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은 언론인이다

[낡은책] 레닌언론저작집 (레닌, 436쪽, 1992.8.30, 말길)

혁명이 절실했던 20세기 초 레닌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유일한 생각은 ‘전국적 정치신문’이었다. 레닌은 ‘언론’을 유일한 무기로 해 숨 막히는 짜르 체제의 전제에서 러시아 민중을 해방시켰다. 사방에서 옥죄여 오는 짜르 체제에 맞서 유연하고 순발력 있게 혁명조직을 운영하기 위해선 민중의 손에 직접 전달되는 언론만이 유일한 무기였다.

우리는 레닌을 혁명가라고 부른다. 그러나 레닌은 언론인이다. 부르주아로 태어나 무정부주의 혁명가로 죽어간 신채호도 가는 곳마다 신문을 만든 언론인이다. 베트남의 호 아저씨도 1942년 장개석의 감옥에 투옥돼 13개월 동안 무려 18개 교도소를 옮겨 다니면서도 글을 썼던 언론인이다. 마오쩌둥은 쫓겨가는 대장정의 험로 속에서도 결코 등사기만은 금지옥엽으로 껴안고 가면서 신문을 만들었다. 종이가 떨어져 제작이 불가능해지자 장개석의 군대가 비행기로 살포한 투항 권고 삐라의 뒷면에다 유인물을 인쇄해 배포했다. 앞뒷면이 전혀 다른 사상을 가진 유인물은 지금도 중국혁명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진실을 담은 언론이면 인민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낳은 위험한 선전전술이었다. (아래 시 참고)

뒷면 (베르톨트 브레히트)

내전 8년째인 1934년에
장개석의 비행기가 공산지역에서 삐라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모택동의 모가지에는 현상금이 걸려 있다”
낙인 찍힌 모(毛)는 부족한 종이와 넘치는 사상을 걱정한 끝에
한쪽만 인쇄 된 그 삐라들을 모으게 했다.
소중하게... 그리고
그 하얀 뒷면에 유용한 말을 인쇄케 해
주민들이 돌려가며 보도록 했다.


이 책은 언론인 레닌을 담았다. 레닌은 이 책에서 혁명적 신문의 계획(146쪽), 선전과 선동의 차이(130쪽)를 차분히 설명한다. 훌륭한 기능보다는 실체적 진실을 담아야 올바른 언론이라는 지적 또한 정당하다.(231쪽) 레닌은 혁명 직후 1919년 3월 당 대회 연설에서 정치신문에 대해 꼼꼼하게 발표한다.

1919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조직 활동에 280만 루블을 사용한 데 반해 신문발간에 3백만 루블, 편집경비에 360만 루블을 사용했다. 집회와 출장 등 조직활동비에 재정 대부분을 사용하고 5% 남짓 선전비로 사용하는 우리와 사뭇 대조적이다. 신문발간 비용보다는 편집비용으로 더 많이 지출했다.(317쪽)

여기서 편집비용은 디자인 비용이 아니라 실제 글을 작성하기 위한 취재와 원고 작성에 드는 비용이다. 디자인을 예쁘게 하고 보수신문에 광고하는데 열 올리게 선전이라고 생각하는 요즘의 선전비와는 질이 다르다. 그래서 이 책은 80년전에 작성된 낡은 책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에게 화두를 던지는 살아있는 교과서다.

[97쪽] 우리의 당면한 임무 (1899년 하반기)

러시아 사회민주주의가 독특한 상황에 놓여 있다. 독일,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신문 말고도 공개 활동을 위한, 운동을 조직하기 위한 수많은 다른 수단들, 이를테면 의회 활동, 선거 활동, 공공 집회, 공공 단체 참여, 공개 노조활동 등을 갖고 있다.

반면 우리 러시아는 정치적 자유를 따낼 때까지 ‘혁명적 신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혁명적 신문 없이는 전체 노동계급 운동의 광범한 조직화는 불가능하다. 독일 사회민주주의 베테랑 칼 리프크네히트의 말이 우리의 활동을 위한 좌우명이다. “학습하라, 선전하라, 조직하라!”


