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c악수론 : 이회창은 最惡 의 手 다.(그는 절망을 부른다.)>
토론란에서 이회창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이 민족의 장래를 위해 이회창이가 천명한 바 있는 장기적 대안 또는 구체 계획 비스므리 한거라도 있으면 한번 말해보라고
그가 이 나라의 현실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장기적 안목에서 제시한 정책이 있었는지
그가 이 민족의 현실적 고통을 헤아려 민족의 나아갈 바를 밝혀 본 적이 있었는지
도탄에서 가까스로 기어나오듯 하고 있는 경제분야에 대해 심각한 고민과 연구 검토를 거친 실질적 정책 같은 것이 있었는가고…….
가치관의 방황가운데 헤메이는 우리 청소년들의 현실 뿐만 아니라 50년 내리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교육 문제에 관하여 그가 내놓은 방안은 과연 무엇이 있었단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해 이회창을 지지하는 어떤 사람도 논리적 답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에게서 그런것들과 관련한 그 어떤 실질 대안도 제시된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치에 입문하여 1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지속적으로 집권자 주변에서 서성거려왔지만 이 백성에게 진정으로 희망을 안겨줄 어떤 장기 정책도, 어떤 뚜렷한 방향제시도, 어떤 소망스러운 역사철학도 그에게서 제시된 바가 도대체 없었다.
그는 그러한 것들을 담을 그릇이 못되기 때문이다.
하물며, 남북관계 이겠으며, 한일관계에 대해서 이겠으며, 동북아정세에 관해서 이겠으며, 국제정세에 관해서 이겠으며, 세계경제의 흐름이겠으며, 제3,제4의 혁명으로 몸부림치는 역사의 소용돌이 이겠는가?
그에게 민주에 대해, 민족에 대해 무슨 타오르듯 우러나는 사랑을 기대 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 독재하에 충성되이 적응하며 민족주의자를 사형시켜온 장본인에게…
그는 기가막히고 실로 극단을 치달았던 굴곡의 역사에 놀라울 정도로 변신하며 적응하여온 변신의 귀재였을 뿐이다.
이러한 그의 능력은 사실 그의 속안에 [든 것]이 아무것도 없음으로 인하여 가능하였던 것이다.
민족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민족사관,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자유와 민주에 대한 신념, 역사의 앞날을 바라보는 역사관, 시대를 이끄는 정신사조등 그 어떤 것도 그에게 실천적 앎으로서 내면에 들어있던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 아무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에 아무런 저항없이 암울한 역사기간에 의기양양 독재에 충성하며 승승장구 하여 왔던 것이다.
이러한 생존양식, 곧 자신이 가진 것이 없으므로 인하여 그 생명이 지속적일 수 있었던 생존양식을 소위 [기생]이라 칭하는 것이 잘 어울릴 것으로 생각 된다..
어떤 네티즌은 그를 일컬어 [회충]이라 표현 하였다.
그의 기생 전력을 살펴 보자
먼저 그는 삼권분립의 엄연한 헌법이 있었고 그 자신 사법부에 몸담은 자 였음에도 불구하고 초법적인 일인독재치하에 자원하여 충성스러이 기생하며 독재의 칼을 스스로 휘둘렀던 자임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낙천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제가 가장 안타까워했던 일은 그 안에 그런 묶음에 이회창씨 같은 사람이 들어갔어야 했다는 거지요. 그 사람 박정희 때 판사 했는데 민족일보사건으로 몇 사람이 사형되었지요. 그때 1심에서 사형 내린 사람이 이회창씨였지요. 지난 전두환 미문화원 방화사건 때 문부식선생한테 사형을 확정시킨게 대법관 이회창씨였지요. 국가적인 테러 행위인 사형을 선고한 사람이 어떻게 한마디 참회도 없을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독재정권 하에서 봉직하고 그 정권을 섬기고 민주인사들을 사형을 내린 사람….”
