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발제자는 ‘다함께’ 운영위원이자 <맞불> 편집자인 최일붕 동지였다. 사회자는 그가 사실상 한국전쟁 이후 한국 최초의 트로츠키주의자로서 고전적 맑스주의 전통을 한국에서 발전시키는 노력을 해 왔다고 소개했다.
최일붕 동지는 혁명의 의미를 정의하며 발제를 시작했다.
“정치 혁명은 국가권력이 급속한 변화를 겪는 것이고 사회구조의 근본적 변혁까지 나아간다면 사회 혁명이 된다. 트로츠키는 혁명을 ‘대중이 자신의 운명을 창조하는 영역으로 강제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혁명은 아래로부터 대중 행동을 통해 급진적 정치·사회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21세기에도 우리는 에콰도르, 세르비아, 아르헨티나, 볼리비아에서 정치 혁명을 목격했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정치 혁명은 필연이다. 경제 위기로 많은 사람들이 불안정과 고통 속에 살아간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억압을 강화하고 민주주의를 축소한다. 또, 국가 간 경쟁 격화는 전쟁을 부른다. 자본주의가 초래한 환경 파괴는 인류를 재앙으로 이끌고 있다.”
“이런 고통들이 대중의 사기를 떨어뜨리기도 한다. 그러나 경제 위기 상황에서는 지배계급도 분열하고 실수를 저지른다. 이것은 피억압자들의 자신감과 저항을 고무한다. 1987년 6월 항쟁이 그랬고,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동구권의 정치 혁명이 그랬다.”
“전쟁이 혁명의 산파 구실을 하기도 한다. 1904년 러일전쟁은 러시아에서 1905년 혁명으로 이어졌다. 제1차세계대전은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반전 운동이 중요한 이유다.”
“정치 혁명이 사회 혁명으로 발전할지는 예정돼 있지 않다. 사회 혁명에는 피억압 민중의 아래로부터의 권력이 필요하다. 이런 민중 권력은 자생적으로만 등장하지 않는다. 1998년 인도네시아 혁명, 2005년 볼리비아 반란이 민중 권력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은 혁명가들의 의식적 개입이 없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 당시 소비에트는 대공장 중심으로 조직돼 있었다. 반면, 파리 꼬뮌은 지역 사회에 기반했다. 오늘날 민중 권력은 파리 꼬뮌과 같은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 신자유주의 때문에 미조직·비정규 노동자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민중 권력의 등장 자체가 승리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혁명가들은 대중 자신이 의식과 조직을 발전시켜 민중 권력까지 나아가도록, 궁극적 승리에 이를 수 있도록 분투해야 한다.”
다음 발제자인 자이 자일스 웅파콘 동지는 타이 출라롱콘 대학 교수로 지난해 군부 쿠데타에 맞선 ‘9월 19일 네크워크’를 이끌어 왔다. 최근엔 자신의 저서 ≪부자들을 위한 쿠데타≫ 발간을 이유로 대학 당국의 징계 위협에 놓여 있다. 사회자는 민주노동당 국회의원들과 많은 한국 진보적 지식인들이 징계 반대 서명에 동참했다고 소개했다.
자일스 동지는 타이 쿠데타에 맞선 운동에 지지를 보내준 한국 민중 운동에 연대의 인사를 보내며 발제를 시작했다.
“군사 쿠데타와 사회 혁명의 차이를 분명히 해야 한다. 타이의 일부 좌파는 쿠데타 세력에 기대서 사회 개혁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쿠데타 세력은 조그마한 복지도 거부하는 극단적 신자유주의자들이다. 또 이들은 남부 무슬림들을 폭력 탄압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전쟁, 빈곤, 환경 파괴, 민주주의 억압 등 끔찍한 재앙을 몰고 왔다. 그러나 세계 민중들의 저항에 부딪히기도 했다. 중동에서, 라틴아메리카에서, 유럽에서, 아시아에서 우리는 이것을 발견한다.”
