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퀘벡 “붉은 광장” 학생시위 이야기

[해외] 퀘벡을 뒤흔든 등록금 투쟁은 어떻게 전개됐나

[편집자 주]2012년 캐나다 퀘벡의 등록금 인상 반대 학생시위는 퀘벡 주 전역을 요동쳤다. 학생들은 민주적인 논의 체계를 기반으로 수십만명이 참여하는 동맹휴업과 거리시위 및 주요 거점 점거를 벌여왔으며 이들의 시위는 사회운동과의 포괄적인 연대, 좌파운동의 활성화와 사회 정치화로 이어졌다. 이러한 퀘벡 학생시위의 맥락과 과정을 소개한 <새로운 사회주의 웹진> 편집장 데이비드 캠필드의 기고는 높은 등록금으로 고통당하는 한국의 현실에서 학생운동 및 사회운동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12년 퀘벡은 1970년대 이래 캐나다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운동에 의해 뒤흔들렸다. 퀘백 대학들과 CEGEP(대부분의 청년들이 고등학교 졸업 후 다니는 전문대학) 학생들의 대학 등록금 인상 반대 동맹휴업은 퀘벡 자유당(Quebec Liberal Party, QLP) 정부에 맞선 대중 운동이 됐다.

퀘벡 사회의 대학

이 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선 퀘벡 사회 내 대학의 위치를 조망해볼 필요가 있다. 캐나다 헌법에 따라 교육제도는 지역 정부가 책임진다. 1960년대 전에는 퀘벡에서 소수만이 대학에 다녔다. 대학교육은 영어를 사용하는 소수에게 보다 보편적이었으며 인구의 다수인 프랑스어 사용자는 극히 일부만 대학에 다녔다. 당시 퀘벡 자본가 계급은 주로 영어를 사용했고 이들의 대학은 보다 잘 지원됐다.

1960년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중간계급은 “조용한 혁명”으로 잘 알려진 퀘벡 사회의 현대화에 나섰다. 이에 따라 등록금이 낮은 새로운 프랑스어 대학을 포함해 대중적인 교육 제도가 건설됐다. 이러한 개혁은 높은 수준의 노동계급 투쟁이 벌어지기도 한 이 지역에서의 자결권을 위한 열망과도 연결돼 있었다.

고등교육 참여자는 1960년대에 급속하게 성장했다. 당시 다른 많은 나라에서처럼 퀘벡에서도 학생운동이 활발하게 나타났다. 1968, 1974, 1978, 1986년 동맹휴업을 포함한 학생 활동주의 덕분에 1968년과 1990년 사이 등록금은 동결된 채 남아 있었다. 1990년에 정부는 학비를 높이는 데 성공하지만 1996년 되살아난 학생운동은 이를 다시 취소시켰다(외국 학생 및 학비 외 요금은 증대됐지만). 2005년 1억 달러 이상의 학생보조금을 대부로 전환하려는 시도도 학생들의 투쟁에 의해 부분적으로 취소됐다.

2011년 3월, 퀘벡 자유당 정부는 긴축조치의 일환으로 2012년부터 5년 동안 등록금 75% 인상안을 발표했다. 등록금 인상 계획은 공공서비스를 위한 신규 요금 도입 및 추가 인상을 통해 신자유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시도였다. 퀘벡에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상식”으로, 특히 노동자계급에게, 인정되지 않는다. 재무장관의 표현에 의하면 차레스트(Jean Charest, 퀘벡 주지사) 정부는 “문화적 혁명”을 수행한다는 입장이다. 이는 진보적인 조세를 기반으로 재정 지원되는 공공서비스에 대한 접근권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을 “사용자 지불” 원칙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학생운동 구성원은 대폭적인 등록금 인상에 관한 소문이 제기된 후 이에 대한 대응을 준비해 왔으며 정부 발표 후 행동에 나섰다.

