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변호사는 “희망제작소만 해도 지역홍보센터 만드는 사업을 3년에 걸쳐 하기로 행정안전부와 계약했는데 1년 만에 해약통보를 받았다.”면서 “하나은행과는 마이크로 크레딧 같은 소기업 후원 사업을 같이 하기로 합의하고 기자회견까지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무산됐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국정원에서 개입했다고 한다.”고 밝혔다. 박 변호사는 “이 말로 주목받으면 저로서는 바라는 바”라고 말해 작정하고 사실을 폭로한 것임을 강조했다. 그는 국정원의 이 같은 행태에 대해 “명백한 민간사찰이자 국정원법 위반”이라면서 “이렇게 민간사찰이 복원되고 정치와 민간에 개입이 노골화되면 이 정권의 국정원장은 다음 정권 때 구속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고 강조했다.
국정원은 이에 대해 사실무근이라고 말했지만 상식적으로 국정원이 민간사찰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을 사람은 많지 않다. 굳이 사찰이라는 이름은 아니어도 ‘여론 동향파악’이라는 이름으로 사찰 아닌 사찰은 계속 해오고 있었고, 미림팀(국정원 내 도청팀)을 통한 도감청과 X파일의 존재는 이미 확인된 바가 아닌가.
이제는 음지에서 일하지 않는다?
최근 국가정보원을 소재로 하는 드라마와 영화가 연이어 나오고 있다. 작년에는 <에어 시티>, <개와 늑대의 시간> 등의 드라마가 있었고, 올해는 <7급 공무원>이라는 영화가 상영되었다.
지금의 국가정보원은 1961년 처음 생겨난 중앙정보부를 모태로 한다. 국정원은 사실상 40년 이상 일체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았으며 철저하게 비밀스러운 금기의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국정원의 과거 부훈(원훈)은 본청 건물 앞마당의 바윗돌에 새겨졌던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이었다. 과거 국정원이 어떤 정체성을 갖고 활동했는지 잘 보여주는 표현이다.
1999년 국정원으로 개명하면서 원훈이 “정보는 국력이다”로 바뀌었다. 이제는 음지에서 벗어나 양지로 나와도 된다는 판단을 한 것일까. 국정원은 정보화 시대, 과거와는 다른 의욕을 보이기 시작했다. 2005년 영화 <태풍>, 2006년 <한반도>에 촬영 등을 지원한 것은 그러한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며 다양한 방식으로 대중과의 본격적인 교감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과거 군사독재 정권의 ‘중정’ 시절이나 권위주의 정권의 ‘안기부’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정체성과 활동을 준비한다는 나름의 전략인 것 같다. 일종의 국정원 유연화 전략이다.
국정원 유연화 전략은 대내외 환경의 변화도 원인이 되었지만, 가까이는 미국의 CIA를 벤치마킹한 듯하다. 미국의 CIA는 20여 년간 CIA 근무경력이 있는 핵심 요원을 ‘엔터테인먼트산업 담당책임자’로 임명했고, 그는 CIA 홍보실에 소속되어 영화제작업자나 출판업자가 CIA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만들 때 시나리오 자문이나 요원과의 인터뷰 주선, 비밀공작활동 현장 촬영 등을 지원하는 것을 주요 업무로 갖는다고 한다. CIA의 비밀공작활동이 갖는 부정적인 측면을 좀 더 긍정적이고 사실적인 차원에서 접근하게 함으로써 일반 국민들로부터 인정받고 신뢰를 얻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영화 <레드 옥토버>(1990), <패트리어트 게임>(1992), <긴급명령>(1994) 등이 제작되었으며, CIA 요원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들 영화는 CIA 요원의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데 어느 정도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CIA의 전략을 수용한 국정원은 한국현대사에서 그들이 한 일이 어떤 것이었는지 거의 알지 못하는 오늘날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갈 것인가. ‘국정원’은 단지 멋있는 정보기관이며, 매력적인 직장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정원의 유연화전략, 넓어지는 오지랖에 섬뜩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이명박 정부와 국정원
이명박 정부가 집권한지 1년 반이 지났다. ‘경제 살리기’라는 최초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그야말로 국토는 삽질경제로 초토화되고 있으며, 인권과 민주주의는 하릴없이 후퇴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국민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일방적 독주를 계속하고 있으며, 그 결과 용산참사, 박종태 열사의 죽음,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인 서거로까지 이어졌다.
