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정권이 들어서고 난 이후, 국가와 자본이 민주노조운동의 지도부들을 저격하기 위한 자료를 구축하고 있다는 소식을 ‘설마’로 여기면서 그저 자위했던 많은 사람들. 2005년 초반부터 민주조운동의 지도부들의 부정과 부패라는 범죄 소식에, 아니 그럴 수 있단 말인가부터 그럴 수 있었다는 말에 이르기까지 민주노조운동의 정당성이 혼돈의 도가니에 빠져들고 있다.
정당성이 대체 뭐길래? 민주노조운동을 위해 젊음을 다 바친 활동가일수록 지금의 상황을 쉽게 정리하지 못할 것이다. ‘부정과 부패’의 뭇매를 맞고 있는 민주노조운동. 민주노조운동의 정통성을 무너뜨리는 역사의 죄인으로 치부되고 있는 현실의 민주노조운동. 민주노총 중앙에서 젊음을 다 바쳤을 상근 활동가들이 집단적으로 사직서를 제출해야만 했던 심정을 가슴 아프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의 치부를 위해 노동조합과 노동자 계급을 팔아먹었던 어용의 굴레를 벗어나고 노동자 계급의 해방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민주노조운동의 역사를 생각하면, 부정과 부패를 저질렀던 민주노조운동의 지도부들을 비판하지 않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지금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범죄행위’에 대한 잣대가 무엇이었는가를 되돌아보는 것으로 삭혀야 할 시점이기도 하다. 민주노조운동 스스로 그 잣대를 고민해 본 적이 있었는지조차 의문스럽다면, 그 잣대를 고민하고 노동자의 잣대를 만들어 볼 시점이기도 하다. 물론 사후에 약방문이겠지만, 말이나 글만으로 하는 혁신이 아니라 손과 발이 실제로 움직이는 혁신을 위해서 말이다.
국가와 자본은 ‘부정과 부패’의 화신이다. 돈을 벌수만 있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불도저들이 바로 국가와 자본이었다.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행위야말로 가장 큰 범죄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침범하는 사항 또는 침범하려고 하는 일체의 사항을 범죄로 단정하고 이에 대하여 강제적 권력, 즉 형벌을 발동시키기 위한 요건과 내용 등을 법으로 규정하였다. 특히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법들이 그것이다. 1837년의 공장법이 노동자들을 공장을 벗어나지 못하게 한 상태에서 노동자들을 착취하고자 했던 것처럼 말이다.
강승규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은 택시노동자들을 팔아서 개별자본으로부터 돈을 받았지만, 개별자본은 강승규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에게 돈을 주고 나서 많은 이익을 챙겼다. 개별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그에게 배임수재라는 범죄행위를 적용시킬 이유가 없다. 그러나 부르주아계급은 총자본의 이해를 위해 언제든지 개별자본의 이해를 침해시키면서 그 자본과 공모했던 노동자를 공격한다. 특히 그 노동자가 총자본의 이해를 위협할 수 있는 노동조합의 지도부라면 말이다. 그 나팔수는 바로 ‘공동선’의 미명하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국가이다.
그동안 국가와 자본은 민주노총을 사회적 합의주의의 명실상부한 주체로 끌어 들여 비정규 노동자들과 관련된 법을 함께 만들려 하였다. 국가와 자본 그리고 민주노총의 상층 지도부들의 그러한 의도는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힘으로 무산되었다. 민주노총의 상층 지도부들만이 노사정위원회의 변형된 방식인 ‘노사정대표자협의회’에 참여하는 수준에 머물렀고, 비정규 노동자들과 관련된 노동자들의 투쟁은 강고하게 전개되었다. 선언적 수준에 머무를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2005년 하반기에 비정규 노동자들과 관련된 법안의 개악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도 계획되어 있었다.
국가와 자본은 민주노총의 상층 지도부들의 지도력에 실망하였을까? 아니면 권력을 무시하는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얄미웠을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또한 민주노총 상층 지도부들을 공격하면 조합원들의 힘이 약화될 것으로 믿었을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국가와 자본은 더 이상 민주노총 스스로 사회적 합의주의의 주체로 변화되기를 기다리지 않겠다는 결의 말이다. 국가와 자본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개인공격(personal target)전략’, 즉 이제 민주노조운동의 개별적 주체들을 공격하겠다는 새로운 통제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하였다.