학생 운동

퀘벡 학생사회에는 단체 총회를 통한 매우 민주적이며 참여적인 방식으로 조직을 운영하는 수 십 년간의 오래된 학생 전통이 있다. 지역 단체들은 퀘벡 주 차원의 4개의 연합을 선택할 수 있다. 2001년 설립된 ASSE(pour une Solidarité Syndicale Étudiante) 연합은 보다 전투적이며 민주적인 좌파 학생 조합주의를 촉진해 왔다. 2011년 12월 ASSE는 가입하지 않은 학생 단체도 ASSE의 기반과 민주적 방식에 동의할 경우 참여할 수 있는 CLASSE라는 거대 연합을 형성한다. CLASSE는 의도적으로 학생 파업을 위해 설계됐고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그것은 현재 10만 명 구성원이 참여하는 65개의 단체로 구성돼 있다.

[출처: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22_juillet_berri.jpg]

학생 단체들은 동맹휴업을 벌일 것인지에 대한 토론을 위해 총회를 시작했다. 동맹휴업은 2월 13일 시작됐고 곧 퀘벡의 대학과 CEGEP들로 확산됐다. 동맹휴업은 퀘벡에서 가장 큰 도시인 몬트리올에서 가장 강력하게 벌어졌고 주도인 퀘벡시에서는 보다 약하게 진행됐다.

시위의 가장 공통된 형태는 수업 거부와 사람들이 건물이나 강의실로 들어가지 않도록 피켓 시위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3월에 CLASSE는 캠퍼스 투쟁을 단행하는 “시위-행동(manif-actions)”을 이끄는 한편 정부청사, 법원, 은행건물, 교량 및 다른 전략 지점들을 봉쇄하며 경제와 주를 교란하는 운동으로 나아갔다.

학생들은 또한 알마(Alma) 지역의 직장 폐쇄된 리오 틴토 알류미늄 제련소 노동자를 위한 지지 행진을 벌였고 긴축 조치에 투쟁하는 다른 조직들과 연대했으며 선주민과 환경주의자들이 반대하는 정부의 퀘벡 북부 개발 계획에 함께 저항했다. 운동에 대한 예술 개입과 다른 문화적 표현은 동맹휴업을 대중적으로 키워갔다. 이 운동의 상징인 (인상된 학비가 학생들을 “붉은 지대로 곧바로” 밀어 넣었다는 이유로 2005년 처음 사용됐던) 붉은 광장은 수만 명의 사람들로 가득 찼고 거리와 온라인에서도 가시화됐다.

3월 22일 동맹휴업 참여자의 수는 정점에 달해 약 30에서 40만 명에 달했다. 3월 22일은 1968년 프랑스에서 학생과 노동계급의 대중 시위가 일어났던 5월 22일의 운동을 주목하도록 의식적으로 선택된 날이다. 이날 약 20만 명이 몬트리올에서 시위를 벌였다(퀘벡 인구는 약 800만이다). 이는 운동을 보다 높은 수준으로 전개시켜 보다 많은 학생들이 동맹휴업 시위를 지속하도록 했다. 몇몇 단체들이 무제한적인 동맹휴업에 표를 던졌지만 학생들은 일반적으로 동맹휴업 지속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주말마다 만났다. 동맹휴업에 대한 지지는 영어 보다는 프랑스어를 쓰는 이들 사이에서 훨씬 강하게 유지됐다. 인종차별을 겪은 사람들은 이 운동에서의 인종주의 반대 교육과 행동 강화의 필요성 강조를 통해 적게 드러났다.

