 만에 현장으로 돌아왔는데 힘들진 않나

박>재미도 있지만 물론 힘들다. 젊은 후배들은 일 못 한다고 구박하기도하고 선배들은 또 너무 열심히 하는 척한다고 구박한다. 조합에선 기름 냄새 난다고 사무실에 오지 마라 하고 한마디로 왕따 신세다(웃음)

지난 십여 년 동안 운동을 하긴 했지만 현장 감각이 떨어졌다는 느낌도 드는데다가 먼저 몸에 조합원 정서와 노동을 익혀야 겠다는 생각이다. 지금은 일만 한다.


‘그 때 부산에 내려왔으면 혹시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

열사정신계승사업회 회장을 맡은 걸로 봐 김주익 열사와 관계가 남달랐을 것 같다

박>나이는 한 살 차이고 한 날 한 시에 입사했다. 박창수 위원장 때 내가 교선부장이었고 김지회장은 문체부장이었다. 박위원장(박창수 열사) 사건이 났을 때 나는 구속되고 김지회장은 구속은 피했다. 우리는 그 때부터 박위원장에 업을 지기 시작했다. 그 이후 잠깐 노조 활동을 같이 했고 나는 쭉 밖에서 활동했고 김지회장은 현장활동을 했다. 활동 공간은 달랐지만 오히려 그래서 고민도 털어놓고 조언을 해줄 수 있었다.

김주익 열사가 지회장을 맡은 후의 상황은

박>나는 의문사 진상규명위로 파견 나간 상황이었다. 박창수 열사부터 조수원 열사까지 열사 사업에는 내가 베테랑이라 조직적 결정으로 파견 나간 것인데 이렇게 김지회장 일도 맡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김지회장이 크레인에 올라가기 전에는 큰 문제는 없었다. 물론 한진자본과 싸움이야 있었지만 하루 이틀 싸운 것도 아니지 않나? 그런데 당시 현장 상황이 너무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돌파하냐를 두고 김지회장과 이야기를 쭉 했었다. 나는 ‘뭐를 하던 혼자 할 생각은 말고 핵심역량으로 전술적 투쟁을 하라’고 충고했었다. 그런데 올라가기 한 일주일 전부터 ‘크레인에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 그래서 혼자는 절대 안 되고 다섯이라도 꾸려서 올라가라고 했는데 결국...

올라간 이후는 만날 길도 없는데다가 ‘너라도 설득해보라’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전화는 종종 했다. 그런데 전화 통화를 하고 나면 내가 거꾸로 설득당해서 ‘그래 니가 알아서 해라’는 말로 통화를 마치곤 했다.

일이 그렇게 되리란 느낌은 있었나

박>그런데 올라가면 사람이 좀 단순해지긴 한다. 게다가 김지회장은 항복이냐 아니냐는 양자택일을 강요당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지난 추석 즈음이 의문사 진상규명위 2기가 출범할 시기였다. 나는 2기 조사관 직은 맡지 않으려고 결심을 했는데 여러 이야기가 많았다. 그래서 그때는 거꾸로 내가 김지회장한테 전화를 걸어서 상의를 했다. 김지회장은 ‘기왕 시작한 거 마무리까지 짓고 내려오라’고 했다. 그 때 그냥 부산에 왔으면 혹시 막을 수도 있었는데 하는 후회를 하곤 한다.

추모사업, 열사정신 계승 사업회는 어떻게 꾸려지나

박>박창수 열사 때부터 13년간 추모사업 일을 해오고 있다. 보통 열사 싸움은 현안 싸움이라 잘 진행이 되는데 추모사업으로 전환되면 사람들도 지치고 사업도 지지부진해져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노동조합의 공식기구로 만들어진 ‘열사정신계승사업회’

그러면 한진중 열사정신계승사업회의 형태는 좀 특별한가

박>열사투쟁대책위가 해산되기 전에 제안서를 제출했다. 우리는 노동조합의 기구다. 노조가 있는 한 영속성이 있고 조합원 전체가 회원이다. 대의원대회의 추인을 받는 자체 운영위원회를 통해 사업을 진행하게 된다. 조합 기구이긴 하고 대의원대회의 추인을 받아야 하지만 사업들은 어느 정도 독립적으로 진행된다.

