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4년 한국어판 표지 |
이 책은 영국의 헨리 펠링 교수가 1961년 런던에서 출판한 것을 건국대 고 이방석 교수가 1964년에 번역해 한국에서 출판했다.
헨리 펠링 교수는 전적으로 사민주의의 입장에서 영국 노동당 성공의 역사를 썼지만, 영국 노동당은 이 책에 서술된 초기 60년 동안 매번 당의 위기 때마다 오른쪽으로 갔다. 여기 오른쪽은 영국 민중의 삶과 반대방향을 뜻한다.
따라서 이 책은 철저히 거꾸로 읽어야 한다. 펠링 교수가 노동당내 논쟁 때마다 자주 사용한 ‘좌파 반란자’는 ‘정통 맑시스트’로 읽어야 하고, 당이 크게 성장했다는 부분은 대중추수주의 정당으로 변모했다는 정도로 이해해야 한다.
거꾸로 책 읽기
거꾸로 읽기는 어렵지 않다. 저자와 번역자가 당의 역사를 워낙 꼼꼼하게 서술해놔서. 다만 60년대 중반 한국 지식인의 한국어 문법이 워낙 일본어 체계라서 일본책을 읽는 착각이 들 정도로 비문 투성이란 점은 각오해야 한다.
▲ 동아일보 1964년 11월 14일자에 실린 한글판 신간 안내 |
그렇다고 당권파에 대항해 싸웠던 영국 맑시스트가 늘 옳았던 것은 아니다. 1906~1908년 초대 당대표를 지낸 케어 하디조차도 스코틀랜드 광부 출신이란 자신의 계급적 신념을 버리고 합리적 의회주의자로 발 빠르게 옮겨 갔다. 코민테른의 지휘 하에 움직인 이후 영국 공산주의 세력 역시 노동당을 도구로 사용할 줄만 알았지, 계급정당으로 키워 나갈 아무런 전망도 갖지 못했다.
이 책은 지난 1999년 고세훈이 쓴 같은 이름의 책 ‘영국노동당사’(나남)와 다른 책이다. 고세훈은 자신이 영국 유학을 통해 보고 듣고 배운 영국노동당사를 이방인의 눈으로 재해석해 서술했지만, 이 책은 1900~1960년까지 60년 동안의 영국노동당 성장과정을 내국인의 눈으로 서술한 책을 원문 그대로 번역했다.
▲ 헨리 펠링 교수 |
번역자 이방석은 역자 후기에서 “맑스 공산주의와 정면 대결을 통해 진정한 민주정치의 달성을 목표로 하는 오늘날의 영국 노동당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이 책을 썼다”고 밝혀 그 자신도 원저자의 입장과 동일했다. ‘1964년’이란 번역 시점에 한국에서 이만한 책이 나온 것만으로도 후한 점수를 줘야 할지도 모른다. 1964년 11월 14일 동아일보 신간소개란에 실린 한국어판 초판 발행 당시 책 가격은 ‘18원’이었다.
▲ 이방석 교수 |
이방석은 건국대 교수 시절 6.3 학생운동사에 길이 빛나는 ‘전국남녀대학생 정치외교 학술토론대회’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숙명여대에서 오전 10시부터 열린 이 토론대회는 각계의 비상한 관심 속에 ‘한일 국교정상화’ 의제를 둘러싸고 격렬한 설전을 벌이며 국교 정상화의 맹점이 낱낱이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하에 출판된 이 책의 한계는 명확하다. 이방석 역시 저자 헨리 펠링과 같은 혁명을 뺀 사민주의의 시각에서 이 책을 번역했다.
제1장 새로운 정당 - 그 이념과 실제
▲ 1961년 원서 표지 |
영국노동당은 1960년 2월 말 창당 60주년을 맞았다. 초기 6년 동안 당 이름은 달랐다. 창당 이래 1906년 1월 총선거 직후까지 당 활동은 ‘노동대표위원회’(LRC)라는 아주 온건한 단체명으로 했다. 영국은 1867년과 1884년에 수공업노동자에게 선거권을 부여해 노동자들이 선거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런 19세기 후반의 사회적 경제적 변화가 노동당을 출범시켰다.
1997년 ‘국민승리21’로 출발해 2000년 민주노동당을 창당한 우리와 비슷하게 영국노동당도 1900년 ‘노동대표위원회(LRC)’에서 출발해 1906년 정식 창당했다. 영국노동당은 노동자 투쟁의 결과로 1867년과 1884년 선거권 확대 등 정치세력화의 외부적 조건에 부응해 출현했다. 한국의 진보정당도 마찬가지다. 민주노동당의 창단 역시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10여년을 거치면서 무르익었던 외부적 조건과 무관하지 않다.
기술의 발달로 일반노동자와 숙련공 사이의 숙련의 차이가 줄어들자 수공업노동자들의 견고한 단결을 불러왔다. 당시엔 노동자 다수가 지지했던 자유당의 정치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자유당 연맹체는 너무 고루했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계급이 나타나는 데 적응할 수 없었다.