4월 14일 학생들은 “퀘벡의 봄을 위해”라는 슬로건 아래 차레스트 정부와 극보수주의 정당의 연방정부에 맞선 시위를 진행했고 이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후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은 공동으로 퀘벡과 연방정부 그리고 주요 기업의 생태 파괴적인 조치에 분노하여 4월 22일 지구의 날 시위를 벌였고 이때 반신자유주의적 행동에 대한 사회운동과 학생운동의 연대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퀘벡 학생운동이 흔들리는 조짐을 보이지 않자 퀘벡 정부는 운동을 분열시키기 위해 학생 조직과의 대화 테이블에서 CLASSE를 제외시켰다. 그러나 다른 연맹의 지도부는 2005년과는 다르게 공동의 전선을 유지하고 정부와의 협상에서 탈퇴했다. 2005년에 이들은 동맹휴업 운동에 적극적이었던 그룹이 거부한 정부와의 합의에 동의한 바 있다. 차레스트는 이후 애초 계획했던 학비 인상 기간을 5년에서 7년으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학생들은 이를 심한 모욕으로 받아들였고 이에 따라 매일 저녁 몬트리올에서 시위 행진이 일어났다.

5월 4일 경찰은 빅토리아빌딩(Victoriaville)의 작은 도시에서 진행된 자유당 회의 밖에 벌어진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이 같은 경찰의 탄압이 벌어진 다음 날 퀘벡 3개 노동조합연맹의 고위 관계자의 주선에 의해 파업을 종료한다는 잠정적인 계획이 발표됐다. 그러나 학생들은 표결로 이 협상안을 거부했다.

학생들을 버릇없는 자식으로 묘사하고 대단치 않은 양보안을 제공하며 운동을 해산하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차레스트는 억압적으로 돌변했다. 정부는 특별법인 78조(이제는 12조)를 밀어부쳤다. 이 법은 대학과 CEGEP 근처에서 시위를 금지하며 사전에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 집회를 불법화하고 8월 중순 수업의 재개를 명하며 새로운 법에 저촉하는 개인이나 단체에 무거운 벌금을 부과했다. 이후 지방자치정부는 구속적인 규약을 내놓았다.

운동의 확장

이것은 전환점이었다. 78조는 운동을 억제하는 대신 변화를 위한 방아쇠가 됐다. 이전에는 소수만이 학생시위를 지지했지만 지지가 대중화되며 이후 자유당 정부에 대한 폭넓은 사회 운동으로 확산됐다. 부패하고 거대 기업에 굴종적으로 이미 보여졌던 자유당의 시민의 자유와 학생운동에 대한 공격은 많은 사람들이 행동에 나서도록 자극했다. 100번째 동맹휴업이 벌어진 5월 22일 시위는 퀘벡주 전체에서 개최됐다. 약 25만 명이 비를 맞으며 몬트리올에서 행진했다. (주전자와 남비를 탕탕치며 진행한) “캐서롤” 시위가 밤중까지 몬트리올과 퀘벡시 이웃 도시에서도 벌어졌다. 일부 지역에서는 대중적인 총회가 진행됐다. 경찰은 대량 체포하고 나섰으나 이는 저항과 연대에 대해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학생과 사회 활동가들 일부가 정부에 맞선 “사회적 파업”을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때까지 학생들에 대한 노조의 지지는 주로 자금을 지원하거나 시위에 참여하는 것에 제한됐다(캐나다 노동법은 정치적 파업을 포함해 파업을 엄격하게 제한한다). 그러나 78조 이후 연대 행동에 대한 토론이 노동조합 활동가들 사이에서 확산된다. 전국노동조합연맹의 수많은 가입 조합들은 고위 관료들을 놀래키며 일일 파업시위를 결정한다. 불행히도 노동계 좌파는 합의를 실행으로 이행하기에는 너무 약하다.

학생들의 아르바이트가 증가하고 학생운동 조직률이 낮아지는 여름이 왔지만 6월 22일과 7월 22일 시위는 여전히 매우 큰 규모로 진행됐다. CLASSE는 투쟁과 “우리의 미래를 함께 하자(Nous sommes avenir)”는 의미의 사회적 파업을 제안하는 급진적 선언에 대한 토론을 위해 퀘벡을 가로지르는 행사들을 조직했다.