그는 [독재에 기생]하였던 사람 이었다.
그는 또한 참으로 기가 막히고 어이없게도 민주세력이 개혁의 기치를 올릴 때 개혁의 물결에 기생하였다.
과연 그에겐 개인독재, 군부독재에 대한 신념이나 의지도 없이 그 일인치하의 칼을 충성스러이 휘둘렀던, [속이 빈 사람] 이었다.
민주화와 개혁의 물결이 온 국민의 가슴을 시원케하고 희망찬 미래를 전망할 시기에 아이러니 하게도 민주인사에게 사형을 언도한 장본인이 그 어두운 과거가 감춰진 채 누군가 포장해준 말 같지도 않은 포장용 “단어”를 기치로 정치권에 등장했다.
그리고는 마치 민주개혁에 온 신념을 다 바쳐온 사람인양, 민주개혁의 필요에 가장 적합하게 대응 되는 그야말로 적임자 인것처럼 그는 곳곳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참말로 기가막히게도 [민주화와 개혁에 기생]하였던 사람 이었다.
우리는 그가 민족, 민주인사에게 사형을 선고 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기에 지역과 수구집단의 이기주의에 기생하여 강경하게 재벌개혁, 언론개혁을 저지하는 것을 확인하는 것을 통해 그 당시 [ 민주화와 개혁 ]에 대하여 전혀, 전혀!! 신념이 없었던 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민주화와 개혁]에 기생 하였던 사람 이었다.
그는 [김영삼에게 기생]하였던 사람이었다.
기생이란 단어에 적합하게 그는 힘을 키운뒤 당당하게 외쳤다.
“YS는 당을 떠나라”
그는 [ YS에 기생] 하였던 사람이다.
왜 [기생] 이라 하나? 그 스스로 자신안에 그 어떤 신념적 내용이나 힘을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면서 다른 세력의 힘에 빌붙어 다른 세력의 힘을 자기 것처럼 행사 하기 때문이다.
그는 본래 정치인이 아니면서 [정치에 기생]한 사람 이다.
그의 기생능력은 참으로 뛰어나다.
파워의 역학적 변동을 읽고 징검다리 건너뛰듯 기막히게 이리뛰고 저리뛰면서 파워의 주변에 기생하는 능력이란………………..
그는 [정치에 기생]한 사람 이다.
그는 또한 [한나라당에 기생] 하였던 사람이다.
본래 그는 한나라당의 주류가 아니었다.
그러나 한나라당에 기생하며 힘을 키워 결국 한나라당의 주류를 축출하고 그 정점을 차지한후 자신의 가신들로 그 권력의 중심부를 대체 해 버렸다.
그는 [한나라당에 기생] 한 사람이다.
그는 또한 [영남지역의 지역이기주의에 기생]한 사람이다.
그는 뚜렷하게 영남지역의 지역이기주의에 편승하여 지금의 권력의 유지하고 있다.
노골적으로 대구등 현지에 가서 지역이기주의를 자극 선동하고 자신이 영남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 할 것처럼, 영남에 뼈를 묻을 사람처럼 목청을 높였지만,
정치적 역학구도가 반대로 돌아가면 그는 틀림없이 호남에 가서 호남에 뼈를 묻을 사람처럼
호남의 지역이기주의를 자극하고 선동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고향은 이북이라고도 하고 충청도라고도 한다.(이런 웃기는사람 같으니라구…)
그가 영남지역사람이 분명하게 아님에도 영남지역이익을 대변하는 자처럼 행세하는 것 또한 그의 뛰어난 [기생 능력]이 발휘된 연유이리라.
그가 대구에 가서, 강원도에 가서, 호남에 가서, 충청도에 가서 각종 연고를 이야기하며 지역민심에 아부 하는 것을 보았 잖은가? 과연 그의 중심은 [비어 있는 자]인 것이다
그는 [영남지역의 지역이기주의에 기생]한 사람이다.
