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세상
제목 가정파탄자행한 수원지검 정점식공안검사를 규탄한다!!
번호 1353 분류   조회/추천 1154  /  1
글쓴이 건수형후배    
작성일 2001년 09월 05일 18시 26분 08초
9월 9일 결혼식을 앞두고 지난 8월 30일 경기보수대에 의해 연행된 김건수
의 약혼자의 글입니다.
이글을 읽고 담당검사에게 항의 전화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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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점식 검사 수원지검 564호 031)210-4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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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구한 인연

이 땅에서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게
이렇게 어렵고 힘든 건 줄 몰랐습니다.

저는 올해 나이 31세로 결혼할 나이가 꽉 찬 미혼여성 홍은주라고 합니다.
제가 방송프로에 이렇게 어디에도 하소연할 곳 없는 억울한 일을 호소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온 몸에 고통과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정말이지 사지가 갈기갈기 찟기는 아픔으로 펜을 들었습니다.

2001년 9월 9일 일요일 오후 1시 30분!
이 날짜는 스물아홉 뒤늦게 연애를 시작하여 이제 막 새로운 가정을 꾸미려는 우리에게는 너무너무 설레이고 희망에 차며 손꼽아 기다리던 날입니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시지...
결혼을 불과 열흘 앞둔 지난 8월 30일 오후 2시경, 결혼 후 살 신혼집을 나서던 저의 예비신랑이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습니다.
그것도 '보안수사대'라는 무시무시한 곳에서 나온 사복 형사들에게...
보안수사대라는 곳이 정확히 무엇을 하는 정부기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인터넷을 검색해 본 결과 , 인권탄압 시비를 받고 있는 국가정보원, 공안대책협의회와 같은 공안기구라고 합니다. 간첩과 관련된 무시무시한 사건들로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가 여론을 들끓게 색깔논쟁을 일으키곤 이내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 무죄판결을 받거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는 사례가 00%나 되는 정말이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하여 국민들의 혈세를 낭비하는 곳이지요...
저의 예비 신랑이 끌려갈 당시 상황은 20여 년 전 남편을 여의고 힘들게 시골에서 농사일을 하시며 9남매를 키워오신, 올해로 일흔 셋이신 시어머니가 계신 신혼집 앞에서 였습니다.
결혼 준비로 한참 분주하던 저와 저의 예비신랑은 어머니와 함께 점심을 먹고 집을 나서던 중이었습니다. 저의 예비신랑이 운전을 하고 저는 옆 좌석에 앉아 그 날할 일을 체크하고 있었지요. 차가 아파트를 채 빠져나가기도 전에 누군가 젊은 사람 몇몇이 차 앞을 가로 막았습니다. 그 다음 차 문이 열려지고 무조건 저의 예비신랑의 팔목을 잡으며 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저는 대 낮에 술먹고 술주정하는 정신나간 사람인 줄 알고 왜 이러냐고 거세게 항의하였지요.
조금 후 저의 예비 신랑의 이름을 대며 국가보안법 혐의로 체포한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가슴이 덜컹 내려앉고 온 몸이 땅으로 꺼져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무시무시한 국가 보안법이라니...

