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5차 희망버스, 새로운 연대운동의 시작

[파견미술-현장미술] 부산으로 떠나는 희망의 여정(6)


희망버스를 파견미술이라는 큰 그림으로 보자. 파견미술팀은 현장에 스스로 파견하는 사람들의 모임이고, 이들은 파견 나간 곳에서 자신들의 재능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연대로 만들어 낸다. 희망버스의 승객 모두는 파견미술팀이라 생각하고 그들 한 명 한 명의 연대가 활동으로 연결되어 큰 그림의 희망버스가 만들어진 것이다.

8월 27일 4차 희망버스는 서울이다. 대국민제안 기자회견을 하고 토론회도 했다. <정리해고의 어둠을 헤치고 달려라 희망버스> 그리고 한진 본사를 압박하는 퍼포먼스 <조남호의 막힌 귀를 뻥 뚫어라>는 많은 이에게 즐거움을 주기도 했다. 뚫어뻥을 이용한 퍼포먼스는 이후 기자회견에서 재활용되기도 했다. 서울로 와 달라는 희망버스의 외침 그리고 연대가 연대를 만든다는 기조에 맞게 전국의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은 공동투쟁단을 꾸리고 연대를 만들어 갔다.

<소금꽃 공동투쟁단>이라는 이름으로 기자회견에서 투쟁사업장 노동자의 연대로 이제는 정부에 직접 요구함으로써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문제를 포함해 투쟁사업장 사태 해결과 진전을 만들어 나가려고 한다는 투쟁 방향을 밝혔다. “우리는 개별적으로 쫓겨났고, 낱낱이 쫓겨났지만 이제 하나가 되어 나선다”, “하나의 고통, 하나의 운명, 하나의 절규, 하나의 결단으로 똘똘 뭉쳐 나설 것”이라고 선언했다.



청계천에 모인 희망버스 탑승객들은 광화문 사거리에서 경찰의 차벽에 막혔고 우회도로인 서대문 쪽으로 이동해 독립문 공원에서 밤을 샜다. 여기에서 우린 또 신나게 놀았다. 다음 날 새벽 청와대가 보이는 인왕산 꼭대기에 올라 대형현수막을 걸고 정리해고 철회를 외쳤다. 독립문에서 아침을 맞은 희망버스는 용산구 갈월동에 있는 한진중공업 본사 앞으로 향했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경찰의 물대포에 맞서 싸웠다. 스티로폼으로 만든 정리해고의 벽을 박살 내는 퍼포먼스를 하고 경찰과 대치하다가 마무리 집회를 하고 돌아섰다.










10월 8일 5차 희망버스는 다시 부산으로 달렸다. 경찰의 대응 강도는 더 심해졌다. 일반버스 승객들의 영도 진출을 막기 위해 신분증 검사를 하며 참가자를 색출하는가 하면 도로 행진하던 시민들을 무작위로 연행해 가기도 하고 수시로 최루액과 물대포를 발사하며 위협했다. 심지어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희망버스를 막고 부산으로 들어갈 수 없다며 통행 자체를 봉쇄하기도 했다. 부산역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고 우린 집결지를 남포동 BIFF광장으로 정하고 그곳에서 문화제를 진행하기로 했다. 마침 부산국제영화제 행사로 많은 사람이 이 광장에 있었고 영화인선언에 참가한 1,543명이 희망버스에 함께하기로 했기에 결정한 장소였다. 영화인들은 외쳤다. “김진숙 그녀와 영화를 보고 싶습니다.” 남포동 BIFF광장의 밤은 또다시 신나는 난장의 밤이 됐다.

파견미술팀은 민예총 부산사무실을 빌려 크레인 85호 조형물을 만들고 BIFF광장에 설치했다.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 나가는 크레인은 5차 희망버스의 밤을 지켜주었다. 5차 희망버스의 마무리는 다음날 부산역 광장에서 CT85라는 인간 글씨 쓰기를 마지막으로 해산했다. 희망버스가 5번 달려서 얻은 것은 정리해고의 문제가 누구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인식의 확산이다. 한진중공업회장 조남호는 국회 청문회에 나가야 했고 국정감사도 받아야 했으며 그들의 정리해고가 절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이 땅의 대부분의 정리해고가 사측의 부당한 행위라는 사실이 사회적 공감을 얻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해결된 것은 없었고 투쟁을 위한 축제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준비팀에겐 버거운 시간이었다.

1박 2일, 사실 무박 2일의 희망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은 한 번도 기억이 제대로 난 적이 없다. 기절하다시피 눈을 감았다 뜨면 부산 출발 바로 서울 도착이었고, 서울 도착해서 집으로 가는 길은 늘 아무런 기억도 없었다. 몽유병 환자처럼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 2차, 3차, 4차, 5차… 회 차가 늘어날수록 소환장이 날아오는 횟수가 늘었고, 소환에 불응한 기획팀 사람들 중 일부는 수배가 떨어져 옴짝달싹 못 하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김진숙이 크레인에 오른 지 300일이 되는 날이 다가오고 5차 희망버스 다녀온 지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기에 300일 문화제는 부산과 서울로 나누어 진행하기로 했다. 11월 1일 300일이 되는 날 우린 <희망BUS라 쓰고 부스라 읽는다>는 이름의 라디오 부스를 한진중공업 본사 앞에 차렸다. 매일 오전 6시부터 밤 12시까지 릴레이로 진행하는 라디오 생방송이다. 누구나 게스트로 참여할 수 있고 누구나 자신의 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러던 중 11월 9일 한진중공업 사측과 노조의 타결 소식이 들려왔고 김진숙은 그렇게 크레인 85호 고공농성 309일 만에 땅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한진중공업으로 가는 희망버스는 이렇게 끝났지만 그다음 밀양으로, 울산으로, 대전으로, 강정으로 다양한 이름의 희망버스로 전국적인 연대를 이어갔다. 투쟁의, 연대의 새로운 방식이 만들어진 것이다. 또 다른 이름의 희망버스에 오른 파견미술팀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덧붙이는 말

이 글은 문화연대가 발행하는 이야기 창고 <문화빵>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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