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와 춤이 좋아 혁명에 가담하다

[흐르는강물처럼](1) 쿠이홍의 이야기 (1949년 태국 출생)

  쿠이홍


쿠이홍은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고 매우 건강해 보인다.

그녀는 자기 가족 말고도 다른 가족의 고무 추출대를 세우는 일로 가족 생계를 보태고 있다. 그녀는 요리 등 수천 가지 집안일도 끊임없이 한다. 맛있는 케이크를 만들 줄도 알고, 감칠맛 나는 태국식 요리도 잘하고, 야생 허브를 가지고 간단한 질병을 치료할 줄도 안다. 쿠이홍은 가족이 과일과 야채를 항상 먹을 수 있도록 집 근처에서 야채밭과 여러 가지 과일나무를 가꾸기도 한다.

쿠이홍의 동지들은 그녀를 마을 여성위원회 회장으로 선출했다.

쿠이홍은 지금의 남편과 외동딸,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그녀에겐 적들의 매복공격에 죽은 첫 번째 남편과 낳은, 이제는 성인이 된 아들도 있다.

“사람들은 우리 가족 전체가 게릴라였던 것을 후회 하냐고 묻곤 해요.

이제 그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어요. 이제 모든 것이 끝났잖아요? 후회하는 건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후회하고 살면 사람들이 우리를 얕볼 거예요. 우리가 이렇게 먼 길을 왔는데 어떻게 후회를 하겠어요? 이미 지나간 일을 다시 돌이킬 수는 없잖아요.

이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계속 살아가는 것, 끝까지 계속 가는 것이지요.”


가족생활

우리 아버지는 1953년 공산주의 혁명군에 결합했다는 이유로 체포됐어요. 내 여동생이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는 중국으로 추방당했어요. 그래서 저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어요.

아버지가 감옥에 계셨던 것과 어머니가 저를 데리고 면회 갔던 기억밖에 없어요. 저는 계속 울었지요. 우리 집은 ‘시민군’[위장 게릴라 회원]이 접수한 지역에 있었고, 이 때 운동이 이미 쇠퇴하고 있을 때였는데도 우리 집은 시민군의 접선지로 사용됐어요.

어머니는 매우 고통스러워 하셨지만 매우 강하고 의지가 높은 분이셨어요. 고집도 세구요. 그렇기 때문에 애를 여러 명 키울 수 있었겠지요.

모든 사람은 약점과 강점을 지니고 있잖아요? 저는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저지른 일 때문에 아버지에게 화가 많이 나 있었어요. 편지를 한 번 썼는데, 혹독한 비판을 했지요. 어머니가 가족 전체를 위해 모든 것을 혼자 다 해야 한다고, 아버지가 중국에서 재혼하는 게 맞는지 따졌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아버지도 거기서 혼자 계시는 것이 힘드셨을 거예요. 어머니와 아버지는 너무 오랜 동안 떨어져 있어야 했으니까요. 지금은 우리가 이런 문제에 대해 좀 더 열려 있고 넓은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버지는 중국에서 한 번도 우리에게 돈을 보내주신 적이 없어요. 나이가 들고 결국 거기서 돌아가셨지요. 이제는 아주 오래 전 얘기지요.

노래와 춤이 좋아 혁명에 가담하다

공산당이 처음 접근했을 때 저는 중학생이었어요. 저는 공부하면서 가족생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고무도 추출했어요. 처음에는 공산당에 가입하려 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가입하면 먼 길을 다녀야 했거든요.
  1989년의 쿠이홍


근데 큰 오빠가 저를 설득했어요. 저는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좋아서 공산당에 가입했어요. 공산당이 춤추고 노래할 수 있는 청소년을 위한 여러 가지 행사를 개최하곤 했거든요. 당은 대중들에게 다가가서 게릴라군을 확대하려고 했기 때문에 우리더러 대중을 위해 노래하고 춤추라고 했어요.

그러고 나서 모인 군중들에게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심지어 맑스주의와 레닌주의 강연도 했어요. 우리는 태국 설날 때 ‘봄춤’과 ‘촛불춤’ 그리고 ‘대나무춤’ 공연을 해야 했고, 우리가 공연하곤 했던 배드민턴 경기장은 항상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어요.