여기서 저와 저의 예비신랑이 만난 이야기를 드려야겠군요.
저는 경원전문대학 92학번으로 2년 늦게 학교를 들어갔고 열심히 과대표 생활등 학생회, 동아리 활동을 하며 대학생활을 하였습니다. 전문대학의 2년이라는 짧은 대학생활에서 이것저것 많은 경험을 하며 열심히 대학생활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 선배로부터 5.18 광주민주화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접했고 그렇게 말도 안되는 일이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사실이라는 것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분명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그럴 리가... 고등학교 시절 분명 5.18은 북에서 내려온 간첩들이 일부 불순분자들과 협력하여 일으킨 폭동이라고 배웠는데...'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광주 시민들을 그것도 국민들을 보호해야할 군대까지 나서서 아무런 무기도 갖고 있지 못한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한 실탄으로 총격을 가하고 대검으로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여학생의 젖가슴을 도려내는...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도 상식적으로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이상한 이야기로 밖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때부터 내가 살아가는 이 땅의 현실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역사책도 보게 되고, 이곳저곳 쫓아다니며 우리나라의 현실에 대해 하나, 둘 눈을 떠가면서 소위 '운동권'이 됐었지요.
저의 예비신랑은 그 때 만난 사람입니다. 물론 그 때부터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서로 오고가며 얼굴정도 아는 사이였지요. 그러던 중 저는 졸업을 하게 되었고 대학 시절 한 때 정의와 양심을 외치면 분노하다가 졸업 후 평범하게 직장생활하며 생활에 안주했던 아주 평범한 소시민이었지요.
그러던 중 저의 예비신랑을 다시 만난 것을 98년 수원 구치소 안에서였습니다.
대학부터 잘 알고 친하게 지내던 선배가 구치소에 있다는 소식을 접해서 면회를 갔는데 검찰 조사를 받으러 가서 면회가 안되더군요.
당시 성남에 살던 저는 모르는 길 물어, 물어 찾아왔는데 너무도 허탈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구치소에 있는 수감자 명단을 확인하게 되었고 면회를 하게 되었지요.
힘든 직장생활로 실의에 빠져있던 저에게 오히려 밝고 환한 모습으로 위로해 주더군요.
그 후, 우리는 편지도 주고받게 되고 가끔 면회도 가게 되었지요.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다른 어떤 이성적 감정은 없었습니다. 단지 참 나와는 다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 어떻게 그 갇혀진 공간 안에 있으면서도 사람 좋은 웃음을 하며 오히려 상대를 생각하면 걱정해 줄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걸까하는 참 좋은 사람이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였으니까요.
그러던 중 두어 달이 지났을까, 저의 예비신랑은 구치소를 나오게 되었고 특별한 사이가 아니였기에 연락처도 모르고 그냥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었지요...
6개월이 지나 우연히 갔던 행사에서 저의 예비신랑이 제가 앉아있던 쪽으로 인사를 하려 왔더군요. 그래서 명함을 주게 되었고, 두어 달이 지난 어느 날 직장 근처라며 전화가 왔더군요. 그 때 저는 왠지 모를 가슴 설레임을 안고 저의 예비신랑을 만나게 되었고 그 후 스물아홉 뒤 늦은 나이에 연애라는 것을 시작하게 되었지요.
너무도 편안한 사람, 항상 어느 순간에서라도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 너무도 겸손한 사람...제 이상형은 아니었지만 사랑은 이렇게 예고없이 찾아오나 봅니다.
그렇게 연애하기를 2년, 저희는 양가 부모님께 일찍이 인사를 들었고 서로 집안을 오가며 결혼을 이야기하게 되었지요. 늦게 시작한 연애라 더욱 서로에 대해 애틋함이 있었고 그렇기에 돌아오는 저희 둘의 새 출발의 장인 9월 9일 결혼식은 저희와 저희 가족들에게는 너무도 기대와 희망에 찬 날이었습니다. 잠깐 저희 시어머니 이야기를 들이면 저희 시어머님 되실 분은 경남 밀양에서 20여년 전 남편을 잃고 평생을 농사일을 하시면 힘들게 9남매를 키워내신 너무도 자랑스런 어머니이십니다. 어머니께서는 경남 마산의 아드님 집에서 함께 사시다가 IMF로 직장을 잃은 아들에게 짐이 될까봐 서울 중계동의 조카분 집으로 올라오셨습니다. 저에게는 시숙님이 되시지요.
