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자 후지모리
그도 그럴 것이 그래도 일국의 대통령이라는 사람, 그것도 ‘터프 가이’를 자처하며 철권통치를 휘두르던 독재자가 국민을 속이고 국제회의에 참석한다고 출국한 뒤 일본으로 줄행랑을 쳐 팩스로 달랑 대통령 사임서를 보내 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이로부터 3년 반 만에 다시 찾은 페루에서 후지모리의 인기는 상종가를 치고 있었다. 정치인들에 대한 인기조사에서 후지모리가 1위를 달리고 있고 후지모리가 귀국해 다시 출마해야 한다는 여론이 70%에 달하고 있다고 한다.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만난 기업가로부터, 고도 4000미터의 산골 오지에서 만난 인디오에 이르기까지 ‘후지모리’ 하면 모두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한마디로, 도망간 독재자에 대한 향수, 즉 ‘남미판 박정희 신드름’이 안데스 산맥을 휘감고 있는 셈이다.
리마 시내에서 노점상을 하다가 경찰의 단속에 걸린 인디오 여인 |
안데스 산맥에 위치한 잉카 왕국의 후손인 페루는 남미 중에서도 낙후한 나라이다. 특히 낮은 해안지대에서 풍요한 삶을 즐기는 백인들과 달리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인디오들은 안데스의 고산지대에서 처참한 삶을 살고 있었고 이는 ‘빛나는 길로’와 같은 무장게릴라운동의 거점이 됐다.
이 같은 상황에서 1990년 대통령선거에서 일본계 이민2세인데다가 농대교수 출신의 전혀 알려지지 않은 후지모리가 출마했다. 그리고 낡은 정치와 백인지배를 혐오하는 다수 인디오들의 지지를 받아 예상 밖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지모리는 군부의 지지를 받아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국회를 해산하는가 하면 인권을 무시한 초강경 전략으로 무장게릴라운동을 소탕하는 등 독재자의 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일종의 3선개헌에 의해 2000년 다시 대통령에 출마하고 부정선거에 의해 당선이 됐다. 그러나 그의 최측근이자 사실상의 대통령이라는 말을 들었던 블라디미로 몬데시노스 정보부장이 야당의원을 현금으로 매수하는 비디오가 공개되면서 해외 도주라는 추악한 말로를 겪어야 했다.
이후 페루를 통치하고 있는 사람은 알레한드로 톨레도 대통령이다. 안데스의 가난한 산골 출신으로 양치기, 구두닦이 등 온갖 궂는 일을 하면서 학비를 벌어 공부를 한 그는 용케 미국 유학장학금을 얻어 스탠포드, 하바드와 같은 명문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에 근무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2000년 대선에서 그는 그리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신통치 않은 후보에 불과했다. 그러나 후지모리와 몬테시노스가 정치공작에 의해 유력 야당후보들을 무너트리면서 어부지리로 급부상해 정권교체를 바라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야당의 대표주자로 성장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인기없는 대통령, 톨레도
그는 결국 2000년 대선에서 후지모리와 결선 투표까지 갔지만 부정선거에 의해 패배했다가 후지모리가 몰락하면서 대통령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현재 그의 인기는 바닥을 치고 있고 그의 이 같은 인기 하락이 바로 후지모리 향수의 일등공신이 되고 있다.
톨레도 대통령의 지지도는 현재 10% 미만을 기록하고 있고 정치인들에 대한 인기조사에서도 꼴찌를 기록하고 있다. 사실 최근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톨레도 대통령이 임기인 2006년 이전에 하야해야 한다고 답한 유권자들이 절반이 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2000년 대통령후보 출마 서류 작성시 필요한 유권자 서명을 조작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탄핵을 해야 한다는 여론까지 생겨나고 있는 실정이다. 오죽했으면 세계적인 유력언론인 「이코노미스트」지가 얼마 전 ‘어떻게 해서 톨레도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인기 없는 대통령이 되었나’라는 분석기사를 내보냈겠는가.
톨레도정권이 인기가 없는 데에는 민주정부가 안고 있는 딜렘마가 자리잡고 있다. 민주화 이후 그동안 억눌렸던 각종 사회적 요구들이 분출해 사회적 혼란 상태를 야기한 것이다. 지난 여름에도 페루 최대의 노동조합이 총파업을 벌렸다. 또 한 지방도시에서는 교사들이 파업을 벌이면서 여러 공공건물에 방화까지 했는데 그 중에는 법원 건물도 포함되어 있어 수천 건의 재판서류들이 타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후지모리정권 몰락 후 악명 높은 국가정보국(SIN)을 해체하고 훨씬 적은 규모의 새 정보기관을 만들자 무장게릴라 운동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도 톨레도정권이 인기가 없는 이유이다.
