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위도 띠뱃굿’은 1978년 10월 19일부터 21일까지 개최되었던 제 1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받았고, ‘중요무형문화제 제82-다호’로 지정되어 여러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앞으로 정부에서 지원받은 12억원을 사용하여 전수관과 숙박시설을 건축할 예정으로 있어 더욱 기대된다 하겠다.
올해 정해년 정월 초사흗날이었던 지난 2월 20일(양력)에 위도 대리에서 행해진 ‘위도 띠배굿’의 주요 행사내용을 다음과 같이 개략적으로 정리해 보았다.
원당제
원래 원당제는 정월 초사흗날부터 대보름까지 계속 되었는데 지금은 초사흗날 한루만에 행해진다. 이 굿은 마을 동쪽에 위치한 산절벽 위에 있는 원당에서 제를 올리는데 섣달 20일경부터는 원당의 주위에 금줄을 치고 사람의 통행을 금지시키고, 출산을 앞둔 임산부는 마을에 있지 못 하고 산막으로 옮겨가도록 하는 등 엄격하였다.
▲ 산 정상에 위치한 원당으로 가고 있는 모습 |
섣달에 제물로 사용될 물품들을 구입해 와서 정월 초하루와 초이튿날에 제물을 만들고, 초이튿날 저녘엔 화주와 화장이 목욕재개를 함으로서 원당제는 사실상 시작된다. 오전 8시에 전수관에서 풍물패의 판굿이 있은 후 화주를 선두로 하여 무당과 화장(재물을 옮기는 사람), 영기잡이, 풍물패가 줄을 지어 뒤따르고, 오방기와 뱃기를 든 기수와 마을사관들이 풍물에 맞추어 춤을 추며 따른다. 마을 동쪽 산 절벽위 꼭대기에 위치한 당집까지 가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눈이 많이 왔던 몇 년전만 해도 미끄러지면서 힘겹게 올랐던 기억이 있다. 가뿐 숨을 몰아쉬며 당집에 들어가면 주변에 부는 거센 바람도 이곳에선 얌전해진다. 당집에서 내려다 보면 마을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고, 바닷물이 빠진 마을앞 갯벌도 넓게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영광과 고창, 변산, 그리고 주민들의 생활터전인 풍칠산바다도 한 눈에 들어온다. 누구 말마따나 명당자리다.
원당의 문을 열면 두 문지기의 호위아래 마을과 바다를 수호하는 칠위의 신상, 즉 산신령상, 장군서낭상, 손님네상, 원당부인상, 본당부인상, 옥저부인상, 애기씨상, 문지기상(문수군령)이 그려져 있다.
원당에 도착한 후 오방기는 당집 한곳에 세워놓고, 화장이 지게에서 제물을 내려놓고 화주가 젯상을 채린다. 제물은 쌀 1대, 마른 동태, 메주콩 3대, 뜸부기 나물, 삼색실과(대추, 밤, 곶감), 삶지 않은 돼지갈비, 그리고 요즘엔 사과, 배, 귤 등이 추가되었다. 또한 애기씨상 앞에는 미역국이 차려지고, 산신령앞엔 칼이 꽂인 채로 돼지머리가, 그리고 신상 옆엔 생으로 된 돼지갈비 한 점씩을 걸어 놓는다. 당 밖의 동, 서, 남, 북에도 나물, 삼색실과, 맷밥으로 된 간단한 젯상을 차려놓는다.
진설이 끝나면 풍물이 멈추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화주가 축문을 읽는다. 독축에 이어 무당이 징을 때리면서 인사굿을 하며 추수를 행한 후 산신당 앞에서 춤을 추면서 당굿을 시작한다. 징과 장고가 반주를 해 준다. 무녀조상굿, 성주굿, 지신굿, 산신굿, 원당굿, 손님굿, 서낭굿, 기굿, 문지기굿 순으로 12가지 굿이 이어지는데 올해는 성주굿, 원당굿, 기굿 등 세 가지 굿만을 했다. 나이가 80세인 무당은 안타깝게도 힘들게 굿을 한다. 전수생인 무당도 아직 소리가 어설프다. 굿 사설도 많이 잊어버렸단다.
