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조풍연 씨의 외손녀 이준희(38) 씨가 AP통신 서울지국장으로 왔다.
그녀는 “(미국서 나고 자랐지만)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을 다른 세계에 잘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국민일보 22일 자 24면) 지난 1992년 대학시절 여름방학 때 한국에 와서 코리아헤럴드 인턴기자로 일했다는 그녀는 지난 1주일 동안 서울을 관찰하고 나서 “재미동포란 지위를 이용해 한국을 세계에 알리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준희 지국장은 외조부 조풍연의 영향을 받아 기자의 길을 걷게 됐다며 외조부가 어렸을 때부터 그가 서울을 찾으면 감상문을 쓰게 하고, 교보문고를 데리고 다녔다고 회상했다.
사단법인 한국신문연구소가 1978년에 펴낸 <언론 비화 50편 - 원로기자들의 직필수기>라는 책에 조풍연이 쓴 글은 제목부터 ‘부끄러운 기자생활’(277쪽)이다. 왜 부끄러운가. 조풍연은 1914년 서울서 태어나 1938년 연희전문 문과를 나와 바로 매일신보 기자로 들어간다.
매일신보가 어떤 신문인가. 매일신보는 조선 동아일보가 강제폐간 당한 1940년대까지 살아남은 “악명 높은 (조선)총독부 기관지(282쪽)”였다. “매일신보는 총독부의 일본어 신문 경성일보의 곁다리 신문으로 일본인 경영자 밑에서 사원들의 모든 용어는 벌써부터 일본말로만 쓰고 있는 신문으로 언론계나 일반에게서 돌림을 받았다.”(282쪽) 조풍연은 이런 신문에 들어가 사회부 수습기자를 하면서 “선배 기자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면서 느낀 것은 매일신보가 신문 중에서 맨 꼴찌라는 것이었다”라고 회상했다. “매일신보의 독자는 시골의 면사무소가 강제로 받는 것을 빼놓고는 서울 등 도시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였다.”(283쪽)
조풍연이 매일신보 전남주재기자를 할 때는 “관공서의 일본인 과장에게 ‘신문기자가 왔다’고 하면 반겨 인사를 받다가도 매일신보 기자요 하면 실망했다. 도무지 기를 펼 수가 없었다”고 회상한다.(284쪽) 조풍연이 매일신보 기자로 들어갈 때 조선인 기자들의 친목단체인 ‘철필 클럽(구락부)’에 매일신보 기자는 넣어주지도 않았다.
<탈출기> <토혈> 등에서 1920년대 프롤레타리아 계급해방을 외쳤던 소설가 최서해가 무절제한 생활과 폐병으로 신음하던 끝에 매일신보에 들어갔다. 총독부는 33인의 한 사람에서 돌아선 친일파 최린도 사장으로 영입했다. 변절한 민족주의자들은 총독부의 돈에 팔려 머리를 팔고 매일신보로 투신해 들어갔다.
매일신보는 일제 말기 50만 부까지 찍었지만, 독자가 보는 신문은 아니었다. 헌 신문지 값이 뛰어 만주 등에서 폐지 장사들이 앞다투어 사갔다. 대개 과수원에서 봉지 만들어 쓰는데 사용됐다. 조풍연은 전남주재기자를 포기하고 사표를 낸 뒤 <문장> 등 몇몇 잡지를 전전하다가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던 1941년 다시 매일신보로 들어간다. 신문사 편집국 안에서 국민복을 입고, 각반을 차고, 머리엔 전투 두건을 쓰고 일했다. 조풍연이 편집한 매일신보 사회면에는 연일 ‘미영격멸(米英擊滅)’과 ‘멸사봉공(滅私奉公)’ ‘호국충성(護國忠誠)’이 빠지지 않았다. 매일신보가 한민족에게 지은 죄는 헤아릴 수도 없다. 이렇게 조풍연은 매일신보에서 8.15 해방을 맞았다.
세계엔 수많은 이준희가 있다. 지미 카터의 안보담당보좌관이었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가 자신의 생물학적 고국인 폴란드를 위해 한 일은 없다. 2004년 부시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 담당 국장을 지낸 한국계 미국 시민권자 빅터 차도 마찬가지다. 빅터 차의 아버지는 이홍구 전 국무총리와 이회창 선진당 대표와 경기고 동기 동창(49회)이다. 어머니 역시 한국인이다. 장인은 11, 12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식 전 농림부 장관이다. 따라서 빅터 차는 분명히 생물학적으로 한국인이며 인종적으론 미국 사회에서 마이너리티에 속한다. 그런 빅터 차의 정치사회적 국적은 철저하게 미국인이다. 빅터 차는 조선일보 2004년 11월 19일 자 2면 단독 인터뷰에서 자신의 국가안보회의 발탁 배경을 묻는 질문에 “미국을 위해 봉사할 기회를 갖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한국계 미국인이란 게 발탁에 도움이 됐느냐는 질문에는 “한국에서 내게 갖는 기대를 만족시킬 수는 없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빅터 차는 백악관에 들어가기 전 2002년 2월14일 조선일보 3면에 실린 기명 칼럼에서 “부시가 강경한 어휘들과 ‘너그러운 무시’ 정책을 통해 북한을 진정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 실수”라며 북한에 대한 무력 사용을 촉구했다.
이준희 지국장은 브레진스키나 빅터 차의 전철을 밟지 말았으면 한다. 이번 기회에 할아버지가 쓴 글을 읽어 보기 바란다. 부디 할아버지처럼 식민지 지식인의 부끄러움을 반복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 책은 지난 92년 이준희 지국장이 인턴기자 생활을 했던 코리아헤럴드에서 인쇄했으니, 그 신문사 자료실만 뒤져도 쉽게 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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