여름의 크리스마스 츄리 앞에서 실의에 빠져 고개를 숙이고 있는 리마의 서민들 |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톨레도정권, 특히 톨레도 자신에 있다는 것이 현지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우선 텔레도 대통령이 선거 과정에서 너무 많은 것을 약속했다는 것이 큰 문제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텔레도에 대해 “말만 많지 약속해 놓고 하나도 지킨 것이 없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그래서 “나토(NATO)정권이구만”이라고 하자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어와 "no action, talk only의 준말"이라고 답해주자 “바로 그거”라고 손벽을 쳤다.
이에 못지 않게 심각한 문제는 부정부패이다. 후지모리정권을 몰락시킨 직접적인 계기는 후지모리와 몬테시노스의 부정부패였고 톨레도는 이에 대항해 깨끗한 정부를 약속했었다. 그러나 톨레도정권 역시 후지모리정권 못지 않게 부패했다는 것이 국민들의 여론이다. 예를 들어 최근의 한 여론조사는 톨레도 대통령도 부패했다는 응답이 70% 이상 나온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리마에서 만난 대학생에게 “아무리 톨레도가 밉다고 ‘후지티보’(도망자)를 좋아할 수 있느냐”고 묻자 “그래도 후지티보가 맨티로소(사깃꾼)과 라테로(강도)보다는 낫다”고 답했다. 한마디로, 톨레도는 “말만 번지르한 사기꾼에 국민의 재산을 훔쳐가는 강도”라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도 경제위기와 민주화운동 출신 대통령들의 도덕적 타락 속에 박정희 신드름이 생겨났지만 그래도 그것은 저 세상 사람, 죽은 독재자의 망령이었다. 그러나 페루의 후지모리 신드름은 산 독재자의 망령이라는 점에서 여간 걱정스러운 것이 아니다.
인공 섬 우로에서
티티카카호수. 중고등학교 지리시간에 배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호수이다. 고대 남미문명의 발생지로 해발 4천 미터에 위치한 이 호수는 길이 150킬로미터, 넓이 50킬로미터의 거대한 크기로 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산꼭대기에 바다가 올라 앉아있는 것 같다. 고산병으로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둥켜안고 이곳의 명소인 우로를 찾았다.
티티카카섬의 명물인 인공섬 우로에 살고 있는 인디오들
우로는 이곳에 자라는 갈대로 만든 커다란 인공 섬. 이곳 인디오들은 이 인공섬에 집을 짓고 사는데 커다란 우로의 경우 그 크기가 엄청나 그 위에 학교와 병원까지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서의 후지모리의 인기는 절대적이다. 후지모리가 대통령 시절 이곳을 방문해 집집마다 태양열 발전기를 설치해 줌으로써 난생 처음 전기의 해택을 보게 해줬다며 부득불 팔을 끌고 가 태양열판을 보여줬다.
후지모리는 남미 지도자로서는 드물게, 그리고 박정희와 유사하게, 전국을 돌아다니며 서민들을 만나고 스킨쉽을 나누는 리더쉽 스타일을 구사했는데 그것이 아직도 약효를 발휘하고 있었다. 후지모리의 인기는 더욱 골짜기에 들어간 산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에 사는 다니엘 가족
호수변의 중심도시 푸노에서 배를 타고 네 시간을 가면 아만타미섬이 나타난다. 이 섬은 섬 전체가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고 바다 바로 건너 볼리비아의 만년설이 덮인 고봉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오지중의 오지이다. 그곳에서 하루 민박을 한 다니엘이라는 촌부도 후지모리의 열렬한 팬이었다.
톨레도대통령이 같은 인디오출신인데 왜 싫어하나?
톨레도는 겉만 인디오지 전혀 인디오가 아니다. 선거 때만 인디오 흉내를 낸 것이다. 오히려 치노(페루에서 동양인을 통털어 일컫는 표현으로 후지모리를 말함)가 더 인디오에 가깝다.
후지모리는 그래도 부패한 독재자 아닌가?
후지모리가 나쁜 게 아니라 몬데시노스가 나쁜 놈이었다. 몬데시노스가 잘못해 후지모리까지 괜히 욕을 먹고 억울하게 쫓겨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