최근에는 이명박 정부가 독재정권인지에 대해 때 아닌 설전이 뜨겁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이명박 정부를 독재정권으로 규정하고 각종 시국선언을 통해 마지막 호소와 경고에 나섰다. 이에 반해 청와대 대변인과 한나라당 의원들은 “대통령을 설치동물(쥐)에 비유하고, ‘MB OUT’이라는 구호를 마음껏 외칠 수 있는데 무슨 독재냐” 하고 항변한다. 옛날 군사독재시절도 아닌데 ‘민간독재 논란’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게도 이명박 정부 스스로의 업보임에 틀림없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자신을 대표자로 선출해준 국민들이 대한민국 권력의 궁극적인 원천임을 부정하고 그 위에 군림하려 하고 있다. 국민을 섬기는 정부가 되겠다던 현 정권이 국민을 전방위적으로 감시하고 억압하고 있다. 정부여당은 각종 반민주적 악법과 강압적인 국가기구를 통해 국민들의 행동과 표현, 사상과 의식까지도 감시·통제하려 들고 있다. 정부여당이 앞장서서 ‘입법전쟁’ 소동을 일으키고, 보수언론이 이를 거들었다.
특히 이명박 정부가 참여정부와 확연히 구별되는 것은 ‘권력행사’에 이른바 4대 권력기관을 철두철미하게 활용한다는 점이다. 그동안 검찰과 경찰, 국세청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검찰과 경찰은 앞장서서 용산에서의 살인진압을 지휘하고, 미네르바를 구속했으며, PD수첩 작가의 개인적 이메일을 공개하고, 네티즌들을 겁박하고 있다. 국세청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표적수사의 자료를 제공하기 위해 지방 중소기업인에 대한 위법한 세무조사를 자행하는 한편, 이를 비판하는 세무공무원 김동일 씨를 파면 조치하는 몰염치를 서슴지 않고 있다. 그동안 검찰, 경찰, 국세청에 비한다면 국정원은 비교적 점잖게 움직여 왔다고 볼 수 있다. 오죽하면 작년 “촛불정국에서 국정원이 제 역할을 못했다.”는 질책이 정부여당 내에서 쏟아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물론 국정원은 비비케이(BBK) 관련 민사소송 재판을 담당하는 판사에게 전화를 걸어 재판 진행 상황을 묻고 법정에 출입하는 등 물의를 빚어 법원의 거센 항의도 받았고, 언론사를 담당하는 언론단을 신문단·방송단으로 분리·재편하는 등 국내정보 수집을 강화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다른 권력기관에 비하면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다. 이명박 정부의 통치스타일에 미루어 국정원을 순순히 놔둘 리가 없기 때문이다. 우선 MB는 국정원장에 최측근인 원세훈 씨를 임명했다. 정보업무에는 문외한이다. 국정원을 정권안보에 활용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하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국정원 강화 프로젝트이다. 정부여당은 집권 초부터 국정원법 개정, 테러방지법 제정, 통신비밀보호법 개정 등 국정원 강화 프로젝트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국정원 강화 프로젝트는 MB독재의 완성판
우선 이명박 정부는 국정원 등 수사기관이 휴대전화 감청 등을 합법적으로 할 수 있도록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은 휴대전화와 인터넷 사업자가 통신망에 휴대전화와 전자우편, 인터넷쪽지(메신저)도 유선전화처럼 감청이 가능한 장비를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하고 있다. 휴대전화는 2년, 인터넷은 4년 안에 설치하지 않으면 해마다 최대 10억 원까지 이행 강제금이 부과된다. 이제 휴대전화와 전자우편, 인터넷 쪽지에 대한 합법적 감청이 가능해진다. 사업자는 이용자의 기록을 1년 이상 보관했다가 수사기관이 요구하면 넘겨주어야 한다. 기록을 남기지 않거나 수사에 협조하지 않으면 처벌된다. 정보·수사기관이 감청이나 통화내역 제공을 요청할 수 있는 대상도 ‘전기통신사업자’에서 ‘전기통신사업자 등’으로 확대됐다. 경우에 따라서는 신용카드·지하철·버스카드 사업자 등 개인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가진 모든 곳이 정보·수사기관의 감청 및 통화내역 제공 요청 대상에 포함될 수 있다. 일반인도 하루 300번 이상 CCTV 등에 노출된다고 한다.
국정원이 정보를 관장하면 우리에게 비밀이란 있을 수 없다. 이 법안이 그대로 국회를 통과하게 되면 온 국민의 휴대전화 통화내역과 인터넷 사이트 방문기록이 낱낱이 노출되고 말 것이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빅 브러더’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정부여당에서는 감청된 내용이나 통화내역 등은 절차에 따라 특정한 목적(범죄수사 등)에만 활용된다고 강변하겠지만, “개인사생활정보가 기록되고 있으며, 언제든지 정보수사기관에 넘겨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허용될 수 없는 기본권의 제약이다.