▲ 당에 제물을 올려놓고 원당제를 올리고 있는 무당 |
화주를 맞고 있는 김상원 선생은 “9년 전 돌아가시기 전까지 마을 무당이었던 조금녀씨가 아주 잘 했지”라며 회상한다. 하나의 굿이 끝날 때마다 풍물패가 흥을 돋군다. 기굿을 할 땐 무당이 선주들에게 쌀알을 집어주는데 짝수개를 받은 선주들은 기뻐서 ‘좋다!’라고 외치면서 기를 들고 당집 밖으로 뛰어 나온다. 짝수개를 받으면 그 해 무병하며 고기를 많이 잡는다고 한다. 무당이 굿을 하는 동안 풍물패와 선주들은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워먹으며 술을 한잔씩 하기도 하고 화주가 준 제물로 음복을 한다.
바닷물이 밀물 때가 되어 어느 정도 들어오자 오후 1시쯤 당굿은 마무리 된다. 올라오던 순서대로 다시 마을로 내려가다가 돌로 쌓아 만든 '작은 당'에 화주가 간단한 제를 지내고 삼실과(대추, 밤, 곶감)을 묻고, 마을 동쪽 바닷가로 내려가 용왕밥을 바다에 넣는다. 곧 이어 마을 당산나무와 마을 주산, 마을 서편에 삼실과(대추, 밤, 곶감)를 땅에 묻었다. 그리고 전막마을을 넘어서 서편 바닷가에서 용왕밥을 넣고, 띠배가 놓여진 곳으로 되돌아 왔다.
그러는 동안 뱃기에 장군서낭, 애기씨 등 깃손을 받은 선주들은 당집에서 내려오자 마자, 집으로 가서 정문에 기를 세워두고 젯상을 채려놓고 제를 올린다. 그런 다음 각자 배에 오방기를 묵는다. 예전엔 배안에 일년 동안 줄포나 곰소에서 구입해 온 연지, 분, 구리무(화장품)과 삼색실과를 넣은 ‘당함’을 모셨고 깃손을 묶어 놓았다고 한다.
용왕제
원당제를 올리는 동안 마을앞 바닷가에선 띠배가 만들어 진다. 완성된 띠배에는 집으로 만든 돗 두 개와 동방청용장군, 서방백호장군, 남방주작장군, 북방현무장군, 중앙황제장군이라고 씌여진 깃발이 달려있다. 길이 2m에 폭이 1m 정도 되는 띄배 안에는 사람형상을 한 허수아비가 선장을 포함하여 7명이 짚으로 만들어져 있고 나무로 만든 ‘닷’이 들어 있다. 밖에는 ‘노’도 달려 있다. 갖출 건 다 갖추었다.
완성된 띠배 앞엔 커다란 젯상이 차려진다. 재물은 사과, 배, 귤, 수박, 대추, 밤, 곳감, 돼지고기, 명태, 가래떡이 올려진다. 오후 3시15분쯤 화주가 축문을 읽는 것으로 용왕제는 시작된다. 곧이어 무당이 춤을 추면서 악사들의 반주에 맞추어 용왕굿을 한다.
▲ 띠배를 앞에 두고 용왕제을 올리기 전 풍물을 치고 있는 모습 |
▲ 띠배를 앞에 두고 바다를 향해서 용왕제을 올리고 있는 모습 |
30분 정도 용왕굿을 지낸 후 제상에 차려진 제물 전부를 띠배 안에 넣었다. 그리고 여인들이 중심이 되어 가래밥(회식밥)에 바닷물을 섞어 마을앞 바닷가를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면서 뿌렸다. 이는 그동안 바닷물에 빠져 익사한 모든 사람들이 편안히 드시라고 뿌린단다. 회식밥을 뿌리는 동안 이종순 선생의 선창아래 ‘가래질 소리’와 ‘애해용 소리’, ‘술배 소리’를 하면서 흥겹게 춤을 추었다.