다음으로 그가 가장 큰 혜택을 누리면서 소위 “대세론”까지 부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반DJ정서 때문이다.
그는 [ 반 DJ정서에 기생 ]하고 있다.
반DJ정서로 대변되는 영남지역주의, 언론사주를 비롯한 기득권과 재벌들의 개혁에 대한 저항, 중산층들의 민심이반, 구조조정과 관련한 비난여론, 노동자들과 서민층의 피해의식등 이러한 것들로 DJ에 대해 반감을 품은 민심이 대안 없음을 인하여 자연스레 그에게 흘러든 것이다.
이회창이가 집권여당에 몸담을 당시 저질러 놓은 망국사태를, 그 것을 수습하는 것 때문에, 그 수습 하는자에게로부터 민심이 떠나 이회창에게 다시 민심이 쏠린다는 것은 실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어찌됐든 그가 지금 누리고 있는 지지기반은 그 자신의 역량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이 백성의 삶을 위해서 과연 무엇을 하였단 말인가?
그 스스로 주범의 역할을 하므로서 도탄에 빠뜨려버린 민생에 대해, 정부 여당이 그들을 살리기 위한 시책들을 펴고자 할 때, 일관되게 발목잡기로 저지하여 민생을 향한 정치를 차단하므로서, 민생이 질곡에 방치돼 더욱 허덕이도록 조작하고, 이를 집권자의 실기로 몰아부쳐 이반된 민심을 주어 담아온 것외에 무엇이 있었던가.
자신을 포함한 당시 집권자들의 무지의 결과로 수많은 노숙자들이 집단적으로 결핵과 각종 질병에 죽어갈 때 그가 민생법안 통과를 저지시키면서 백성들을 죽음에 방치하던 바를 똑똑히 보았다. 경제 발목잡기는 또 어떠 하였나.
또한 그가 이 나라를 위해 긍정적인 중장기 대안을 제시한 바가 아무것도 없었으며, 그가 또한 이 나라의 현실과 미래에 대해 뛰어나고 혁신적인 정책을 내놓으므로서 뚜렷이 민심을 얻은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모두 아는 바다.
번번히 그는 자신의 정책 제시는 없는 가운데 정부여당의 각종 정책들에 [기생]하여 이를 저지하는 것만을 통해 자신의 인지도를 높여 왔으므로 정부여당의 새로운 정책이 없었다면 그의 인지도 또한 높아질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그는 단순히[반DJ정서에 기생] 하여 현재의 지위를 호화로이 누리고 있는 것에 불과 하다.
그는 반DJ정서의 가장 큰 수혜자이다. 그런점에서 그는 DJ에게 감사 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수구세력에 기생] 하고 있다
재벌개혁에 반대하는 이 나라의 돈을 쥔자들, 조선일보를 비롯한 친일수구집단들,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 색갈론뒤에 숨은 자들, 막강한 어둠의 권력자 언론사주들..….
이전에 그가 스스로 수구를 천명하며, 수구의 대표에 서겠다고 나섰던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시기 그 수구의 자리에 결집되는 힘이 그에겐 너무나 유용한 것이다.
그는 [수구세력에 기생]하여 개혁을 강력히 저지하고 있다.
대략 살펴본 것을 정리하면
그는 [독재에 기생]하였던 사람 이었다
그는 [민주화와 개혁에 기생] 하였던 사람 이었다.
그는 [김영삼에게 기생]하였던 사람이었다.
그는 [정치에 기생]한 사람 이다.
그는 [한나라당에 기생] 한 사람이다.
그는 [영남지역의 지역이기주의에 기생]한 사람이다.
그는 [반 DJ정서에 기생]하고 있다.
그는 [수구세력에 기생] 하고 있다
이회창 그의 존재방식의 본질은 [기생]이다.
이회창 그는 [기생]적 삶이 이땅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잘못된 모범이다.