재정은 어떻게 마련됐나

박>제안서 내용에 기금 조성, 유족 사업, 유족 자녀 학자금 지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합원 분담금으로 2억을 종잣돈으로 마련했고 매월 조합비의 0.1 %를 적립하고 있다. 조합원들 모두 김지회장에 대한 빚이라고 생각해 선뜻 동의했다.

추모사업회가 노조의 공식 기구인 경우는 처음 봤다

박>첫 사업으로 박창수 열사 13주기를 치러냈다. 처음이라 개념 정리가 안되 노조랑 일이 겹치기도 하고 티격태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행착오를 줄여나갔다. 두달 전부터 김지회장 1주기 사업을 준비했는데 이번엔 썩 괜찮은 것 같다.

추모비 건립을 두고 사측과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두산중공업의 경우 배달호 열사 추모비 건립에 대해 사측이 완강하게 나오는 걸로 알려졌다.

박>1주기 때 결정 못하면 힘들다. 지금이야 한진자본이 좀 찌그러져 있지만 항상 그런 것도 아니고... 김진숙 지도위원이 먼저 제안했는데 처음엔 좀 버겁기도 했다. 실패하면 노조가 타격을 입을 수도 있는데다가...그래서 배달호 열사 싸움을 보면서 많이 연구했다

결국 한진중 사측과 타결을 봤다던데

박>그렇다. 조합원들이 힘과 의지를 보인 덕택이다. 사측에서 삐딱하게 나오면 85호 크레인(김주익 열사가 목숨을 끊은 곳) 앞에 추모비 세울 자리를 정해 레미콘으로 일단 발라놓고 교섭할 준비까지 했었다.

합의 내용은 어떻게 되나

박>노조 사무실 들어오는 쪽에 스무평 남짓한 공간이 마련됐다. 조형물이란게 자칫하면 흉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주위에 벤치도 설치해서 소공원의 형태로 꾸밀 예정이다. 근데 그 자리가 지금 공사중이라 실제 건립은 내년 2주기 때 될 예정이다.

다행이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을 해냈다

박>사실 이게 안 되면 투쟁국면으로 돌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일(15일 추모식 행사) 솥발산 추모도 무산되는 것이었고 회사도 부담감을 느낀 것 같다.


‘오늘의 정규직이 내일의 비정규직이다’

유가족에 대한 활동이나 직접적 추모 활동이 물론 중요하다. 그렇지만 열사정신 계승은 여러 현안 문제가 포함되는 것일텐데

박>우리 사업장의 손배가압류 문제는 결국 김지회장이 해결하고 갔지만 한진중 내에도 비정규직이 70%에 가깝다. 솔직히 비정규 철폐를 위해 직영노동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접근해야 할 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원청 업체가, 하청 사업체가 차별을 못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구체적 불법 사례들을 수집할 수 있다.

사실 어제 국감에서도 온통 조선소 비정규직 이야기였다

박>구체적 실태는 우리가 제일 잘 안다. 직접 공정에 대한 파견, 작업 지시 사례 다 모아야 한다.

해고자 생활을 오래 해서 더 남다를 것 같은데

박>작년에 복직한 사람이 열여섯이다. 우리는 사실 다 복직을 포기 하고 있었는데 주익이가 복직시켜 준거다. 이 16인 가운데 비정규직 경력이 있는 사람들도 꽤 있다. 물론 비정규직 스스로가 주체로 서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례 수집 정도로는 부족한 게 아닌가

박>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가장 어렵다. 그것만 시작되면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다. 사실 우리 사업장에서도 비정규직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조합원들이 꽤 있다. 비정규직 덕에 자기 고생을 덜 수 있으니 인지상정이긴 하지만... 예전에 통근버스를 타면 관리자가 앉고 우리는 서서 갔다. 이제는 우리가 통근 버스 타고 비정규직은 같은 버스 못 타는 판국이다. 우리가 그런 차별에 폭발했듯 이제 여기가 폭발할 차례다. 마음의 문을 여는 것, 차별을 철폐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이라고 본다.