새로운 단계로의 진입

운동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78조는 8월 13일부터 17일 동안 많은 CEGEP에 수업 재개를 명령한다. 하지만 활동가 일부는 운동에 대한 법적 제재의 무게를 최소화하기 위해 공식 학생 단체 구조와는 독립적으로 수업 복귀 봉쇄 운동을 조직하고 있다.

차레스트는 9월 4일 선거를 제안했다. 그는 낮은 투표율과 자유당 반대 그룹의 분열을 기대하며 재선을 전망하고 있다. 자유당은 빈곤 퇴치 및 학생과 노동자의 권리 방어라는 말로 자신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가리고 있는 국가주의 정당인 PQ, 새로운 억압적 신자유주의 정당인 퀘벡에머닐연합(the Coalition Avenir Quebec), 퀘벡 독립 지지와 신자유주의 개혁 반대 기반인 퀘벡연대(Quebec Solidaire)에 맞서고 있다.

선거는 “붉은 광장” 운동에 대한 도전이다. 지배계급 전략가들은 의심할 것 없이 선거가 문제를 합법적으로 해결된 것처럼 보이게 하고 CLASSE와 그의 동맹을 결정적으로 주변화시키며 결국 운동을 진압할 것이라고 바라고 있다.

PQ는 학생들에게 휴전을 요구하고 있고 그들이 선거에서 이긴다면 대학 기금에 대한 회담을 약속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PQ를 지지하는 2개의 다른 학생 연맹은 학생들에게 투표를 제안한 반면 CLASSE는 운동 건설을 위한 노력을 진척시키고 있고 강요된 수업 복귀에 관한 준비를 하고 있다. CLASSE 계열 학생 단체들은 8월 7일 시작한 총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CLASSE 회의는 오는 11일부터 12일까지 진행된다.

퀘벡 좌파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퀘벡 좌파는 QS(사회민주주의자부터 혁명적 사회주의자들까지의 세력이 함께 하고 있다), 아나키스트와 여전히 PQ와 단절하지 않은 사회민주주의자들로 구성된다. 많은 아나키스트들은 학생으로서 그리고 사회 활동가로서 운동을 건설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QS는 우선적으로는 의회 정치를 지향한다.

QS는 학생 동맹휴업을 많은 방법으로 지원했으며 많은 수의 구성원들이 활동가로서 운동을 건설했다. 그러나 QS 스스로는 학생 사이에서의 투쟁을 진척시키는데 대한 조직된 세력으로서는 활동하지 않았다. 이 운동은 개혁을 성취하고 궁극적으로는 사회를 변화시키며 반격의 열쇠로서 거리와 작업장에서의 대중적 직접 행동을 다루는 반자본주의 정책을 위한 QS에 지지를 강화하는 새로운 기회들을 만들어왔다. 그러나 QS의 좌파가 이를 함께 할 수 있을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투쟁의 다음 단계가 어떻게 발생하든 많은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놀라운 운동은 캐나다에서는 전례가 없던 방법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질문에 대해 퀘벡 사회를 정치화시켰다. 이는 특히 젊은 이들 등 대중운동과 민주적인 자기 조직을 통한 많은 다양한 경험들을 얻은 많은 사람들을 깨닫게 했다.

일부는 이 운동을 부르는 것처럼 “메이플의 봄”에 의해 형성된 활동가들은 좌파의 미래에 중요할 것이다. 이 운동은 또한 캐나다 활동가에게 영감과 함께 어떻게 보다 효과적으로 투쟁할 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원문]http://www.zcommunications.org/quebecs-red-square-movement-the-story-so-far-by-david-camfield(필자는 이 글이 애초 프랑스 반자본주의신당 기관지에 기고된 글의 확장 개정본이라고 밝히고 있다)
[저자]데이비드 캠필드(David Camfield)
[원제]Quebec's "Red Square" Movement: The Story So Far
[게재일]8월 7일
[번역]정은희 참세상 기자
태그

칠레 , 학생시위 , 무상교육 , 퀘벡 , 반값등록금 , 사회적 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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