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량이 어마어마하다. 이 동네에서는 정말 두껍다고 소문난 <더 레프트>나 <영국노동계급의 형성>같은 책에 견주어도 두께에서 밀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내용은 술술 잘도 넘어간다.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유년시절과 성장, 사회생활과 결혼, 투쟁과정을 거치며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다가도 중간 중간 스펙터클하게 흠뻑 빠져들게 만든다. 그러나 혹자가 당시 투쟁을 기억하고 이미지로 그려낼 수 있다면 잊지 못할 장면들까지 오버랩 돼 책장을 빨리 넘기지 못할 것이다.
어떤 책을 보던 표지를 처음 봤을 때 딱 느껴지는 게 있다. 그게 책의 첫인상일 텐데, 책 제목 ‘나, 여성노동자’는 이중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우선 ‘노동자 자기역사쓰기’를 수행한 열여덟 명의 여성노동자들 자신이 바로 ‘나, 여성노동자’일 것이다. 그리고 책을 집어든 우리 또한 ‘나, 여성노동자’로서 현재의 나를 돌아보게 된다. 물경 사십 년의 세월로 만나는 ‘나, 여성노동자’는 우리의 어머니이자 나 자신이고, 나와 자녀들이다. 그렇게 ‘나’는 모두가 노동조합의 주체, 운동의 주체, 삶의 주체로서 거듭난다. ‘나, 여성노동자’라는 제목은 그래서 뿌듯하다. 아주 든든한 동지를 만난 것 마냥.
1970~1980년대 여성노동자, 민주노조와 함께한 삶을 말한다
유정숙, 신순애, 김한영, 이승숙, 유옥순, 박육남, 조분순, 성훈화, 김덕종. 1970~1980년대 여성노동자, 이들은 민주노조와 함께한 삶을 말한다. 부당함에 맞서 흔들림 없이 싸워 자본을 이기고 결국에 자신을 이긴 사람들이다. 몸서리쳐지는 가난한 환경과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배움의 문턱에서 꿈을 접어야했던 사람들. 딸로 태어난 것 자체가 원망인 시절, 그녀들은 무능한 부모와 어린 동생들을 벌어 먹여야 했다. 허리도 못 펴며 며칠씩 잠도 못 자고 기계처럼 일해야 했던 그녀들이 노조를 만들고 합법성을 쟁취하기까지 형언할 수 없는 모진 탄압을 견뎌냈다. 그 과정에 전태일은 ‘빛’이었다.
그녀들을 삶의 주인으로 이끄는, 싸우는 자만이 알 수 있는 진리. 청계노조를 지키고 구로동맹파업을 일궈낸 그녀들은 ‘연대’만이 노동자를 노동자로 단련하는 길임을 일깨운다. 비합법투쟁과 정치투쟁, 그리고 가두투쟁, 노동법 공부와 노동조합 소모임, 그리고 사회주의 학습으로 이론과 실천을 변증법적으로 통일시키려했던 그녀들. 소련과 동구가 몰락해 선배 학출들이 대거 현장을 빠져나가도 허다한 지식인들이 배신자가 되어도 노동조합을 세우고 지킨다는 열정과 의기투합으로 그녀들은 당당했다.
2000년대 여성노동자, 비정규직 삶을 말한다
이경옥, 윤옥주, 이매순, 김용래, 김소연, 석명옥, 원문숙, 이화자, 심선혜, 최보희. 2000년대 여성노동자, 이들은 비정규직 삶을 말한다. 40년이 흐른 지금, 신자유주의로 말미암아 간접고용 비정규직이 대세가 되었다. 장시간 노동강도로 고통 받는 현장은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성폭력도 일상적이다. 수당과 퇴직금은커녕 조출과 몸수색, 생리검사까지도 여전하다. 물론 투쟁하려고 모인 노동자들에게 노조가 인정될 리 없다.
노동자들이 싸우면 폐업하고 자본 철수하는 것까지. 어쩌면 그렇게 하나도 안 변했는가. 청계노조가 노조설립신고서를 받기 위해 7년간 싸웠듯 기륭노조도 1,895일 투쟁의 합의문을 만들어내기 위해 6년을 싸웠다. “달랑 종이 한 장”을 손에 쥐기 위해. 하지만 그녀들이 손에 쥔 것은 허탈한 한 장 종잇장이 아니라, 여성노동자로서의 ‘자존심’이고 ‘연대의 힘’이라는 무기였다. ‘나, 여성노동자’는 말한다. 여성노동자로서 나는 당당하다. 그리고 함께한다는 것으로부터 존재한다.
