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원 기자 |
"23년 동안 우리는 낙인과 차별로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HIV/AIDS(에이즈)가 발견된 지 23년 만에 감염인들이 처음으로 거리 집회를 열었다. 1일 세계에이즈의날을 맞아 감염인과 인권단체 회원들은 서울 종로 새문안길에 위치한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집회를 열고 치료접근권 보장 등을 촉구했다.
▲ 이정원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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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전엔 약이 없어 죽고, 지금은 있어도 죽고"
이날 거리로 나선 감염인들은 비록 얼굴이 드러나지 않도록 가면을 썼지만, 에이즈가 세상에 알려진지 27년, 한국에서 감염인이 발생한 지 23년 만에 첫 외출이었다.
윤 가브리엘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 대표는 "항상 '언제쯤 감염인들이 거리에서 집회를 열 수 있을까'했는데, 23년 만에 처음으로 세상 밖으로 나와 집회를 한다"며 "에이즈 환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 순간이 너무 감동스럽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윤 가브리엘 대표는 "23년 동안 한국 사회는 많이 변했지만, 에이즈 환자들은 달라진 게 없다"며 "23년 전에는 약이 개발이 안 돼 죽어갔지만, 지금은 약이 있어도 비싸서 사먹을 수 없어 죽어간다"고 감염인들이 처한 현실을 지적했다.
감염인들은 집회를 마친 뒤 정부 주최 세계에이즈의날 공식 기념행사가 열리는 광화문 프레스센터까지 거리 행진을 벌였다.
이들은 행진 후 프레스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한때 죽음과 공포의 상징이었던 에이즈는 의학 기술의 발전으로 제때 꾸준히 치료받으면 일상생활을 충분히 영위할 수 있는 만성질환처럼 되었다"며 "그러나 감염인들의 건강권 확보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치료제가 제때 충분히 공급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 감염인 및 인권단체 회원들이 거리행진을 벌이고 있다/ 이정원 기자 |
▲ '환자 생명 잡아먹는 복지부는 각성하라', 감염인들이 거리행진을 진행하며 의약품을 상징하는 옷을 입고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이정원 기자 |
"강제실시로 감염인 치료접근권 보장하라"
감염인들은 다국적제약회사 로슈가 개발한 에이즈 치료제 '푸제온'의 사례를 언급하며, 제약회사와 한국정부의 행태를 비판했다. 지난 2004년 건강보험에 등재된 푸제온에 대해 로슈는 '약값이 낮다'며 4년 째 국내 시판을 거부하고 있다. 로슈는 현재 푸제온 한 병 당 3만970원을 요구하고 있고, 이를 그대로 수용할 시 에이즈 환자 1인당 연간 약값은 2천200만원에 달한다.
감염인들은 "특허라는 독점을 무기로 제약회사는 근거 없이 비싼 약값을 주장하고 환자들의 의약품 접근권을 막아버려도 한국정부는 속수무책"이라고 지적한 뒤 "감염인들이 복지부에 강제실시를 요구했지만, 복지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다며 환자의 건강권을 내팽개치고 있다"고 정부와 로슈를 싸잡아 비판했다.
이들은 "공급거부를 무기로 자신들의 원하는 약값을 챙기는 제약회사를 통제할 수 있도록 강제실시를 통해 치료제의 안정적 공급을 확보해야 한다"고 푸제온 등 제약회사가 공급을 거부하고 있는 필수의약품에 대한 정부의 강제실시를 재차 촉구했다.
한편, 이날 감염인들은 정부 측 공식 기념행사에 참석해 기념식이 열리는 동안 피켓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 복지부가 주최한 세계에이즈의날 공식 기념행사 도중 감염인들이 단상에 올라 피켓시위를 벌이고 있다/ 김삼권 기자 |
▲ 에이즈의날 공식 기념행사에서 이종구 질병관리본부장이 전재희 복지부장관을 대신해 축사를 하고 있는 동안 한 감염인이 피켓시위를 벌이고 있다/ 김삼권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