태국 당국은 우리가 이렇게 성공하고 있다는 데 당황했고, 우리를 예의주시하기 시작했지요. 우리는 또 지역사회에 다가서기 위해 농구 시합도 개최했는데, 그쯤 되니까 태국 정부가 농구장에서도 우리를 감시하기 위해 무장 군인을 보내기 시작했어요. 큰일 났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지요.

게릴라되기

게릴라가 되기 전에부터 이미 저는 게릴라들에게 음식 나르는 일을 했어요. 우리 집 근처에서 게릴라와 정부군 간 충돌이 가끔씩 벌이지기도 했어요. 처음에는 중립을 지켰는데, 얼마 안가서 상황이 너무 극과 극으로 치달아 한 쪽을 택할 수밖에 없었지요.

결국 가족 전체가 체포를 면하기 위해 게릴라군에 결합했어요. 저는 그 때 18살이었고, 끝까지 있었어요. 제가 마흔 살이 될 때까지. 저는 게릴라로 있으면서 많을 것을 배웠어요. 읽고 쓰는 것도 배웠고, 바느질하는 법, 춤과 노래, 그리고 심지어 지하 터널을 뚫는 법도 배웠어요.

우리는 항상 체포될 위험에 있었지요. 우리 할머니도 혁명을 지지했어요. 혁명군에게 이것저것 사다주시고 밥도 해주시고. 친척들은 어머니가 가족을 산속으로 끌고 갔다고 탓하는데, 사실 어머니 잘못은 아니지요. 우리 스스로 가고 싶었던 것이니까.

첫 전투

저의 첫 전투는 1968년이었어요.

태국과 말레이시아 국경 근처에 있는, 말레이시아로 이어지는 고속도로에서였죠. 지나가는 말레이시아군 트럭을 매복하는 작전이었는데, 그 때 우리는 35명의 적군을 죽이거나 부상당하게 했어요. 우리 동지 중 한 명도 죽었고, 몇 명이 다치긴 했지만. 저는 그 때 죽거나 다치는 것이 두렵지 않았어요. 다리에 총을 맞았지만요.

저는 그 때 아무런 경험이 없었고, 전투 기술이 전혀 없었어요. 길옆에 서 있다가 적군들이 총을 쏠 때 도로로 달려 나가려던 참에 ‘팡’하고 큰 소리가 나더라고요. 저는 바로 바닥에 쓰러졌어요. 그러고 나서 우리는 빨리 후퇴해야 했지요.

우리는 먹을 것이 거의 없었고 너무 배가 고팠어요. 그러나 전투 후에 우리는 동지들을 빨리 기지로 안전하게 데리고 와야 했어요. 며칠을 걸어야 했어요. 제가 부상당해서 우리 오빠가 저를 내내 안고 걸었어요. 우리 작전은 적군으로부터 가능한 한 총을 많이 빼앗는 것이었는데, 너무 많아서 다 가져올 수가 없었어요.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새로운 일이었고, 경험도 없고, 너무 배고파서 울 뻔 했다니까요.

동지들이 병에 걸리다

남성 동지들은 잇몸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고, 여성동지들도 병에 걸리고 생리가 불규칙했어요. 나중에 알았는데, 폐혈증이었더군요. 동지 한 명은 너무 아파서 말조차 할 수가 없었어요. 잇몸에서 계속 피가 났고 우리가 말을 걸면 그냥 머리를 저었어요.

우리는 그 때 너무 경험이 없어서 우리가 가지고 있던 약을 아무거나 줬어요. 결국 그는 18살 나이에 죽었어요. 비슷한 비극이 여러 번 있었어요. 열대 우림 속에서는 모기에 물려 걸리는 뎅기열도 위험한 병인데, 회복하는 데 오래 걸려요.

나의 고향 베통

중국에 있는 야난[연안]은 마오쩌뚱이 살던 곳인데, 제 고향 베통은 ‘리틀야난[작은 연안]’이라 불리기도 했고, 고무가 많이 났기 때문에 리틀골드힐[작은 금산]이라 불리기도 했지요. 그래서 주민들이 나름대로 잘 살았어요.

