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더라도 비참하지 않은 사회

[기획연재] 당사자의 목소리, 나는 4월 14일 세종으로 간다

[편집자 주] 기후위기 최전선에 있는 당사자들이 일상을 멈추고 오는 4월 14일 세종정부청사로 모입니다. 414기후정의파업조직위원회는 기획연재로 기후위기에 맞서 싸우고 있는 이들의 414기후정의파업 참여 이유를 생생한 삶의 이야기로 전합니다. 이들이 외치는 ‘함께 살기 위해 멈춰’에 공감한다면 414기후정의파업, 세종정부청사 앞으로 달려와 주십시오. 414기후정의파업 조직위원회 https://april4climate.tistory.com/


종언아저씨는 학교 청소 일을 퍽 마음에 들어 했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인 종언아저씨는 ‘근로능력’이 있다고 판정받았기 때문에 자활센터를 통해 일자리를 소개받았다. 일 자체는 고됐지만, 시설관리를 총괄하는 반장은 이따금 회식을 열었고, 함께 일하는 동료도 있었다. 홈리스야학에서 활동하던 종언아저씨를 자주 보기 어려워지기는 했으나 좋아하는 일을 찾아 나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코로나19가 닥치자 학교는 청소할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자활센터에서는 방역 일자리를 새로 소개했다. 소독기를 매고 사무실이나 집 등을 소독해주는 일이었다. 요청이 들어오는 대로 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때로는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새벽녘 일이 시작되기도 하고, 수 시간을 그저 대기하다가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일도 빈번했다. 급여도 줄었다. 그래도 일할 수 있으니 그럭저럭 다행이었다.

작년 3월에 방역 일도 끝나버렸다. 자활 일자리는 5년만 참여할 수 있다는 제한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일할 때는 180만 원, 방역 일을 할 때는 140만 원 월급을 받아 왔지만, 빚도 아직 다 갚지 못했다. 상황이 나아진 것은 아닌데 정부는 그저 어서 복지제도 바깥으로 나가라는 식이다.

여섯 달의 실업급여를 받으며 구직활동도 했지만, 나이도 적지 않고 체력도 약한 탓인지 종언아저씨를 부르는 회사는 없었다. 그간 모아둔 돈을 쪼개가며 몇 개월을 지냈다. 그러던 지난 1월, 6만 6,130원이 적힌 가스요금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6만 6,130원. 누군가에게는 그리 큰돈은 아닐지 모르겠다. 그러나 수년간 4만 원이 넘는 가스요금 고지서를 받아본 적이 없고, 벌이마저 멈춘 상황에 내몰린 종언아저씨로서는 버거운 금액이었다. 결국 연체가 시작됐다. 생활비도 없고, 공과금도 밀리는 모습을 본 활동가의 제안으로 긴급복지지원을 신청했다. 긴급복지지원금 62만 원이 입금되자마자 밀린 가스요금이 통장에서 빠져나갔다.


6만 6,130원의 무게

지난겨울은 정말 추웠다. 종언아저씨는 그래도 아껴 쓴다고 썼는데 왜 이렇게 큰 금액이 청구되었을까 궁금했다. 자활 일자리에 참여하는 동안 아마 아저씨는 차상위 계층으로 가스요금을 할인받아왔을 것이다. 그간 한겨울에도 2만 원이나 3만 원 정도의 가스요금만 청구된 까닭이다. 자활일자리가 끝나자 할인도 종결됐다. 그래도 평소보다 많이 사용한 건 아닐까 확인해봤다. 무척 추웠던 지난 12월 가스 사용량은 3천 메가줄, 비교적 포근했던 작년에는 가장 많이 사용한 월이 2,274메가줄, 마찬가지로 혹한이 찾아왔던 2021년 1월에는 3,134메가줄을 사용했다. 2021년 2월에 청구된 비용은 3만 6,950원인데 올해는 그보다 덜 사용하고 6만 6,130원을 청구받았으니 사용은 덜 하고 요금은 두 배가 된 셈이다. 복지할인 종료와 가스요금 인상이라는 두 개의 짐이 아저씨의 삶에 더해졌다.

6만 6,130원의 무게는 얼마였을까? “어쩔 수 없지 뭐, 더 아껴 썼어, 지낼 만했어.” 아저씨는 심심하게 말했지만 1월과 2월 가스 사용량은 좀 더 확실한 속내를 보여줬다. 1월 사용량은 258메가줄, 2월 사용량은 128메가줄. 아무리 지난 1, 2월이 따뜻했다 할지라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한기와 맞바꾼 고지서에는 각각 6,690원, 5,020원이 찍혀있었다. 정부는 복지 지원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요금감면이나 부가적인 혜택을 준다고 홍보하지만, 종언아저씨에게 복지는 두 번의 안전망이 아닌 두 개의 함정이었다. 일자리를 빼앗기면 알량한 할인마저 사라지고, 소득이 없을수록 더 많은 숫자가 적힌 고지서가 날아드는.

함정이 된 복지제도,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 그 자체

가스요금 폭등으로 정부는 에너지바우처 인상을 내놓았다가 에너지바우처 대상이 너무 적다는 비판이 일자 가스요금 경감 대상을 확대하겠다는 대책을 추가로 내놓고, 이도 부족한 것 같았는지 냈던 가스비를 일부 돌려준다고 했다. ‘약자와의 동행’을 내건 정부답게 하루가 멀다고 빈곤층 복지를 선전하고 있어 정말 뭔가 진행되는 것 같지만 속을 자세히 까보면 각 기준이 복잡다단해 이 혜택이 정말 누구에게 얼마의 도움이 되는지 알기 어렵다.

