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대선을 두 달 정도 앞두고 있다. 민주화 이후에 대선도 자주 치르다 보니 이제 형식만 보면 제법 폼도 난다. 지난 번 선거에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의 오픈 프라이머리를 벤치마킹해서 재미를 본 탓인지 이번 선거에서는 외려 한나라당이 더 멋있게 쇼를 연출해서 정당의 당원보다 국민이 더 원한다는 지도자를 여론조사를 통해서 대선후보로 선출하는 희한한 일도 생겼다. 과연 엘리트집단답다. 목적이 있는데, 수단과 원칙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아무튼 소위 국민이 원한다는 지도자가 자신이 대선 후보자로 부름 받은 가장 큰 이유는 경제란다. 그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터를 닦아 놓은 ‘금융시장 자본주의’에 기초하여 대운하프로젝트를 통해서 공급중시의 경제(즉, 신자유주의)를 강화하는 길이 우리가 살 길이라고 주장한다.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여파가 워낙 거센 탓이라 어느 후보자들이라고 경제문제를 외면하랴. 후보자별로 경제를 살리기 위한 저마다의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스핀닥터(Spin Doctor)들의 적극적 홍보전략에 의해 급격히 부상한 문국현 후보도 예외는 아니다. 이명박 후보에게 날선 비판을 제기하고 있는 문 후보는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 년에 일자리 100만 개씩 5년간 500만 개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그야말로 꿈같은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일견 대립적으로 보이는 두 진영은 기본적으로 비슷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양적으로 일자리를 창출하지 않으면 현재의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왜냐하면 통계에 의하면 지난 1995년부터 2002년 사이에 세계 20대 경제발전국가에서는 3천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생산총량이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자리는 지속적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해결은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서 출발해야만 한다. 그러나 과연 삽질 프로젝트로 양질의 일자리가 창출될는지 그리고 평생학습과 직업훈련의 강조로 노동시장에서 숙련과 직업간의 미스매칭은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을지 몰라도 5년 내에 5백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할 수 있는지는 대단히 의심스럽다.
한편 집권여당은 해체되었지만 소위 범여권으로 간주되는 쪽에선 올 초부터 이미 DJ정부 때 우려먹었던 ‘생산적 복지’ 개념을 리메이크한 ‘사회투자국가론’을 들고 나와 동기부여를 통해 노동자들이 스스로 일자리를 찾아가게 하는 시장친화적인 복지정책을 대안경제담론으로 제안하였다. 제3의 길의 최신 버전을 들고 나온 전문가들은 시장친화적인 복지정책으로 경제와 복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경제에 대한 대안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최소한 벤치마킹을 하려면 제3의 길 노선을 영국에서 실질적으로 구현하였던 통화, 재정, 노동시장정책을 아우르는 거시경제정책이라도 벤치마킹을 하였으면 좋으련만 국내에서 그런 논의를 들어본 적이 없다. 경제학자들은 별로 관심이 없고, 여타 전문가들에게는 이해하기에 너무 복잡한 논의였을는지도 모른다.
대선을 떠도는 경제의 유령 탓인지 민주노동당에서도 경제성장을 전제로 한 각종 경제론이 후보선출과정에서 제기되었다. 현재 진보정당의 위치가 공세적이라기보다는 수세적이라서 그런지 전반적인 거시경제정책보다는 노동시장의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는데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듯하다. 시장경제를 사회적.정치적 통제 아래 놓고 규제함으로써 보다 인간적인 얼굴의 자본주의를 만들어가려는 진보정당의 대안으로는 허전하기 그지없다. 맑스가 생산성의 향상이 반드시 민주주의의 발전을 담보해주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였지 전자를 인류의 발전으로 보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던 점을 상기한다면 성장 그 자체를 발전의 속죄양으로 삼을 필요는 없겠다. 문제는 민주주의를 담보하는 대안경제론이 진보진영에서조차 제대로 제기되고 있는지의 여부다.