베통 사람들은 혁명적이었어요. 혁명을 지원하고 지지했고, 음식을 비롯해 모든 것을 해줬어요. 공산당이 많은 사람들을 일깨워줬고, 주민들이 운동을 하면서 의식화가 됐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말라야공산당(CPM)이 베통 주민을 위협하던 도둑들을 내쫓는데 일조를 했기 때문이기도 해요. 사실 태국과 말레이시아 국경은 말라야공산당이 있어서 비교적 안전한 곳이었어요.

정풍운동

말라야공산당도 정풍운동을 펼쳤는데, 그 때 제가 조사를 받게 됐어요.

태국 깊은 숲속에 있는 군부대로 이송됐어요. 저는 혼란스럽고 왜 당이 나에게 이러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지요. 잘못한 것도 없었고. 근데 아무도 설명을 해주지 않았어요. 큰 오빠도 조사를 받게 되어 지하 벙커에서 며칠을 지내야 했데요. 밥도 먹었고, 고문을 받진 않았는데, 계속 진술하라는 거예요. 진술할 것이 없었는데. 저는 진실을 말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정풍운동 대상이 됐어요. 왜냐하면 한 사람이 연행되면 이 사람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연루되어 연행됐거든요. 석방된 이후 중국 문화혁명 때 그랬듯이 우리는 ‘자기비판’을 거쳐야 했어요. 큰 오빠는 결국 처형당했어요.

이후에 저는 당 지도부에게 문제제기를 했어요. 당이 실수한 것에 대해 사과하긴 했어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사후에 명예회복 됐지요.

남쪽을 향한 공격부대

우리는 말레이시아를 향해 남쪽으로 파견됐어요.

바로 이 작전을 수행할 때 제 첫 남편이 죽었어요. 1973년이지요.
  전투에서 사망한 쿠이홍의 첫 남편


우리는 목적지까지 가는 데 두 번 실패한 후, 결국 성공했어요. 먹을 것이라곤 야생 타피오카[열대식물 일종에서 채취한 전분]랑 감자 밖에 없었어요. 태국에서 ‘각’이라 부르는 아주 작은 곤충이 있는데, 우리를 심하게 물어뜯었어요. 밀림 속에서 비가 오면 비를 흠뻑 맞아야 했고, 밤에는 젖은 상태에서 추위와 싸워야 했어요. 대부분의 경우 배가 매우 고팠죠. 몇 주 동안 쌀이나 설탕, 소금도 없지 지내야 했어요.

그 때 저는 3개월에서 5개월 임신 중이었어요. 그래도 50kg에 육박하는 짐을 지고 다녀야 했지요. 눈이 워낙 좋아서 아주 멀리 있는 나무에 열린 과일을 발견하기도 했고, 잎만 보면 무슨 과일인지 알았어요. 저는 이 매복 부대에 10년 동안이나 있었답니다!

수송 및 통신 부대

저는 수송 및 통신 부대에서 일하기도 했어요. 정말 힘든 일이었죠. 남쪽에 있는 말레이시아로 향한 공격부대를 위해 무기와 돈, 일상 용품을 전달해줘야 했어요. 50~60kg나 되는 짐을 지고 다녀야 했어요. 태국 남쪽 국경에서 말레이시아 북쪽에 있는 페락 주(州)까지 걸어야 했어요. 아주 우거진 밀림을 뚫고 가야 했고, 높은 산을 넘었어요. 도시라곤 전혀 없고 아주 작은 마을만 있던 지역이지요.

코끼리 사냥

우리는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코끼리를 사냥했어요. 코끼리는 워낙 크기 때문에 총으로 쏴죽이기 쉬웠죠. 머리가 커서 조준하는 것이 쉬웠어요. 주로 귀구멍을 겨냥했어요. 뇌가 있는 곳이라 즉사하거든요.

하루는 먹을거리를 찾고 있었는데, 코끼리 배설물이 보이더라고요. 한 동지가 새 똥인지 오래된 똥인지 확인하기 위해 똥을 발로 찼는데, 우리는 코끼리가 나무 뒤에 숨어서 우리는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코끼리는 그 동지가 자기 똥을 건드리는 것에 매우 화가 나서 나무 뒤에서 나와 코로 그녀를 잡아 올렸어요. 몇 번 올려다 내렸다 했어요. 이 여성동지는 너무나 놀래고 멍이 많이 들어서 걷지도 못했어요. 코끼리가 얼마나 힘이 셌는지!