“맑스주의는 자본주의에 맞서는 투쟁의 전략을 제공한다는 데 진정한 강점이 있다. 오늘날 문제는 운동의 정치적 대표체가 없다는 데 있다. 스탈린주의 정당도, 사회민주주의 정당도 아닌 우리 자신을 올바로 대변할 수 있는 정당이 필요하다.”
“동시에 단일 쟁점 정치가 아닌 계급 정치가 필요하다. 일반적 정치의 부재, 즉 자율주의는 정치 공백을 메울 수 없고 포퓰리즘 정치인들이 급진화하는 대중을 낚아채는 데 속수무책이다.”
“그 공백을 이슬람주의 세력들이 메우기도 한다. 하마스와 헤즈볼라가 대표적이다. 이들도 저항 운동의 일부이며 사회주의자들은 이들과 함께 행동해야 한다. 영국의 급진좌파 정당 리스펙트(RESPECT)는 이슬람주의 세력들과 공동전선을 잘 보여 준다.”
“공동전선 속에서 활동한다는 것이 사회주의 정치를 희석시킨다는 말은 아니다. 함께 싸우면서 독립적 정치 주장을 펼쳐야 한다.”
“예컨대, 베네수엘라에서는 위로부터의 변혁 전략과 아래로부터의 변혁 전략 사이에 긴장이 있다. 맑스주의자는 차베스를 지지하면서도 독립적으로 행동할 줄 알아야 한다.”
“21세기에도 맑스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의 도구로서 변증법을 올바로 이해하고, 노동계급만이 아니라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돼야 한다. 결론적으로 이런 과제를 수행하는 데 혁명 정당 건설이 필수적일 것이다.”
혁명과 전략
이어진 플로어 토론에서는 다양한 주장들이 펼쳐졌다.
“한국에서 최일붕 동지가 말한 혁명적 격변이 있었던 해가 바로 1987년이다. 1987년 6월 항쟁과 7·8·9월 노동자 대투쟁 20주년이 되는 올해, 우리 운동에는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다. 자유주의 정치인들로부터 노동자 계급의 독자성을 지켜야 한다.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단결을 도모해야 한다. 한국의 운동이 국제적 반전·반신자유주의 운동의 일부임을 인식해야 한다.”
“21세기 들어서 에콰도르·아르헨티나·볼리비아의 혁명은 모두 볼셰비키와 소비에트가 없었다는 공통의 특징이 있다. 이 나라들에서는 노동조합 관료들의 개량주의가 심각하고, 그 반발로 자율주의의 영향력이 강력해서 노동계급이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2001년 아르헨티나 운동은 대통령을 4명씩이나 끌어내리면서도 노동자 혁명으로 발전하진 못했다. 우리에게는 볼셰비키와 소비에트 모두가 필요하다. 소비에트는 혁명적 시기에나 가능하겠지만, 혁명정당은 미리부터 건설돼서 운동 속에서 단련될 필요가 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략 이후 중동 지역에서는 급진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돼 왔다. 팔레스타인 민중의 저항과 지난해 헤즈볼라의 승리, 최근 이집트 노동자들의 활발한 투쟁은 급진화의 단면을 보여 준다. 한국의 민중운동은 중동의 민중운동과 연대할 필요가 있다. 중동에서 반제국주의 운동의 승리는 한국에서의 반제국주의 투쟁을 고무할 것이다. 특히 중동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중요한 이집트에서 민중운동이 승리한다면, 제국주의자들은 결정적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한편, “현대차 파업을 둘러싼 여론이 보여 주듯, 21세기의 대중은 매우 냉소적인 주체들이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도 있었다.
최일붕 동지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1980년 광주 항쟁 때 무기를 든 사람들은 혁명가가 아니었다. 민주주의라는 소박한 염원으로 투쟁에 나선 것이었다. 사람들은 사상이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투쟁에 나서고 그 과정에서 의식이 변한다. ‘냉소’라는 정서의 배경에는 마르크스가 말한 ‘소외’가 있다. 그러나 소외의 반응이 언제나 무관심과 냉소로만 나타나지는 않는다. 운동이 대안으로 보일 만큼 강력할 때, 사람들은 투쟁을 선택할 수 있다.”