띠배 띄우기
이제 용왕이 드실 음식을 진상하기 위해 제물이 실린 띠배를 띄울 차례다. 풍물패를 실은 배(모선)가 띠배에 줄을 연결한 다음 끌고 바다로 나가기 사작한다. 마을 사람들은 소원을 빌며 절을 했다. 마을 앞으로 왔다갔다 순회하더니, 마을 앞 칠산바다로 나간다. 풍선배가 있었던 때에는 두 개의 노를 저으면서 한참이 걸렸단다. 배안에선 풍물가락에 맞추어 ‘배치기 소리’가 더욱 흥을 돋군다. 어느 정도 나가자 띠배와 연결되 있던 끈을 자른다. 그러자 띠배는 망망대해에 외로이 떠 있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라앉을 것이다. 어민들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빌면서 눈을 때지 못하고 모선은 마을로 돌아온다. 오후 5시다. 이렇게 해서 올해 띠뱃굿은 모두 마무리 되었다. 띠배에 한참 눈을 떼지 못하고 칠산바다가 다시 되 살아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 배(모선)가 띠배를 달고 마을앞 칠산바다로 나가는 모습 |
▲ 배(모선)에서 떨어져 나와 칠산바다 가운데 떠 있는 띠배 |
예전엔 어두워진 후에도 마을 뒷동산에 올라 띠배가 어디로 가는지 확인을 했다고 한다. 한 어민은 띠배 안에서 도깨비불이 보여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단다. 그래서 띠배가 향하는 곳으로 다음날 어업을 하러 나가면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단다. 또 다른 어민은 띠배가 아닌 칠산바다에서 도깨비불 같은 것이 여기 저기에서 보이면 그곳에서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어떻든 띠배는 안전한 항해와 풍어를 기원하는 의미로 띄워졌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녘엔 화주와 화장만이 뒷산에 올라 ‘도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때는 솥을 직접 가지고 가 밥을 해서 제상을 채렸다고 한다. 그 다음날부터 정월대보름까지 지신밥기와 줄달리기용 줄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정월대보름엔 마을 주민 전체가 모여 주산돌기를 한 후 ‘줄달이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은 정월대보름에만 간단하게 길굿을 치면서 놀기만 한다고 한다.
이렇듯 위도 대리 주민들은 어장이 풍부한 칠산바다에 감사하면서 안전하고 풍요롭게 살기를 대자연앞에 기도했던 것이다. 비록 예전 처럼은 아니지만 어업이 힘들어져 생계대책이 힘들어 지는 상황속에서도 예전 풍요로웠던 기억을 회상하고 다시 그 날이 오기를 기도하면서 위도 대리 주민들은 띠배굿을 굳건히 이어가고 있었다. 앞으로 칠산바다가 되 살아나 많은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더욱 풍성하고 정성어린 띠배굿이 이어지길 빌어 본다.
'위도 띠뱃굿’을 보고 칠산바다가 되살아나길 기원하면서
음력으로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까지, 그리고 몇몇 지역에선 2월 초하룻날에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묵은 갈등을 해소하고 화합하며, 한 해 동안 안녕과 풍농, 풍어를 기원하는 대동굿판이 펼쳐진다. 춤과 소리, 풍물에 어우러져 흥을 돋구고, 가난한 사람과도 풍성한 음식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 세상이 펼쳐진다.
그중 독특하게 행해지는 굿판이 정월 초사흗날에 행해지는 ‘위도 띠뱃굿’이다. 예전보다 많이 간소화 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도 무당이 집전하는 원당제와 용왕제, 마지막으로 ‘띠배’를 띄우는 모습은 어떤 곳에서도 찾아 보기 힘들다. 이때 불리워지는 ‘술배소리’, ‘가래질소리’, ‘배치기소리’, ‘애용소리’는 독특함을 더욱 살려 준다. 이들 소리는 과거 풍선배로 어업을 하던 시절에 이 소리에 맞추어 물고기를 잡았다고 한다.