또 한 번은 한밤 중 우리가 자고 있을 때, 코끼리 무리가 우리 캠프까지 왔지 뭐예요! 지금의 제 남편이 처음에는 큰 나무가 내려앉은 줄 알았데요. 코끼리들은 우리 주위를 맴돌면서 큰 소리를 냈어요. 다행히도 우리를 공격하진 않았어요.

수컷 코끼리가 최고의 음식이었어요. 밀림에 있는 동안 저는 코끼리를 여러 마리 먹었어요. 아마 100마리 정도 될 걸요? 한 마리만 잡으면 3개월 어치 식량이 됐어요. 코끼리 모든 부위가 맛있어요. 코, 뇌, 배살, 내장, 발… 껍질은 별로였는데, 배가 고프기 때문에 그냥 먹었어요. 주로 구워 먹었지요.

결혼과 첫 아이

제 첫 남편은 중국계 태국인이었어요. 같은 부대라서 친했어요. 깊은 밀림 속에서 우리 첫 아들을 낳았어요. 애를 낳을 때 너무 고통이 심해서 여러 명이 저를 힘껏 잡아 눌러야 했어요. 아마 배가 고파서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아들을 밀림 밖에 있는 시누이에게 보내야 했어요. 상황이 워낙 그렇다 보니 아들 생각이 별로 나진 않더군요. 그 때 임신은 저주 같았어요. 축복이 아니라 병처럼 느껴졌지요. 제가 임신했다고 동지들이 비판할까봐 불안했어요. 제 첫 남편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어요. 용감하고 똑똑하고 기술도 좋았지요. 저와 함께 최전방에 있었어요. 밀림과 산속에서 길을 잘 찾아다녔고, 캠프와 캠프 사이를 이동할 때 우리 부대원들을 안전하게 이동시켰지요. 나침반이랑 칼, 라이터만 있으면 됐어요.

그의 죽음, 상실과 추억

남편은 적들의 매복공격으로 사망했어요. 동정심이 많았던 사람이었죠. 어느 날 우리는 다른 부대원들보다 앞장서고 있었어요. 저는 그가 죽는 것을 못 봤지만 총에 맞았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는 마지막 숨이 끊길 때까지 계속 적들을 향해 총을 쐈어요. 총알이 그를 관통했지요. 매우 고통스러워하고 있고 총을 지팡이 삼아 일어서려 한다는 것을 저는 멀리서 봤어요.

남편이 총을 맞자 저도 적들을 향해 미친 듯이 총을 쐈어요. 절박한 심정이었지요. 그런데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막판에 우리는 그를 데리고 밀림으로 서둘러서 후퇴하긴 했지만 언덕 위에 올랐을 때 그는 저에게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빨리 가! 가!”라고 하더군요.

그는 나에게 가라고 했어요. 저는 그를 놔두고 갈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는 고통을 참으면서 저에게 소리를 질렀어요. 그는 결국 눈을 감으면서 엄한 목소리로 세 번 외쳤지요. “가! 가! 어서 가!” 그의 말에 따랐어요.

나중에 제 동지들과 제가 그에게 돌아왔을 때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어요. 아무런 움직임 없이, 총을 손에 든 채로. 그는 죽어 있었어요. 28살이란 나이에요. 그는 전날 자기가 30살을 못 넘길 것 같다고 했는데, 바로 다음 날 죽었어요. 우리가 응급처치를 할 줄 알았더라면, 의사가 같이 있었더라면 그는 살았을 거예요.

그러나 그는 저를 보호하려고 했던 거예요. 자신을 희생시키면서 내 생명을 구한 것이죠. 그가 죽었을 때 우리 아들은 3살이었어요.

남편이 보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그를 그냥 보낼 수 없었던 것이지, 잘 모르겠어요. 지금은 이렇게 얘기할 수 있지만 예전에는 언급조차 못했어요.

우리는 군에 같이 있었고, 항상 짝으로 일했어요. 그가 죽었을 때 무엇인가를 상실한 느낌이었어요. 그가 옆에 없다는 사실에 익숙해지는 데 한참 걸렸어요. 숨쉬기 힘들 때도 있었지요.