시숙님 댁은 공사현장을 찾아다니며 노상에서 밥장사를 하며 생활하시는 허름한 임대아파트 열 여덟 평에 세 식구가 모여 사시는 그리 넉넉지 못한 가정이었지요. 그러나 친지들간에 우애도 좋고 또 밥장사라 집안 일도 많은 터라 어머님은 시숙님 댁에 머무시게 되셨지요. 왜 부담이 없었겠습니까...? 칠순이 넘으신 어머니께서 그것도 평생을 농사일을 하셔서 관절로 약을 드시지 않으면 제대로 거동도 불편하신 몸으로 일이 많으실 때는 하루 매상 70만원에서 100만원 정도의 300인분 남짓한 장사준비를 칠순이 넘으신, 그것이 몸도 성치 않으신 몸으로 혼자 하셨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래서 가끔 어머님 뵈러 저의 시숙님 댁에 갈 때면 저의 예비신랑과 저는 이내 팔을 걷어부치며 어머님의 일을 도와드렸지요. 자주 찾아뵙고 도와드려야 하는데 저의 집과 거리도 멀고 좁은 방 두 칸의 낡은 임대아파트에 직장 끝나고 저녁 때 쯤 가는 것이 아무래도 눈치가 보이더군요. 그래서 자주 찾아 뵙고 도와드리지도 못했습니다.
가끔 어머님 뵈러 가보면 더운 여름엔 큰 포대로 두 포대나 되는 나물을 땀을 비오듯 쏟으시면서 불편하신 다리를 씽크대에 두 손으로 기대고서 삶아내시고 김치도 하루가 멀다하고 큰 다라로 두다라 정도 담으시는 등 정말이지 몸 성한 사람이라도 하루에 해내기 힘든 일을 그것도 올해로 일흔 셋이신 저희 시어머님께선 해내시는 일이십니다. 그래도 어머님은 일이 많은 것이 좋다고 하십니다. 노상에서 하시는 밥장사라 항상 일을 나가는 것이 아니라 공사현장에 대한 정보를 알아본 후 가서 답사를 하고 들어갈 조건이 되면 일을 나가신다고 하십니다. 일이 없이 좁은 집에 어머니까지 네 식구가 모여 앉아있을 때는 이 좁은 집에 얹혀서
피해를 주며 '우리 막내이(저의 예비신랑이 9남매 중 막냅니다) 대학 학비만 아니면...' 하시며 눈시울을 적시셨다고 하십니다. 어머니께서는 노인도 일을 해야 건강하다고 저희의 아픈 마음을 위로해 주셨지만 시숙님 댁에서 어머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이면 가슴이 송곳으로 찌르듯 아려왔습니다.
그러던 지난 봄, 저희는 결혼 날짜를 잡게되었고 막내아들인 저희 예비신랑을 시골에서 농사짓기에 바빠서 이쁜 지도 모르고 저의 예비신랑의 고등학교 진학으로 시골을 나와 읍내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하게 되어 정도 못 주고 사신 게 입버릇처럼 한이셨습니다.
'이 에미는 이제 살 날 얼마 안 남았으니 젊은 장인, 장모한테 에미에게 못 받은 사랑 듬뿍받으라고 하시며...'
저의 예비신랑과 저는 어머님을 모시고 함께 살기로 하고 어머니는 시골에 남겨 놓으셨던 마지막 논, 밭을 파셔서 수원시 영통의 조그만 아파트에 융자를 몇 천 보테서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다려졌던 결혼이고 입주였겠습니까?
8월 초에 입주를 위한 준비를 하며 우리 가족들은 어머님과 함께할 보금자리를 쓸고 닦으며 얼마나 기대와 희망에 차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채 2주도 안되어 우리의 밝았던 미래에 대한 설레임과 기대, 희망은 무참히 짓밟혔습니다.
그것도 무시무시한 국가보안법이라는 것으로 인하여...
금강산 관광 및 남북경제협력사업으로 많은 사람들이 북한을 오가고 있고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이산가족의 눈물어린 상봉 등으로 화해와 평화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보안법상의 적을 이롭게 하는 행위하라는 것을, 그것도 3년 전의 학창시절 했었다는 이유하나만으로 불과 결혼을 열흘 앞두고 잡아갈 이유가 되는 겁니까...? 오빠는 어머님의 피눈물나는 뒷바라지 끝에 11년만인 올해 8월 22일 드디어 학사모도 쓰고 양가 가족들의 축하 속에 졸업을 하였고 결혼 준비와 결혼 후 다닐 직장 준비로 하루 한시간을 바쁘게 지내고 있던 때였습니다.
검찰청 산하 보안수사대라는 곳에서 주장하는 오빠의 죄라는 것이 김대중 대통령도 개폐를 이야기하셨던 국가보안법의 이적단체 가입 등의 죄입니다.
그러면서 온갖 회유와 협박을 하며 함께 활동했던 사람이 누군 누군지 실명을 거론하며 다 알고 있고 증거자료도 있고 하니 결혼도 열흘 앞둔 마당에 단 한사람만이라도 '예'라고 동의해 주면 당장이라도 불구속으로 내보내주어 결혼에 차질이 없게 해주겠다는 겁니다. 얼마나 기가 막힐 노릇입니까...? 칠순이 넘으신 어머님께서도 "이 나이 먹고 무식한 늙은이가 생각해 봐도 나 살자고 어떻게 이제 다 안정된 직장에 사회 생활을 하며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같은 고통과 상처를 줄 수 있겠냐, 나같은 늙은이도 예라고 대답못하겠다, 결혼을 못하게 되면 어찌하노" 하시면 통곡을 하셨습니다.
저의 예비신랑이 96년 경희 대학교 수원캠퍼스 총학생회장을 했었는데 그 당시 구속되어 1년 6개월을 형을 살고 만기 출소한 바 있습니다. 1년 6개월의 짧지 않은 옥살이 기간동안에도 아들이 그런 곳에 들어가 있는 것은 못 보겠다고 그 애지중지 귀한 막내아들의 면회를 단 한번도 가지 않으셨던 당당하고 의연하신 어머니이십니다. 저의 예비 신랑이 연행될 당시에도 "너한테 미안해서 어이하노? 니가 밥도 많이 묵고 힘내야 한대이..." 하시며 오히려 힘을 주셨던 어머님이 제 앞에서 통곡을 하셨습니다. 이런 불효가 어디있습니까?
아프신 몸으로 11년간 대학 공부시켜서 이제 겨우 자리잡고 행복하게 살아보려고 하는 소박한 저희 가정의 꿈을 송두리째 짓밟을 만큼 잘못일 도대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80대 20의 사회에서 저희처럼 힘없고 빽 없는 서민들이 80을 차지하는 사회현실에 아파하고 분노하여 계란으로 바위라도 쳐보겠다는 그런 사람들도 있어야 이 사회가 올바르게 발전할 수 있다며 자기 개인의 행복을 포기하며 희생하며 살았던 것이 이렇게 큰 상처와 고통을 가족들이 겪어야 하는지 누가 좀 말씀해 주십시요...