이 전략은 민주노조운동의 수많은 지도자들을 위협하게 될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은 그 동안 국민들의 세금을 우리가 써야 하지 누가 써야 하는가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수많은 제도적 장치에 참여하여 국민들의 세금을 함께 써 왔다. 당연한 권리인양 요구해 왔다. 이 과정에서 민주노조운동이 국가와 자본의 잣대로 재단할 수 있는 범죄꺼리에서 자유롭지 않다면, 즉 국가-자본-민주노조운동이 국민의 세금을 탕진한 공범이라면, 민주노조운동의 지도부들은 국가와 자본의 눈치를 보면서 국가와 자본의 이중대 노릇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범죄의 늪에서 범죄자로 전락하지 않으려는 몸부림만이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통제는 5.16군부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도 구사했고, 광주항쟁을 피로 물들게 했던 전두환도 구사했던 전략이다. ‘구악일소 혹은 사회정의 실현’ 등을 내세우면서 노동자들을 탄압하였다. 노동자들을 제도권의 꿀단지에 만취하게 만든 상태에서, 소위 그들이 만들어 낸 ‘정의의 칼’을 휘둘러 왔었던 것이다. 이 칼날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은 권력에 대한 ‘두려움’에 중독되거나, 혹은 정말 민주노조운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었다.
그 동안 민주노조운동은 제도권에 참여하는 것을 투쟁의 성과라고 강변하곤 했지만, 통제의 늪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함구해 왔다. 노동조합운동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하면서도, 그러한 선택의 함정에 대해서는 무시해 왔다. 노동자 계급에게 이것이 범죄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한 민주노조운동은 ‘이면합의’라는 공범행위에 익숙하다. 사회적으로 공개되는 합의의 내용과는 다른 합의안을 가지고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잡는 행위이다. 이러한 이면합의는 노동조합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작용하였다. ‘이면합의’한 노조뿐만 아니라 비슷한 업종의 노조도 국가-자본의 전략에 자유롭지 못했었다. 이것이야말로 국가-자본-노동조합이 공동으로 노동자 계급을 속이는 범죄행위였다. 우리 조합원들을 위하는 길이라면, 전체 노동자 계급을 팔아도 된다는 의식의 일환이다. 노동자 계급에게 이것이 범죄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민주노조운동의 자랑은 선배 노동자들의 투쟁의 역사였다. 전태일 열사의 투쟁, 1987년의 투쟁,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의 투쟁, 그리고 1996-7년 투쟁의 역사는 단골 메뉴이다. 국가와 자본에 대해 자주적 ․ 민주적 ․ 계급적으로 투쟁했던 역사를 계승하고자 하는 현실의 바램일 것이다. 그런데 현실의 투쟁이 역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자신의 힘을 위해 역사를 팔아먹는 행위의 일환이다.
부르주아 계급의 정체성에 조응하여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부르주아 계급과 달리, 어느 순간부터 민주노조운동의 각종 투쟁에 대한 평가와 책임이 사라졌다. 노동자 계급에게 이것이 범죄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고 공언한 주체가 바로 민주노조운동이었다. 자본주의 세상의 모든 모순이 자본에서 비롯된다면, 자본을 폐지하는 것이 곧 새로운 세상일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과정이 쉽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나 인정한다. 새로운 세상의 청사진은 고사하고 자본주의 세상의 썩은 사진들만을 모사한다면, 노동자계급에게 이것이 범죄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국가와 자본이 제시하는 범죄의 잣대는 고무줄이다. 그들은 필요하면 언제든지 노동자계급을 범죄자로 내몰고 있으며, 그에 필요한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다. 반면에 노동자계급은 어떠한가? 범죄행위에 대한 주체적 잣대조차 없다. 노동자계급의 잣대를 만들기 위한 과정은 곧 민주노조운동의 혁신과정일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항변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을 ‘절대선’으로 간주하지 말라! 노조운동을 잘 모르는 사람들만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다고! 그 말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 말 한 마디는 꼭 필요하다. ‘민주노조운동을 말하려면, 노동자계급과 노동자 대중을 개인과 정파의 이해와 필요에 따라 이용하지 말라! 노동자 계급에게 이것이 범죄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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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님은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