사람들이 남편 꿈을 꾸는지 물어보기도 해요. 저는 “아니”라고 답해요. 1989년 밀림을 떠날 때 딱 한 번 남편 꿈을 꿨어요. 그런데 그 때쯤 되니까 그의 모습이 생각나질 않더라고요. 어떤 느낌인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의 얼굴… 왜 그렇지? 아무튼 기억이 나질 않아요. 꿈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그의 생각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인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가? 모르겠네요…

그런데 요즘 그의 모습이 다시 생각나요. 우리는 1972년 2월 14일에 결혼했어요.

제가 강인하고 의지가 투철할 수밖에 없어요. 처음에는 큰 오빠, 그런 다음에는 남편… 둘 다 밀림에서 죽었어요. 그럼에도 저는 운동을 계속 했고, 주어진 임무를 모두 완수했어요.

남편이 죽고 난 2년 후 저는 재혼을 했어요. 산을 떠난 후에 딸아이를 낳았죠. 그 이후 생활이 많이 나아졌죠.

  쿠이홍의 어머니와 남동생


저자 후기: 나는 작년에 젊은 말레이시아 감독 아미르 모하미드가 만든 “마지막 공사주의자(Last Communist)”라는 영화에서 쿠이홍과 그녀의 남편을 다시 봤다. 이 영화는 말레이시아에서 상영금지 처분을 받았지만 뉴욕, 인도, 싱가포르, 홍콩, 대만과 한국 등 세계 곳곳에서 각종 영화제를 통해 상영됐다. 내가 알기론 평상시 매우 조용한 쿠이홍의 남편이 게릴라로서의 경험을 말하는 인터뷰 장면이 영화에 나왔다. 그는 쿠이홍보다 훨씬 늦게, 1970년대 학생운동가로 게릴라가 되었다고 했다.

그는 지금 마을에서 가장 젊은 공산당원 중 한명이며, 전기와 건설 기술이 뛰어나다. 쿠이홍은 현재 남편과 딸,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쿠이홍의 남동생도 게릴라였는데, 밀림을 떠난 후 대만에서 이주노동자가 되었다. 그는 중국어와 태국어에 능통해 대만 건설업자들에게 소중한 자원이었다. 주로 태국 이주노동자들이 많은 건설현장에서 통역을 해주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산업재해로 부상당하자 해고당했고, 태국으로 쫓겨났다. 그는 태국 전역을 돌면서 계속 일을 찾아다니고 여러 가지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게릴라였던 그의 아내는 쿠이홍이 살고 있는 베통 마을에서 혼자 농장을 돌보면서 외동딸을 키우고 있다.

쿠이홍의 큰 아들은 태국 남부에 있는 얄라 시(市)에서 자동차 정비사가 됐으며, 딸은 베통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다. 딸도 춤과 노래를 좋아하고, 태국어와 중국어에 능통하다. 딸의 사촌, 즉 쿠이홍 남동생의 아이도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다. 내가 그들 마을에서 함께 생활할 때 두 아이들은 우리 집에 놀러오는 것을 참 좋아했다.


[번역]전소희
덧붙이는 말

말라야공산당(CPM): 말라야는 지금의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를 포괄하는 국가였으며,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말라야는 1957년 독립했으며, 1965년에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에서 독립해 별도의 공화국이 되었다. 말라야공산당은 1930년대 지금의 싱가포르에서 출범했으며, 말라야 독립투쟁과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였다. 1948년부터 60년까지, 공산당 산하 말라야인민해방군은 게릴라전을 펼쳤다. 1980년대 말까지 약 500여명의 게릴라가 남아서 주로 말레이시아-태국 국경 지역에서 활동했다.

정풍운동(Rectification Campaign): 1942~45년 중국공산당이 당원 일반을 대상으로 맑스-레닌주의를 교육시키고 당내 기풍을 쇄신하기 위해 일으킨 운동. 주요목표는 당시 당 내에 존재하던 교조주의, 종파주의 등을 없애고 자기비판과 성찰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그네스 쿠는 현재 영국 맨체스터 대학에서 박사과정 중에 있다. 아그네스 쿠는 아시아 여성 구술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15년간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서 사회운동 활동가로 일해 왔다.

태그

쿠이홍 , 아그네스 쿠 , 말라야 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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