저의 예비신랑은 항상 사람 좋은 넉넉한 웃음에 남에게 손톱만큼의 피해도 주기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결혼할 집을 구할 때에도 부동산 여러 군데 돌아다니면 헛수고하시는 분들이 그만큼 많아진다고 두 군데 가보고 결정하자는 항상 어떤 상황에서도 나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세상에 둘도 없는 선량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분통이 터지는 일은 인륜지대사라는 결혼을, 그것도 불과 열흘 앞두고 연행을 하고 구속을 시키다니...
체포영장은 작년 말 에 발부되어 올해 초부터 저의 예비신랑을 잡으려고 했답니다.
마음만 먹었으면 얼마든지 잡아갈 수 있었을 텐데...학교 기숙사에 정식으로 보증금도 내고 생활하고 있을 때는 뭘하고 이제 와서 결혼 날짜잡고 청첩장까지 다 돌려 주위의 가족, 친지, 친구들까지 다 초대해 놓았는데...
결혼을 미끼로 저의 예비신랑을 설득하려 하였다면 잘못 판단하신 걸겁니다. 비록 결혼식을 못하게 되는 최악의 상황이 닥치더라도 자신을 위해 남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는 일을 절대로 할 사람이 아님을 너무도 잘 알기에...

답답한 마음에 두서없이 이렇게 글을 써봅니다.
한 검사의 무리한 구속영장 신청과 그것이 받아들여져 이루말 할 수 없는 고통과 상처로 가정파탄의 지경에 이른 사법부의 비인도적이고 반인륜적인 판단에 다시 한번 간곡히 간곡히 호소합니다. 목요일 있을 구속적부심 신청에서 제발 저의 예비신랑을 석방시켜 주십시오!
만의 하나 죄가 있다하더라도 결혼을 앞 둔 마당에 도주의 우려도 없고 신원보증을 확실하게 설 수 있는 상황에서 꼭 구속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만약 저의 예비신랑이 절대로 그럴 리 없겠지만 도주한다면 저의 신랑이 올 때까지 제가 대신 잡혀있겠습니다. 남의 아픔과 고통을 자신의 것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선량한 저의 예비신랑이 하물며 저를 볼모로 하고 죽을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단지 양심과 의리를 지킨다는 이유만으로 구속된 상황에서 절대로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하여 판단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돌아오는 일요일 9월 9일 오후 1시 30분 경희대학교 수원캠퍼스에서 저의 예비신랑과 저는 예정했던 대로 결혼식을 치룰 예정입니다.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에 난 저의 예비신랑의 기사를 보고 고시생이라고 밝히신 분의 의견을 끝으로 저의 두서없는 글을 마칠까합니다.

'담당검사의 고충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번 건은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결혼식 끝나고 신혼여행 다녀온 다음에 집행하든지
청첩장 돌리기 전에 집어넣든지 해야했다.

학창시절 학생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한 것, 그리고 활동하는 것은 한국에 현실에서 큰 상 받을 일도 그렇다고 벌 받을 일도 아니다.
그런 사유로 결혼을 직전에 둔 예비 신랑을 잡아간다는 것은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이다.

법도 사람이 만들었고 사람이 다루는 것인 만큼
법정신도 사람의 이성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보내라. 죽을죄 지은 것두 아닌데 결혼 일주일 남긴 신랑을 잡아 가둔 데서야 어찌 이 나라가 법 정신이 살아 있다고 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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