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세상
제목 가짜와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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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저녁꽃    
작성일 2003년 07월 31일 09시 35분 34초


고등학교 때 저는 인문계에 있으면서
전혀 공부에는 관심이 없는 가짜학생이었지요
다른 친구들은 눈이 뻘개지도록 문제집을 보고 있을 때
저는 문제집 아래에 소설책이니 시집 같은 걸 숨겨 놓고
감독하시는 선생님의 눈을 피해 흘끔흘끔 읽는 것,
그게 고3때 제가 해본 '공부'의 전부였던 것 같아요
사당오락이니 뭐니 해서 친구들 수능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동안
저는 낙서장에 끄적끄적 잡히지도 않는 꿈들을 까맣게 적으며
밤을 새곤 하였답니다

더 기가막힌 노릇은 수학 시간이 오면 저도 모르게 쓰러지곤
하였다는 건데, 일어나 보면 열 손가락이 바늘로 따져 있거나
아니면 응급실에 누워 있거나 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었죠
병명은 언제나 "신경성"이었는데.
그렇게 수학하면 치를 떨만큼 한쪽이 마비된 학생이었답니다
어느 정도 지나니까 수학과목 선생님들은 저를 포기하셨지요
"너 하고 싶은 거 해라!"
이 말을 듣기까지 얼만큼의 쇼팬쉽도 필요했던 것 같네요

주말 자율학습은 죽기보다 싫어했지요
그래, 방법을 찾았답니다 (이 방법 알면 혹 써먹는 학생 있으려나?)
일단 비누와 물 몇 방울을 손바닥에 녹여 걸죽하게 만드는 거죠
다음엔 그 비눗물을 손가락 끝으로 찍어 양쪽 눈에 떨어뜨리는 겁니다
그러면 두 눈은 새빨간 토끼처럼 충혈되고
눈을 한번 깜빡이면 그 충혈된 눈에서 빗물처럼 눈물이 주루룩~
그 다음, 교무실로 향하는 건데요
교무실 문을 열 때 '이렇게까지 학교를 떠나야 하나?'하고
서러움이 복받쳐 완벽한 가짜놀이가 진행되는 거지요
아무리 독사로 소문난 선생님들도 저의 가짜놀이에는
추풍 낙엽처럼 그 독기를 잃고 마셨다는 게 지금 생각해보면
참 가슴이 아프네요... --;
"데려다 주지 않아도 되겠어?"
"네...... 그냥 혼자 걸어갈 수 있어요 집이 요 앞인데요 뭘!"
그렇게 감옥에서 탈출하기 전 친구들에게 미안함을 담은 빠이빠이를
흔들고 쏜살같이 교실을 빠져나와 운동장 교문을 빠져나올 때까지는
엄청난 연기력이 필요하지요... 혹 누군가 제 뒷모습을 수상하게
바라볼지 모를 일이었으니까!
교문을 빠져나온 후부터는 그야말로 "자유"가 되었답니다
이 정도만 보더라도 제 심각한 수험 생활이 불 보듯 뻔하지요?

그런데 제가 그렇게 가짜로 있는 동안
저를 진짜로 봐주신 선생님들이 몇 분 계셨지요
한 분은 제가 좋아하는 '문학'이라는 발판을 제일로 평가하고
인정해 주신 국어 선생님이고, 또 한 분은 저의 가짜 행각을 알면서도
눈 감아주고 아니 더 격려해주신 문학 선생님이셨습니다
이 분들 때문에 저의 힘없는 어깨에는 늘 날개가 붙는 느낌이곤 했지요

학교에 있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제게 전국 단위의 백일장은
모두 추천서를 써주시며 다녀오라고 하시던 국어 선생님은
"잘 갔다와라"하시며 윙크를 살짝 보내주시곤 했지요
덕분에 여기저기 주워 모은 상장들이 생기게 되었고
그 덕분으로 다행히 저는 꼴등급으로도 특기자란 명예를 안고
대학이란 문턱에 그것도 4년제 대학에 들어가게 된 것이지요
어때요? 우리 국어 선생님 진짜죠?

또 한분! 제가 문제집 밑에 끼워두고 읽는 시집이 모자랄까봐
자율학습 시간에 몰래 감독인양 들어오셔서 제 책상 위에 직접
사오신 시집을 내려 놓고 가곤 하신 문학 선생님인데요
제 형평없는 모의고사 성적표를 담임 선생님보다 더 심각하게
고민해주시곤 하셨지요, 누가봐도 낙제감인 제 성적표를
그렇게 꼼꼼히 보아주던 것이 지금와선 얼마나 눈물나는지.......
이 분 역시 가짜 학생을 끝까지 보듬고 가시려는 진짜 선생님이세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지요
참교육이라는 게 진짜들을 돋보이게 하는 것보단
가짜들을 안아줄 수 있는 그 이해의 깊이라는 것을요
그렇게 보면 세상에는 가짜란 없는 거겠죠?


그 두분 선생님이 참 그리운 날이네요
.......



신청곡 => 하덕규 <좋은 나라> or
김창완 <해바라기가 있는 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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