지금까지 진보진영의 적지 않은 논객들이 대선주자들에 대한 각종 비평을 해왔지만, 막상 진보진영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항 담론(담론의 정의는 개념의 사회적 실천성을 내포하고 있는 일종의 언어적 헤게모니 개념이므로, 여기서는 굳이 실천이라는 표현을 중복해서 사용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을 어떻게 형성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논의가 구체화되질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한미FTA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여실히 드러나 한미FTA가 본질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시장확대 전략과 구조조정전략에 기초한다는 기본적 성격에 대한 비판은 적절했지만, 실제로 그러한 담론의 지형을 진보진영의 담론으로 뒤집어 내는 데는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일부 진보진영의 정치평론가들은 이러한 불편한 지형을 애써 외면하거나, 경제의 개방성은 필연적인 대세라는 너무나 당연한 논리를 마치 새로운 시각이라도 인지한 듯 주장한다.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논의를 듣는 사람들이 모두 폐쇄적인 민족경제론자들이 아닌 바에는 쓴 웃음마저 나온다. So what? 그래서 시장경제친화적인 경제발전론의 요체를 들어보자면 사실 노무현 정부가 야심만만하게 내놓은 <비전 2030>의 아류가 아닌가?
어쩌면 진보진영은 부분적으론 ‘위원회 공화국’의 덫에 걸려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정책의 결과적인 실패는 차치하고서라도 중도적 진보담론부터 개혁적 정부정책연구소의 담론은 거의 유사하다. 각종 위원회에 현정부에 호의적인 '진보적 정책전문가'(?)가 골고루 배치되어 경쟁적으로 보고서가 작성되다보니 대안담론은 특별히 차별화도 되지 않는다. 실제로 어정쩡한 유형의 대안담론은 그 정책의 실현 여부와 무관하게 노무현정부의 보고서에 이미 다 나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동시장정책만 보더라도 네덜란드, 덴마크, 아일랜드 등 유럽 각국을 돌아다니며 모델을 수집해왔으며, 이제는 KDI에서 ‘공동체자본주의’에 대한 심포지엄이 개최되고, ‘사회자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보고서가 작성될 정도이다.
중도적 진보진영의 대안경제담론을 담고 있는 글의 서론에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공식이 있다. 현 자본주의 체제에는 ‘앵글로색슨형 자본주의 vs. 라인형 자본주의’(Michel, A.) 혹은 ‘LEMs vs. CMEs’(Soskice, D)의 대립구도가 있는데, 그러한 자본주의의 다양한 발전 가능성(Amable, B.) 중 우리의 대안은 비교적 인간적인 얼굴을 한 유럽형, 특히 북유럽 사민주의적 발전모델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논쟁이 이미 1990년대 초반에 나온 것들이라서 실제로 그러한 논자들이 바라보는 이상(?)의 세계가 거기에 원형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교적 인간적인 얼굴을 한 자본주의로 보았던 유럽(즉 EU)이 한국에게 미국과 똑같은 조건으로 시장을 열라고 하는 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1980년대의 사회구성체 논쟁은 비록 누가 '먼저' 그리고 '제대로' ‘정통 교과서’를 독해했느냐는 황당한 논쟁으로 빠져버리긴 했지만 진보담론의 핵심인 경제는 붙잡고 있었다. 오늘날 여전히 교조적인 자본주의 붕괴론자, 공황론자들을 제외한다면 그 당시처럼 많은 경제학자들 혹은 전문가들을 만나 보기란 가물에 콩 나듯 하다. 대신 정치만능주의만 남아 별별 유형의 평론가들만 보게 된다.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진보가 아닌 우파도 하며, 실제로 유럽의 파시스트들은 자본주의의 철폐도 주장한다. 따라서 차별화된 진보진영의 대안담론은 실종된 경제문제 즉, 현존하는 금융시장 자본주의의 모순을 제대로 분석, 비판하고, 그 대안을 찾는데서 시작해야만 할 것이다.
- 덧붙이는 말
-
임운택 님은 계명대 교수로, 진보전략회의 회원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