기생이 가능했던 것은 그 스스로 명백하게 아는 바, 그러므로 진정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바, 따라서 혼신을 바쳐 추구해야 할 바, 그러한 것을 내용으로 하는 그 자신의 것이 그 자신의 내부에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기생적 존재방식의 위험성은 무엇인가?
첫째는 기생의 생태가 결국 그 기생하는 대상의 생명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기생하는 대상에게 해를 주는 것이며, 기생의 역할은 궁극적으로 그 대상을 결국 죽음에 이르도록 이끄는 것이라는 것이다.
둘 째는 그 안에 그 자신의 것으로서의 “내용”이 없다는 것이며
자체에 생명유지의 능력이 없으므로 그 대상이 사라졌을 때 단독으로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첫번째 기생적 존재방식의 위험성은 무엇인가
가장 역겹고 추잡한 기생 정치인이 바로 일본의 후지모리일 것이다. 10여년 철권통치로 수많은 페루백성의 목숨을 빼앗고 검은 자금을 빼돌리며 역사를 후퇴시켜 놓은뒤 어처구니 없게도 제 몸뚱아리만 가지고 일본으로 도망쳐온 패륜인간, 일본놈들의 전형..
기생정치인의 위험성은 얼마안되는 제 몸뚱아리를 위해서 수백,수천만의 백성을 살상하거나 도탄에 빠뜨리고, 역사의 시궁창에 민족전체를 던져버려 지렁이 같은 민족적 불행을 안겨주는 것이다.
예는 얼마든지 있다.
제목구멍 하나에 기름칠하고자 이민족을 학살해온 조선일보 창간인 방모..
제 몸뚱아리 하나 살지우려고 민족상잔을 일으키고 수천만의 귀중한 인명을 아사에 몰아넣은 김일성이 놈
역겨운 권력욕을 만족하려 이 민족과 민족정기를 말살한 이승만…
어디 그 뿐인가. 스탈린, 티토, 아민등등등
그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수천만 인류의 생명과 존엄성을 제 목구멍 하나를 위해 파리 목숨처럼 짖 밟아버렸을 뿐만 아니라 수십년 시간이 흘러도 절대로 복구 할 수 없는 역사적 파괴를 그 민족에게 안겨 줬다는 것이다.
이회창이가 그간 이 민족에게 행해온 반 민족적 행위들을 무조건 감싸주고 그를 밀어주는 지역주의에 빠진 민심의 비이성이 얼마나 편만한지 정말로 암담하게 보이지만 과거 현재는 그렇다 하자
그러나 진정으로 우려되는 것은 이 민족과 백성의 앞날이다.
이회창의 삶을 살펴 보았거니와 그의 삶은 역시 이 민족에 기생한 삶 이었다.
그는 박정희나 전두환을 위해 독재에 충성한 자가 아니었었다. 그렇다고 이 민족을 위한것이었었나? 명백히 아니었다. 그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다.
그가 민족을 위해 개혁에 기생 했었나? 전혀 그런것이 아님이 그전과 그 이후의 삶이 증거하고 있다.
그가 김영삼에게 기생했지만 결국엔 자신의 입지를 위해 그를 과감히 버려버리고 말았다.
그가 한나라당에 기생했지만 결국 자신의 권력을 위해 한나라당의 주축들을 모두 쫒아내 버렸다.
그의 삶의 족적을 볼 때 그는 기생하는 그 대상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한 적이 전혀 없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자신 한사람의 안위와 권력욕이었을 뿐이다.
자신의 안위와 권력욕을 위해 민족주의자와 민주인사에게 사형을 언도 했으며, 자신의 안위와 권력욕을 위해 독재를 버리고 민주개혁에 기생했으며, 자신의 안위와 권력욕을 위해 자신을 키워준 사람들을 과감히 던져버렸고, 자신의 안위와 권력욕을 위해 현재 민주와 개혁의 민족적 당위를 감히 짖밟으려 하고 있는 상황이다.