레닌이 처음 전국적 정치신문(언론)을 생각한 건 18세기 말이다. 사회주의자들이 의회에 진출할 정도로 공개적으로 활동하던 독일과 프랑스 등 서유럽과 확연하게 다른 러시아의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무기로 정치신문을 떠올렸다.

[130쪽] 무엇을 할 것인가 (1901년 겨울-1902년 2월)

선전가는 사회주의 사회로 이행의 필연성을 설명해야 한다. 선전가는 ‘여러 생각들’, 참으로 많은 생각들을 전달하기 때문에, 비교적 소수의 사람들만 그 생각을 이해한다.

반면 선동가는 청중에게 가장 인상적이며 널리 알려진 사실, 예를 들면 실직 노동자 가족의 굶어죽은 이야기, 날로 심해지는 빈곤 등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을 이용해 ‘한 가지 생각’을 대중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선동가는 모순의 보다 완전한 설명은 선전가에게 맡기고, 통탄할 만한 불의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일깨우려고 해야 한다. 따라서 선전가는 ‘인쇄된’ 글을 통해 활동하며, 반면 선동가는 ‘말’로 활동한다. 선전가는 선동가와는 다른 자질을 요구한다.


선전과 선동의 차이를 설명한 레닌의 이 말은 지금의 여러 활동가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레닌이 두 개의 차이를 설명한 내용보다는 선전은 글로, 선동은 말로 하는 것이라는 도그마에 빠질 우려가 있다. 선전은 여러 생각들을 정돈해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선동은 한 두 가지의 생생한 폭로로 대중의 분노를 촉발시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말로 하는 선전도, 글로 하는 선동도 가능하다.

[146쪽] 무엇을 할 것인가 - 전국적 정치신문을 위한 계획
[152쪽] 무엇을 할 것인가 - 신문이 집단적 조직가일 수 있는가?


여기선 그 내용은 소개하지 않는다. 110년 전의 상황과 많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독자들이 생생하게 읽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전국적 정치신문을 위한 계획’은 현재의 상황과 많이 달라 그대로 적용할 순 없다. 다만 잘 만든 신문은 어떤 조직활동가보다도 뛰어나고, 나아가 ‘집단적 조직가’의 기능을 할 수 있다.

[167-168쪽] 무엇을 할 것인가 - 우리는 어떤 형태의 조직을 필요로 하는가?

‘전국적 정치신문’을 중심으로 모이는 조직계획을 그토록 강력하게 주장하는 마지막 이유를 말할 차례가 되었다. 오직 이런 조직만이 전투적 사회민주주의 조직에 요구되는 ‘유연성’, 매우 다양하고 급속하게 변하는 투쟁 조건에 즉각 자신을 적응시키는 능력, 막강한 적과 공개 전투를 피하면서도 적이 전혀 예상치 못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적의 허를 찔러 공격할 능력을 확보할 수 있다.

혁명은 결코 일회적 행동이 아니다. 혁명은 완벽한 정적의 시기가 강력한 일련의 돌발사태들로 급격히 교체되는 것이다. 이런 봉기의 시기에 꼭 필요한 것이 러시아 인민의 삶 모든 측면을 조명하고, 가능한 많은 계층에게 소개되는 정치선동의 작업이다. 이 작업은 매우 자주 발행되는 전국적 정치신문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레닌은 여기서 급변하는 정세 속에 유연하고 순발력 있게 대응하는 기동타격전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무기로 ‘언론’을 들었다. 동시에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다는 장점도 들었다. 결국 혁명적 언론은 진지전인 동시에 유격전을 펼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라는 거다.