“정당은 상명하달식으로 조직된 체계로써 아래로부터의 운동과 모순을 빚을 수밖에 없다. 각각의 투쟁에서 연대의 네트워크를 건설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라는 질문도 있었다.
자일스 동지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정당은 민주적으로 건설돼야 한다. 정당이 없다면 일반적 정치를 가질 수 없다. 그러면 대안 세계의 상을 그릴 수 없고, 각각의 사회 운동들이 저마다 자신의 쟁점에 묻혀버릴 것이다. 분리된 운동들이 연대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운동들이 맞서고 있는 적이 동일한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노동자들은 이에 맞설 힘을 갖고 있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억압받는 사람들의 권리를 진정으로 옹호해야 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일반적 정치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혁명의 현실성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의 맑스주의 경제학자인 정성진 교수는 최일붕 동지에게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말하는 ‘꼬뮌’과 꼬뮌주의자들이 말하는 ‘꼬뮌’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라고 물었다. 또 자일스 동지에게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타이의 경제 상황이 어떠한가? 또, 타이의 반쿠데타 운동에서 한국의 민중운동이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먼저 자일스 동지가 답했다.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탁신 정부는 첫째,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는 것과 동시에 풀뿌리 케인스주의라 할 수 있는 경기부양책을 썼다. 둘째, 타이 자본이 더 저렴한 노동력을 찾아 농촌 지역에 공장을 신설하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수출 지속은 세계 경제와 연동돼 있기 때문에 불안정은 여전하다. 그래서 쿠데타 정부는 이전 정부의 빈민지원책을 비난하며 신자유주의 정책만 추구하고 있다.
“타이 운동 안에는 자율주의가 성행해서 조직 좌파의 성장이 어렵다. 자율주의는 정치를 거부하기 때문에 정치적 대안을 건설하는 데서 무능할 수밖에 없다. 자율주의 영향 아래 많은 사람들은 탁신 정부 지지나 쿠데타 세력 지지로 나아갈 수 있었다."
“반면,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이라면 대중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지녀야 한다. 정치 공백을 어떻게 메울 수 있을지, 어떤 투쟁을 통해 대중과 관계 맺을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최일붕 동지는 정리 발언에서 정성진 교수의 질문에 답변하며 국제적 관점과 전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은 혁명적 상황에서만 꼬뮌이 가능하다고 보는 반면, 꼬뮌주의자들은 일상적 시기에도 꼬뮌을 건설하려 한다. 그러다보니 기존 노조에 대해 초좌파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노조 지도부와 현장조합원을 구분하지 않고, 지도부가 싸울 때는 지지하지만 투쟁을 회피할 때는 현장조합원이 독립적으로 행동한다는 관점이 없는 것이다."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은 공동전선을 통해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개량주의자들과도 함께 행동할 수 있다고 보는 반면, 꼬뮌주의자들은 공동전선을 거부하기 때문에 종파주의로 나아가기 쉽다."
“게오르그 루카치가 말한 ‘혁명의 현실성’은, 오늘날 일국적 관점에서는 느끼기 어려울 지라도 국제적으로는 뚜렷이 느낄 수 있다."
“1989년 천안문 항쟁이 러시아 광부들의 파업을 고무하고 동유럽에서 스탈린주의 정권 타도 물결을 자극한 것처럼, 또 1997년 동아시아 경제 위기가 1998년 러시아·브라질의 경제 위기로 이어지고 이 브라질의 경제 위기가 2001년 아르헨티나 혁명으로 이어진 것처럼 오늘날 세계는 국제적으로 밀접히 연결돼 있다."
“설사 남한에서 처음 혁명이 시작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혁명의 연쇄고리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따라서 국제적 관점에서, 또 전략적 관점에서 혁명을 준비해야 한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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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조명훈 <맞불> 기자 님이 보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