국민의 70%이상이 지지하는 언론개혁을 당돌히 묵살하는 태도를 보라.
언론을 자신의 권력을 위한 도구 정도로 인식하는 기막힘을 보라
국민은 무지하며, 짖밟아도 되는 동네 개떼들 정도로 인식하는 기막힌 오만함이란…
예상컨대 그가 이 민족을 위해 헌신할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아 보인다.
김일성이가 그랬듯이, 이승만이가 그랬듯이, 조선일보가 지금도 막강권력 신문이듯이 민족을 자해해도 훌륭히 역사위에 군림하고도 남는데 굳이 뭔놈의 헌신인가??
그가 이민족을 위해 헌신할 것이라 기대할 만한 근거를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수 있나?
그가 지금도 그러하고 있는 것처럼, 집권후에도 자기 한사람의 안위와 권력을 위해서 민족전체와 민족역사에 대한 말살을 더 커다랗고 심각하게 행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기생적 존재방식의 첫번째 위험성이라 하겠다.
그런데?? 위에서 열거한 수많은 독재자들을 밀어주고 권력을 만들어준 모든 시다바리들이 과연 그 독재자의 치하에서 자신과 가족의 삶이 역사적으로 행복하였을까? 그들이 원하고 기대하였던 만큼 그리 행복스러웠을까? 민족 전 구성원이 학살과 도탄에 허덕일 때 그들의 삶은 낙원에 사는 것 같았을까? 연구해 볼 만한 일이다…
두번째 기생적 존재방식의 위험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지이다.
그 안에 철학도 안목도 식견도 미래에 대한 혜안도 전혀 갖고 있지 않음으로 인한 역사실패의 가능성이 그 위험성이다.
그 가장 가까운 예가 그 자신과 김영삼 아니었나?
몇 사람의 무지가 온 백성을 기아사태 직전까지 몰고 가고, 역사의 뒷걸음질로 수 많은 세월과 힘과 돈을 파괴된 부분의 복구에 쏟아붓게 만들고……………………………….
이는 또 하나의 심각한 위험성이다.
이회창 이란 사람이 이 땅에 민주화와 개혁의 목소리가 그토록 크게 울릴 것을 짐작하면서 과연 민족, 민주인사들에게 사형을 언도하였을까?
자신이 과연 민주개혁일꾼의 적임자로 발탁될 것을 예견하면서 일인독재에 충성을 다했을까?
오늘날의 자신이 수구의 맹주 역할을 할 것을 내다보면서 김영삼 당시 민주개혁의 물결에 접근 하였을까???
결론은 그가 자신의 앞날도 자신의 선택도, 뿐만 아니라 이 백성의 앞날과 역사의 흐름에 대해 전적으로 무지 했다는 것이다.
그에겐 역시 들어있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기생의 능력뿐……..
위험성은 명백하다
망국의 역사실패가 재현되거나 역사도태의 늪에 던져지는 것이다.
어린아이에게 폭탄을 쥐어주면 어찌 되겠는가?
앞을 볼줄 모르는 봉사에게 타이타닉의 키를 잡게하면 역사의 빠른 격랑과 수천 수만의 빙산들을 어찌 피하며 다른 배들보다 앞서 갈 수 있겠는가?
그에게는 역사와 민족, 민주에 대한 철학이 없다.
앞에서 계속 지적했지만 그에게서 진정한 역사철학적 안목이 표출되는 것을 본적이 없었거니와 그런것들이 있었다고 분명한 사실과 논리로 답변하는 토론자도 본적이 없다.
세계 역사의 소용돌이가 얼마나 빠른가?
우리가 당한 현안들이 얼마나 무수히 산재해 있으며 해결의 실마리가 모두 얼마나 묘연한가?
이회창 그가 지역이기주의 해소 방안이라고 내놓은 어떤 해결안이 있었나?