그녀들이 던지는 쉽지 않은 문제들
70년대, 민주노조와 연대투쟁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그토록 바라마지 않았던 산별노조의 염원은 민주노총 조합원의 삼분의 이가 산별노조 조합원인 지금, 그녀들의 바람대로 이루어졌는가? 더 잘 싸우고 더 폭넓게 연대하기 위해 필요로 했던 산별노조로서 자리하고 있는가? “배운 만큼 보인다”고 하나라도 더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녀들의 공부 열망은 오늘날 채워지고 있는가? 그 많던 소모임은 어디로 갔나? 우리는 진정 무엇을 배워야 하나?
이랜드나 기륭에서처럼 줄기차게 싸우는 노조들이 국면을 돌파하기 위해 선거 시기 노동자후보를 내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노동조합에서 여성으로서 또 해고자로서 문숙 씨가 겪어야했던 억압과 배제는 언제쯤 해소될 수 있을까? 가부장적인 체제가 온존하는 노동조합에서 여성노동자들은 어떻게 싸워야하나? 모든 노동자가 ‘여성의 눈’을 가질 수는 없을까? 지율 스님의 백일 단식에 이어 김소연 분회장의 단식은 노동자투쟁의 신화가 되었다. 창동모친 이소선 어머님의 “꼭 살자. 살아서 싸우자”는 말을 우리는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죽음을 강요하는 자본에 맞서 어떻게 같이 살아남아 투쟁해야 할까?
없어져야할 호칭 1호! 70년대 ‘7번 시다’ vs 2000년대 ‘아줌마’
‘7번 시다’가 순애 씨로 불리었을 때 순애 씨는 노동자로 다시 태어났다. 전태일을 알고 빛으로 나온 정숙 씨. 생협을 통해 여성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한영 씨. 나에 대한 배려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승숙 씨. 출산휴가 쓰기와 직장탁아소 문제를 확산시킨 옥순 씨. 남성간부에게 “부녀부장이라고 불러라”고 한 육남 씨. 노동조합 활동할 땐 앞뒤 재고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는 분순 씨. 네 것 내 것 없이 공동으로 살았다는 훈화 씨. 농성장에서는 무엇이든 뚝딱 만들어내는 조합원들의 다재다능함을 격찬한 덕종 씨.
나의 자존감을 지켜준 노동조합에 대해 말하는 경옥 씨. ‘알몸투쟁’과 ‘7보1배’투쟁의 상징을 알려준 옥주 씨와 매순 씨. 문자해고 원조 기륭과 싸운 1,895일을 말하는 소연 씨. ‘아줌마’라는 호칭이 가장 힘들다는 명옥 씨. ‘불사모’(불만 있는 사람들의 모임)가 현장을 바꾼다는 문숙 씨. 마음이 하루에 천 번도 더 변하지만 더 이상 잃을 게 없기 때문에 싸운다는 화자 씨. 돌봄노동이라는 새로운 운동영역을 개척하며 보육노동자의 길을 걷는 선혜 씨. 주체적인 여성으로 노동자가 주인인 세상을 꿈꾸는 보희 씨. 민주노조와 함께한 삶을 말하고 오늘 비정규직 삶을 말하는 우리는 여성노동자다.
우리도 자기역사를 쓰자
어떻게 해서든 배우려고 노력했던 그녀들. 책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했던 그녀들. 희수에 대한 미안함이 상처가 됐던 훈화 씨가 <아름다운 연대>와 <같은 시대 다른 이야기>를 통해 가슴에 묻혀있던 이야기를 꺼내 자신의 삶이 다른 사람과의 삶과 함께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고 말했을 때 코끝이 찡했다. 자기를 말한다는 것. 어느 누구도 아닌 자신만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고 쓴다는 것. 바로 이것, 정작 자기 자신과 마주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겹고 고통스런 일인가?
‘나, 여성노동자’ 모두에게 힘껏 박수를 친다. 오늘을 사는 우리. 투쟁하는 우리는, 노동조합은 “새로운 여행”이고, 노동조합 활동할 때가 “내 삶의 전성기, 절정”이라고 명옥 씨처럼 말할 수 있을까?
끝으로 이 책의 소소한 재미는 내가 아는 사람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읽는 이들도 최소 두어 명은 알고 지내는 사람들일 것이다. 내게는 고 유구영 선배님을 비롯하여 그 유명한 기륭의 은미 씨가 그랬다. 그리고 존경해마지 않는 권수정 동지와 같이 일했던 박하순 선배도. 엮은이는 지난 수년 동안 묵묵히 여성노동자들의 투쟁과 삶을 겸손하게 주워 담아온 내공으로 ‘노동자 자기역사쓰기’를 퍼뜨리고 있다. 이 무서운 바이러스에 더 많은 노동자들이 감염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