김주익 열사 1주기 사업이 성황리에 마무리 되면 한진중공업노조의 부담이 더 커질 수도 있겠다. 김주익 열사 싸움 당시 전국의 정규직, 비정규직 할 것 없이 다 달라 붙었고 결국 한진 자본이 굴복했다. 따라서 ‘이제는 당신들이 앞장서 달라’는 요구가 거세질 수도 있다.

박>당연하다. 그래서 조합 간부들은 부르는 데마다 다 달려가 조합 일을 못 할 지경이지만 감히 불평을 할 생각을 못한다. 그러나 조합원들 가운데서는 ‘우리는 이제 좀 조용히 살자’는 사고들이 퍼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번 비정규 법안 대로라면 오늘의 정규직이 바로 내일의 비정규직 아닌가.

말한대로 비정규직 문제를 머리로는 알면서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부 정서가 문제다

박>작업 하다가 비정규직 이야기 하면 가끔 ‘형님은 성인입니까? 우리도 힘들어 죽겠습니다’ 하는 날 선 반응이 돌아오기도 한다. 천막 투쟁 당시 내가 방장으로 있던 천막에서 금속연맹 동지들과 이야기 하다가 별의별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김주익 열사 공식 영정사진
1주기 추모제, 엄숙한 분위기로 투쟁 결의 다지는 장이어야

어떤 대화인지

박>비정규직 철폐가 아니라 정규직 철폐에 나서야겠다고 말했다. 최소한 우리끼리는 안 싸울 거 아닌가? 그리고 다 비정규직이 되버리면 87년 이상 가는 싸움 날 것 아닌가

어떤 심정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한다.

박>개인으로 보면 복직이 노동해방이다. 우리 복직은 교섭으로 따낸 복직이 아니라 김지회장의 죽음으로 따낸 복직이다. 반드시 도덕성을 세워야 한다. 열여섯이 복직했고 셋이 남았는데 둘은 05년 06년에 복직하기로 합의 했다. 하나가 남았다.

혹시 김진숙 지도위원 아닌가

박>맞다. 한진 자본이 딴 건 받아줘도 김진숙 만은 못 받아준다고 했단다.

마무리 짓자. 내일이 1주기 추모식이다.

박>구체적 행사계획은 보면 알테고... 일반적으로 열사정신 계승과 현안투쟁을 따로 보는 경향들이 있다. 우리는 일상투쟁이 열사투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추모제는 1년에 한 번 있는 행사고 결의의 장이다. 현안 투쟁을 핑계로 추모제를 그냥 넘어가서도 안 된다고 본다. 엄숙한 분위기로 투쟁 결의를 다지는 장으로 만들고자 한다.

긴 시간 고맙다. 내일 추모제 자리에서 다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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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김주익 , 추모제 , 박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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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투쟁하그래이


    http://blog.naver.com/stfortruth/100006759948
    =>여서




    헹님, 이제 확실히 하는거제?,

    내 헹님 평소 잘 안 믿는 버릇 있다 아이가,

    비정규직 70프로 넘는뎀서, 헹님 그 치덜 하고 밥은 묵나?

    믿는데이, 확실히 하그래이~. 알았제.

    헹님 인너뷰한다고 수염 깎아빈나, 김주익 님이 헹님인 줄 알고

    계속 쳐다봤다 아이가, 계속 보는데 쬐끔 눈물 날 것 같데.

    내가 쪼마 감상적인 데 안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