50여년의 교육문제, 남북관계와 통일의 문제, 부의 재분배 문제, 대일관계, 언론개혁의 문제, 대중관계, 동북아정세, 미국과 유럽과의 관계, 제3세계에 대한 관계, 제3,제4의 기술혁명, 의료문제, 노동문제, 경제회복문제, 미래를 바라보는 국방문제, 교통문제, 문화전쟁문제, 청소년문제, 중소기업문제, 재벌개혁과 구조조정, 환경문제, 식량문제, 우주개발에 대한 대안, 등등등……..………………………………………………
이런 모든 것들이 강대국 및 대륙간 힘의 유기적 변화와 손익계산에 따라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로 갈수록 더욱 빠른 템포로 소용돌이 치는데 어찌 그 [속에 든 것 없는] 사람이 이를 모두 완전하게 파악하고 지휘해 나갈수 있을까?
이것이 [기생적 존재방식의 두번째 위험성] 일 것이다.
[이회창 그는 명백히 민족에 기생해온 정치인이다. 그는 자신의 안위와 권력욕을 위해서 민족과 민족역사를 불행속에 던져넣고도 충분히 남을 인간 이다. 그는 이미 선을 넘고 있다. 언론개혁 문제를 지역대립구도로 남북대치구도로 확전시키므로서 권력에의 집착을 위해서 민족에 자해를 가하는 분별없는 비이성적 행태를 보이더니, 급기야 역사 왜곡에 대한 범민족적 공세의 강도를 무색케하려는 일본 극우의 주장에까지 동조하고 나서므로서 권력획득을 위해서라면 어떤 민족적 절대절명의 문제라 하더라도 주저없이 배신해 버리는 미치광이의 작태를 보이고 있다. 참으로 통분스런 일이다. 그는 그 스스로가 반민족적 존재에 해당함을 극명하게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집권은 짧게 수십년에서 길게는 세기에 걸치는 민족적 불행과 쇠락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이다.]
[ 그러므로 결론은 자명하다. 민족의 지도자로서 찾아야 할 사람은 어느 누가 됐든,
민족에 대한 가슴 깊은 사랑으로 “민족을 위해 헌신” 해 온 사람,
미래 세계의 격동을 읽고 민족사의 방향을 능동적으로 리드해 갈 수 있는
“현 시대와 다가오는 세대 전반에 대한 폭 넓고도 명료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
몇차레 역사가 극단적 국면에 처할 때 권력의 부침에 따라 민족과 백성을 배반한 사람이 아닌,
"일관되게 민족과 민주를 사랑하는 자리를 지켜 온 사람"이어야 한다.
절대적으로 그러한 대안을 찾아야 한다.
이회창은 민족지도자의 자리와는 절대로 무관한 사람이다.]
민족이 침륜에 빠져서는 않된다… 이회창은 最惡의 手다…그야말로 最惡이다.…절대적으로 그는 배제시켜야 한다.
누구든 대안이 필요하다…홍사덕?…김덕룡?.. 박근혜?…노무현?…백기완?…장기표?…김근태?…흐음...===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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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이가 민족을 어디에 던져 버릴 것인지 예상되는 실제적인 예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그리한 후에 그는 이민을 가버리겠지 이승만 처럼……
< 칠레와 한국 그리고 수구언론 (펌)>
피노체트 장군이 1973년 9월11일 반란을 일으켰을 때의 명분은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의 무능과 그로 인한 사회혼란을 더이상 묵과하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아옌데 집권 이후 칠레가 엄청난 혼란에 휩싸였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혼란은 주로 아옌데 대통령의 개혁정책에 반발하는, 혹은 정권 자체에 극도의 혐오감을 지닌 수구 기득권 세력이 야기한 것이었으며 그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다.