한편 국정원은 국정원법에 명시된 현행 국정원 직무 범위를 대폭 확장하는 방향으로 국가정보원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현행 국정원법에는 제3조에 국외정보 및 대공·방첩·대테러 등 국내 보안정보 수집, 국가기밀에 대한 보안업무, 내란 및 국가보안법 등 사범 수사, 국정원 직무 관련 범죄에 대한 수사 등으로 국정원 직무를 명시하고 있으나 이제는 그 범위를 무한정으로 늘리겠다는 것이다. 이는 ‘정치개입 금지’ 등 국가 정보기관의 활동범위를 엄격히 제한한 1994년 ‘안기부법’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대선 과정에서 국정원의 국내 정치 불개입을 촉구하고 해외·경제정보 역량 강화를 공언해 왔다. 그러나 집권 후에는 국정원의 국내 정보수집 기능 강화를 주문하고 있다. 박원순 변호사의 폭로가 아니더라도 국정원은 이미 알아서 현 정부의 입맛에 맞는 활동을 하고 있다. 국정원법 개정은 이를 합법화시키는 요식절차가 될 것이다.
또한 이명박 정부는 테러방지법 제정을 또 들고 나왔다. 테러방지법은 지난 16·17대 국회에서도 여러 차례 입법이 시도되었지만 번번이 무산되었다. 테러의 개념 자체가 명확하지 않고, 인권침해의 우려가 있으며, 국정원의 권한이 비대화되고, 군이 치안에 개입하는 등 위헌적 요소가 해소될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테러방지법은 인권시민단체들로부터 ‘제2의 국가보안법’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9·11 이후 부시가 주도하는 대테러전쟁의 과정에서 테러방지법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명박 정부는 ‘테러방지법’ 재추진을 선언하였다. 유령이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테러방지법의 핵심은 ‘국정원 주도의 대테러센터’를 만드는 것이다. 인권시민단체는 그동안 국정원이 대테러센터의 중심에 서는 것을 철저히 반대해왔다. 그것은 국정원이 어두운 인권침해의 과거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비밀정보기관인 국가정보원이 정보수집기능과 집행기능을 통합행사하게 되면 비밀경찰로 전환될 것이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대공수사권 폐지, 국회와 민간에 의한 국정원 통제, 순수정보기관으로의 전환”이라는 국정원의 오랜 개혁과제가 지지부진한 가운데, 조직이기주의로 흐르는 테러방지법 제정논의는 괴물의 탄생을 예고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또 다시 힘겹게 괴물과 맞서 싸울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국정원을 순수 정보기관으로
국정원이 남긴 역사적 오점은 인권침해와 함께 정치사찰 논란이었다. 만약 정부의 의도대로 국정원법이 개정되면 정치·민간사찰 강화와 인권침해는 불을 보듯 빤한 수순이다. 이미 이명박 정부는 참여정부 시절 중단되었던 국정원장의 대통령 독대보고도 부활시켰고, 이 자리에서는 대북 관련 정보는 물론 민심동향에 대한 보고도 이뤄져 왔다. 이처럼 국정원을 무소불위의 ‘정보권부’로 만들려는 일련의 움직임은 지난 10여 년 간의 ‘국정원 탈정치화’ 노력을 무색하게 한다.
권력자는 정보정치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것은 희망사항일 뿐이다. 더구나 현 집권세력은 공안통치의 달콤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참여정부 아래서 활동한 국정원 진실위(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지난해 10월 활동을 종료하면서 방대한 보고서와 함께 국정원 발전을 위한 권고와 제언을 발표했다. △국정원과 그 전신인 중앙정보부와 안기부가 과거에 행한 월권적 행위에 대한 유감 표시 △정치 불개입 원칙 고수 △공권력 남용 피해자에 대한 실질적 명예 회복과 구제 절차 마련 △교류와 협력시대에 걸맞은 정보 수집체계 구축과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선진 정보기관으로 거듭나기 등이 포함돼 있다. 정권의 좌우를 묻지 않고 민주주의 국가라면 반드시 이루어야 할 가치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이에 대해 통신비밀보호법 개정, 테러방지법 제정, 국정원법 개정으로 화답하고 있는 것이다.
국정원에 대한 국민적 기대는 ‘경쟁력 있는 정보기관’을 만드는 것이다. 무한경쟁의 국제화시대에 국가정보기관의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것은 국익을 위해 필연적인 것이다. 냉전이 종결된 이후에는 경제·환경·에너지 등 모든 분야에서 정보 전쟁이 더욱 첨예해지고 치열해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국정원의 역할은 점점 확대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국정원의 역할 확대는 ‘제대로 된’ 국민의 정보기관으로 거듭날 때만 가능하다. 불행하게도 이명박 정부는 국정원을 바로세우는 대신 국정원법 개정 등을 통해 정치사찰과 공안통치에 악용하려 하고 있다. 이것은 명백히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것이다. 우리 국민은 피와 땀으로 쟁취한 민주주의를 결코 양보하지 않을 것이며, 과거로 되돌아가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이 대한민국 주권자인 국민의 뜻이다.
- 덧붙이는 말
-
장유식 님은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 공익소송위원장입니다.
이 글은 격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2009년 7-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