[194-195쪽]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에 보낸 편지 (1905.7.11)

중앙위의 업무가 어떤 내적 결함, 또는 업무의 조정방식에서 결함을 안고 있다. 중앙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영향력을 행사하지도 못하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중앙위가 당을 정치적으로 지도한다는 증거도 없다. 그러나 모든 중앙위원들은 죽도록 일하고 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내가 생각하기에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중앙위에 정규 유인물이 없다는 점이다. 혁명의 시기에 말과 개별 접촉을 통한 지도력이란 공상에 불과하다. 지도력은 공적이어야 한다. 3차 대회의 보고서는 지금도 러시아 어느 곳에서도 복사되지 않았다. 대중의 주목을 끄는 임무를 이해하는데 전적으로 실패했다. 중심도 없고, 당도 없다. 중앙위원들은 처절하게 일하지만, 완전히 힘을 낭비하고 있다.

정치적 지도력은 무엇보다도 먼저 유인물을 발행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 지역모임, 회의에 개인으로 참석해 연설해야 한다. 먼저 중앙위 회보,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 발행되는 유인물을 통해 모든 중요한 문제를 다뤄야 한다.


레닌은 러시아 1차 혁명기의 혼란스런 당 중앙의 활동을 지적하면서 그 대안으로 ‘언론’을 지적했다. 레닌은 전국적 정치신문 하나로 모든 언론전략을 수행하라고 하지 않았다. 대중적이고 전국적인 정치신문이 필요한 반면, 활동가들을 위한 당 중앙위원회의 독자적인 매체도 필요하다고 구분하고 있다. 요새 말로 하면 선전전략은 투톱 체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231쪽] 지역의 적군과 노동자 소비에트에서 행한 연설 (1920.1.24)

인민들은 모든 종류의 선전을 다 듣고 있다. 볼세비키의 선전이 더 ‘능숙’하기 때문에 인민들이 따르는게 아니다. 핵심은 바로 볼세비키의 선전이 ‘진실’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현재의 진보운동 진영이 새겨 들어야 할 대목이다. 유인물 예쁘게 만들고, 예쁘게 디자인한 광고를 보수일간지에 내는 기능적 측면으로만 선전활동을 바라보면 망한다. 대중은 진실을 찾기 능숙한 기능을 찾지 않는다.

[317쪽] 러시아 공산당 8차대회 연설 (1919.3.18)

우리는 여기서 매우 상세한 재정보고를 했다. 항목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노동자용 문고와 신문발간에 관한 것인데, 3백만 루블이 들었고 당 조직에 280만, 편집경비에 360만 루블을 지출했다.

[413쪽] 러시아 노동자, 농민, 코사크족, 적군대표 소비에트 6차 임시대회 연설 (1918.11.8)

제국주의 적들은 우리가 프로레타리아 독재를 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들 말이 옳다. 우리는 그것을 숨기지 않는다. 1918년 10월 23일자 영국의 부르주와 신문 ‘맨체스터 가디언’은 이렇게 썼다. “만약 동맹군이 여전히 러시아에 머물면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면 그들의 목적은 러시아의 혁명에 영향을 주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동맹국 정부는 러시아에서 활동을 중지하거나 그들이 볼세비즘과 전투를 벌이고 있음을 알려야만 한다.” 혁명의 중심세력을 분쇄함으로써 다른 나라의 혁명을 분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1842년 우리의 울산, 마창공단 같은 노동자 밀집지역에서 창간된 영국신문 ‘맨체스터 가디언’은 1959년 맨체스터라는 지명을 빼고 가디언으로 제호를 바꿔 지금도 중도좌파 쯤으로 전세계 진보진영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당시 프로이센과 프랑스 양진영을 모두 공정하게 취재해 높은 명성을 얻었다. 가디언은 남아전쟁(南阿戰爭)에 분연히 반대하여 한때는 우익 진영의 집중공세에 시달려 위기에 봉착한 적도 있다. 그 편집정신과 용기는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문학·예술에 대한 탁월한 취재와 비평, 외신란도 유명하다. 1956년의 수에즈 분쟁 때에도 시종일관 군사행동에 반대했다.

그러나 1918년 러시아 혁명 직후 레닌의 눈에 가디언은 이미 부르주아 신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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