이같은 성대한 굿판이 면면히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위도의 근해가 칠산바다의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어 어장이 풍부하기 했기 때문이다. 위도와 고군산군도, 변산, 격포, 고창, 영광 법성포와 칠산도 사이에 해당하는 이곳 칠산바다에선 1960년대까지만 해도 조기와 삼치, 청어, 박대, 민어, 홍어 등 수많은 어종이 잡혀서 멀리 경북 포항, 충남 서천, 군산, 전남 영광 등에서 수많은 어선(당시 풍선배)들이 찾아와 음력으로 4월과 5월 두달 동안 ‘유자망’과 ‘안강망’을 설치하여 물고기를 잡았다.
이때 수백 척이 위도 근해에서 하룻밤 만에 물고기를 선창에 가득 싷어 담았고, 바다 한가운데서 상고선(물고기를 싷어나르는 배)에 넘겨져 금강의 강경, 만경강의 목천포과 만경, 부안의 줄포, 영광의 법성포, 전남 함평의 주포 등으로 팔려 나갔다. 이같은 모습을 두고 ‘위도파시’가 열렸다고 불렀단다. ‘흑산도파시’와 ‘연평도파시’와 함께 3대 파시로 꼽혔고, 그중 으뜸이라고 알려져 있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영광굴비’는 이곳 칠산바다에서 잡힌 조기가 영광 법성포가 가서 소금과 버무려져 알맞게 부는 바닷바람 속에 햇빛에 말려져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위도사람들은 ‘영광굴비’는 이 곳 위도 근해인 칠산바다에서 잡힌 것이라며 자랑스럽게 말한다.
이같이 칠산바다에 많은 물고기들이 몰려 드는 이유는 이곳이 산란장이었기 때문이다. 만경과 동진강, 금강에서 많은 물과 토사가 흘러내려와 바다와 만나 다양한 염도로 형성된 기수역을 이루고, 강물을 따라 내려온 유기물이 풍부하여 물고기들의 먹이가 되었고, 적당한 수온과 함께 산란장으로 활용하기에 알맞게 바닦이 모래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영상강 하구을 끼고 흑산도 파시가 있고 한강 하구을 끼고 연평도 파시가 있는 것처럼, 금강과 만경강, 동진강 하구를 끼고 ‘위도 파시’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곳 칠산바다에선 70년대 이후론 조기 등 고급 어종들이 거의 잡히지 않고 있고, 멸치와 주꾸미, 새우, 전어만이 잡히고 있을 뿐이며, 이조차 점점 고갈되고 있다고 어민들은 한숨을 쉬며 말한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풍성하던 마을 인심은 점점 사라져 가고, 생계로 인해 주민들이 하나 둘씩 마을을 떠나고 있단다. 올해 초 수협 빚이 밀려있던 3대가 강매 처분되어 팔려나갔다고 한다.
이와 같이 점점 어족 자원이 고갈되는 이유는 몇몇 대형 선박들이 멀리 동지나해까지 나가 산란하기 위해 들어오는 물고기를 미리 잡아 버리는 이유도 있겠지만, 각종 오염물질이 강을 통해 흘러 들어오고 더욱이 강 하구를 틀어막고 계화도 주변 등 산란장으로 활용하던 지역들을 간척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영광핵발전소에서 흘러나는 온배수로 인해 바닷물의 수온(유출입와 배출수 온도가 10℃ 차이)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더욱이 새만금 방조제 공사가 진행되면서 칠산바다의 조류가 바뀌고 유속이 느려져 죽뻘이 바닥에 쌓이고, 강물을 따라 흘러나오는 먹이가 원활히 공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대부분의 굴비들은 칠산바다에서 거의 잡히지 않고, 멀리 제주도 남쪽 멀리 떨어진 동지나해까지 나가 잡아온 것들이다.
지금이라도 그 원인을 파악하고 다시 물고기들이 되돌아 올 수 있도록 많은 실천과 노력이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주민들이 기억하는 것처럼 풍성했던 칠산바다가 다시 되 살아나 주민들이 되돌아오고, 띠뱃굿도 풍성해지길 빌어 본다. ‘띠뱃굿’이 단순히 예술적인 행위로만 여겨지지 않고, 실제로 생활속에서 행해지는 굿판이 되기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