예를 들어 지난 2월 정부가 발표한 요금할인 정책을 보자. 기준중위소득 50% 미만 복지대상자에게 최대 월 14만 8천 원까지 도시가스요금을 감면해준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실상을 확인해보면 중위소득 50% 미만 가구를 에너지바우처 수급가구와 미수급가구로, 각각을 다시 교육급여 수급자와 차상위계층으로 나누고, 또다시 다른 복지혜택은 없지만, 차상위계층 확인서만 발급받을 수 있는 대상으로 나누어 5단계로 지원 내용을 차등했다. 14만 8천 원은 이 중 가장 높은 할인을 받을 수 있는 가구의 경우이고, 가장 낮은 요금할인을 받는 가구의 경우 겨울철에는 1만 8,000원, 그 외 기간에는 2,470원만을 감면해 준다.

이 복잡한 복지선정기준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언제나 넌덜머리가 난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이게 무슨 말인가, 한참을 다시 읽어보았을지 모른다. 나는 이 제도를 두 가지 이유로 탄핵하고 싶은데 첫째, 소득수준과 가구특성만으로 에너지 요금할인의 필요나 지출의 과중함을 일반적으로 측정할 수 없어 비합리적이고 둘째, 이 제도가 필요한 사람들조차 내가 이 기준에 해당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은 통제할 수 없다는 말이다. 빈곤이 가져오는 가장 큰 어려움이 짧은 미래에 대해서조차 예측하거나 대비할 역량을 빼앗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복지제도가 이렇게 복잡하다는 것은 단지 신청 과정이 까다롭다는 문제를 넘어선다. 너무나 복잡해 결과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드는 복지제도의 모양 자체가 현대의 가난을 구성하는 요소다.


예측할 수도, 대비할 수도 없는 위기에 맞서 모두의 대안을

나에게 기후위기는 가난한 이들의 삶에 예측할 수 없는 돌발 사건이 연속될 또 하나의 가능성이다. 여름, 겨울은 으레 장사가 잘 안 되는 것으로 알던 노점상들이 봄, 가을 장사를 위해 팔을 걷어붙이면 난데없는 가을장마나 봄추위가 찾아들고, 혹한에 바람이 덜 드는 자리를 찾은 줄 알던 홈리스의 잠자리에 빗물이 고이는 식으로 말이다. 2022년 여름 발생한 폭우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서 유래하든 물은 반드시 아래부터 고여 든다. 기후위기 시대에 가난은 바로 그 자리다.

2022년 9월 24일 서울에서 열린 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한 한 고시원 거주자는 벌레 없고 안전한 공공임대주택 입주를 기다리는 마음을 담아 ‘기다리다 늙어 죽겠다’고 썼다. 배고파 죽겠다, 추워 죽겠다, 더워죽겠다, 심지어 배불러 죽겠다! 온갖 죽겠다는 말을 달고 사는 한국인이지만 저기 있는 죽겠다는 예사롭게 읽기 힘들다. 불이 난 고시원에서 죽어간 사람들이며 아직 4월의 초입인데 올해만 7번째 이웃 장례를 치른 양동 쪽방 주민의 사정이며, 수년을 손꼽아 기다리던 공공임대주택에 입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만 세상을 떠난 난숙 할매의 얼굴이 생각나는 까닭이다. 오늘도 재개발 지역에는 멀쩡한 건물을 부수고 새 아파트가 올라서는데, 왜 기후위기에 취약한 가난한 이들의 자리를 대신할 집은 짓지 못하는 것일까. 원인도 해결책도 한가지다. 오로지 돈을 위한 집짓기를 끝내고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을 만들어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빈곤 없는 세상을 향해 세종으로!

내가 원하는 빈곤 없는 세상이란 사실 거창하지 않다.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사는 이들이 소득중단이나 질병, 장애, 출산, 노화를 너무 두려워하지 않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설사 가난에 빠지더라도 그것이 주거와 의료, 에너지, 교육과 같은 필수적인 권리를 위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난한 사람조차 그럴 수 있다면 이 사회를 살아가는 누구나 그러할 것이다. 건물주가 되기 위해 모두가 영원히 경쟁하기보다 가난하더라도 비참하지 않은 사회, 가난을 덜 발생시키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힘을 모으는 편이 낫지 않나.

그래서 답은 있다. 가난이 삶에 대한 우리의 주도권을 번번이 빼앗을 때마다 우리는 개인의 위기에 맞선 사회의 대안을 만들기 위해 싸웠다. 기후위기는 우리가 그 대안을 만들어 가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려서는 안 된다는 신호다.

어떤 이들은 나에게 세상을 바꾸자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말과 같다고 충고하곤 한다. 문제 해결은 조금 더 날렵하고 세련되게, 전문적인 지식과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수준에서 제안해야 받아들여진다고 말이다. 그러나 세상을 만들어온 구조 자체가 문제일 때 세상을 바꾸지 않고 문제를 해결한다는 생각이야말로 허황된 것은 아닐까? 이윤만을 위해 굴러가는 톱니바퀴를 멈추고 세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작동시켜야 할 때다.

그래서 나는 4월 14일 세종에 간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거기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더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들으러 간다. 맞는 말도 혼자 하면 조금 자신감을 잃기 때문에 말하러 간다. ‘위기다’ 외치는 것을 넘어 ‘멈춰라’, ‘변화해라’ 문을 두드리기 위해 간다. 결단력이 부족한 나는 결정하고 행동하려면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행동하며 결정하는 편이다. 어떤 미래를 꿈꾸어야 할지 좀 더 잘 알기 위해 나는 세종으로 간다. 당신도 오시라. 기후위기와 불평등에 속이 답답할 땐 함께 걷고 외치는 집회가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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