칠레의 극우세력은 아옌데가 70년 9월 대통령 선거에서 36.3%의 최다득표를 했을 때부터 조직적인 저항에 들어갔다. 불안심리 조작에 의한 주가폭락, 금융기관에서의 거액자금 이탈, 사기업체 소유주들의 파업소동, 생활필수품의 매점매석, 상품과 달러에 대한 투기조장 등이 이들이 동원한 주무기였다.
그럼에도 아옌데는 11월3일 의회투표에서 최종 승리함으로써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그가 칠레의 사회적 부조리를 근절시키기 위해 내건 40개 조항 중에는 모든 천연자원을 국유화하겠다는 것, 어린이들에게 매일 0.5ℓ의 우유를 무료급식하겠다는 것, 의료혜택과 교육을 무상으로 공급하겠다는 것, 쿠바와의 외교관계를 재개하는 등 독자적인 외교정책을 갖겠다는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같은 정책은 국민 대다수의 절대적 지지를 받은 반면 다국적 기업, 지주, 독점사업가, 고위관료, 의사, 사학재단 운영자 등에게는 악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아옌데의 집권=혼란’이라는 등식을 하루 빨리 증명해냄으로써 군부를 불러들여야만 했다. 그 하수인은 그때 그 나라에서도 역시 수구언론의 몫이었다.
반대세력은 여전히 대중매체들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아옌데 정권이 보장한 언론자유는 이들이 여론조작을 위해 사실을 왜곡할 뿐 아니라 거짓말과 유언비어를 조작해서 사회불안을 야기하고 집권측 인사에 대해 무제한의 인신공격을 할 수 있는 자유에 불과했다. 아옌데 지지자들은 반대세력들이 날조된 허위정보를 통해 정부의 의도나 현실상황을 왜곡해석함으로써 폭력을 부추기고 시민적인 저항을 유발시키려고 애쓰고 있는데 대해 걱정하면서 실의에 빠져 있었을 뿐 이들이 자기들이 탄압받고 있으며 칠레의 언론자유는 위기에 처해 있다고 국제적으로 선전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칠레 국민은) 바야흐로 거리에서의 폭력과 테러, 그리고 혼란과 증오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한 총력전의 전야에 놓여 있었으며 거기에는 보수 언론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조안 하라 저, ‘끝나지 않은 노래’ 237쪽, 한길사 간)
책을 덮는다. 깊은 슬픔이 밀려든다. 나는 왜 지금 이 먼 한국땅에서 30년 전의 칠레를 읽으며 슬픔을 느끼는가. 그리고 왜 분노하는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망정 상황의 본질이 같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아직까지는 그때의 칠레처럼 계층간 결정적인 균열의 단계에 이른 것 같지는 않다. 애초부터 아옌데식의 ‘국유화’는커녕 신자유주의의 허상을 붙든 채 개혁 주체세력의 대오가 흐트러졌던 마당에 수구세력들의 반응은 “한번 두고 보자”는 눈흘김 이상의 것일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그 다음은 어떤가. 교육개혁은 교원단체와 사학재단의 반발로 변죽만 울린 셈이 됐고, 의료개혁은 의·약사들의 저항으로 결국 그들의 배만 불린 채 국민의 더 큰 부담으로 돌아왔으며, 북한을 향했던 햇볕은 부시정권의 으름장 한마디에 그냥 얼어 붙었다. 보라, 어제 그제는 재계가 일제히 들고 일어나 규제완화를 소리높이 외쳐대고 집권당 일각에서마저 ‘개혁피로증’ 운운하며 이제까지 그나마 비틀대며 굴러오던 개혁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 하지 않는가. 사회가 요동칠 때마다 기득권층을 부추기고 미국에 박수치며 해괴한 논법과 독한 언설로 정부비판에 핏대를 세웠던 수구언론들은 이제 무책임하고도 선동적인 논객들까지 총동원해 노골적으로 ‘정권타도’를 외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저들의 위세 앞에 우매한 군중들은 이제 눈이 멀어 버렸고 개혁의 지지자들은 숨도 못 쉴 지경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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