1870년의 교육법 제정으로 모든 수공업 노동자들이 공립학교나 교회학교에서 교육 받을 수 있었다. 1880년대부터는 비숙련노동자들도 자신의 노조를 만들 수 있었고, 노동조합회의(TUC)에 가입할 수 있었다. 비숙련노동자들은 원만하지 못했던 숙련공 계급과 연대를 구하기도 했다. 양집단의 일부는 자본주의를 완전히 혁명하는 사회주의를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시대변화와 달리 불행하게도 1870~1880년대 자유당의 구조는 더 폐쇄적으로 변했다. 대부분 실업가, 전문직업인, 비국교파 목사들의 주도하에 있는 자유당 지방조직은 노동계급을 거의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독립노동당(ILP)은 1893년 독자적인 노동자대표를 의회에 보낼 목적으로 브래포드에서 창당했다. 초기 지도자들의 일부는 자유당 의원으로 입후보했다가 낙선한 사람들이었다. 스코틀랜드의 광부인 ‘케어 하디(1856~1915)’는 1892년 의회에 무소속 노동계급 출신 의원으로 당선됐고, 독립노동당 이념의 화신이었다.
1894년 수상 그랫스톤 사임하자 그 후임은 빅토리아 여왕이 지명한 로즈베리 경이었다. 그랫스톤은 국민의 신망이 거의 없는 젊은 귀족으로 고작 15달 수상으로 재임했다. 그랫스톤은 아프리카와 기타 지역 영국제국 팽창의 강한 지지자였다. 1899년과 1900년 사이 ‘노동대표위원회(LRC)’가 실제로 결성될 무렵 독립노동당과 사회주의연맹과 훼이비언협회 등 사회주의단체들은 매우 미약했다. ‘제국주의’가 당시 영국정치의 주요 의제였다.
2. 노동조합의 투쟁
1880년대 말에 노동조합주의의 급격한 팽창에 대항한 고용주들의 강력한 반동이 있었다. 1891년에 제정한 노동조합법은 1896년 일부 개악돼 노동조합의 법적 지위를 침해했다. 고용주들은 파업을 방해하려고 1893년 전국자유노동연맹을 창설해 노조주의를 직접 공격했다. 전국고용주연맹도 성장했는데 기술고용주연맹이 그 좋은 예다. 1898년에는 고용주들은 의회 안에 원내위원회를 구성했다. 노사 소송사건의 최종 중재자는 하원이었다.
1899년 9월 노동대표위원회(LRC)는 의회에 노동계급대표를 보내기 위한 제 사회주의단체에 특별회의를 소집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안의 주요 지지자들은 새로운 비숙련노동조합의 지도자들이었다. 노동대표자대회는 1900년 2월 27~28일 런던 메모리얼 홀에서 열렸다. 우리는 이 모임을 영국노동당의 창당으로 본다. 한편 독립노동당은 당시 젊은 언론인인 ‘람제이 맥도날드(1866~1937)’를 당의장으로 지명했다.
1900년 영국 노동당이 출범했고 100년 뒤 2000년에 한국에서 민주노동당이 출범했다. 한 세기 늦게 출발했지만 민주노동당은 더 빨린 영국 노동당을 따라갔다. 언론인 출신의 람제이 맥도날드가 당의장을 맡은 것도 초기 민주노동당에서 같은 언론인 출신 권영길 대표의 모습과 흡사하다. 초기 당 내부의 의결구조에서 노동자 중심성이 확고했던 것도 닮았다. 영국 노동당이 초기 주요 결정기구의 2/3를 노조대표자가 장악했던 것과 민주노동당의 초기 모습도 닮았다.
노동당에 초기 1년 동안 가입한 노동조합은 새로운 비숙련노동조합들이었다. 당은 철도법안을 토론했다. 당시 급격한 기술변화는 인쇄업자조합을 난관에 빠뜨렸다. 노동대표위원회 중 2/3가 노동조합대표자들이었다. 당에는 독립노동당, 맑스주의의 사회민주연맹, 훼이비언협회 등 제 사회주의단체들도 들어왔다. 집행위원회에 훼이비언협회는 1석을 차지했다. 다른 단체는 각 2석씩 확보했다. 전체 노동대표위원회는 모두 12명이었고, 이 가운데 노동조합이 아닌 단체는 5석이었다. 위원장은 독립노동당의 케어 하디(1856~1915)였다. 사회민주연맹은 노동대표위원회의 창설회의에 참가했지만 불만이 많았다. 사회민주연맹은 다음해 1901년 노동대표위원회 회의에서 ‘계급투쟁’ 이론이 거부되자 위원회를 탈퇴했다. 훼이비언협회의 대표인 에드워드 피스는 노동대표위원회를 새로운 정당으로 발전시키려는 독립노동당의 기도에 반대했다. 훼이비언협회는 위원회 안에서 사회주의엔 반대하고 노동조합주의엔 찬성했다.
3. 정당 탄생의 진통
노동대표위원회는 창설 6개월만에 총선거를 맞았다. 노동대표위원회는 15명의 후보를 내세워 2명을 당선시켰다. 선거비용은 겨우 33파운드였다. 2명의 당선마저도 위원회의 노력보다는 행운이었다. 더비에서 철도노조 위원장인 ‘리차드 벨’이 자유당으로 당선하고 머시어에선 ‘케어 하디’(1856~1915)가 당선했다. 당시 2명의 의원으로는 노동대표위원회는 의회에서 많은 성과를 낼 수 없었다. 특히 2명의 의원은 서로 일치하지도 않았다. 케어 하디(1856~1915)는 노동대표위원회 의견보다는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사회주의자였고, 벨은 노조 관련 문제를 빼고는 자유주의자에 불과했다.
1901년 7월 하원의 ‘테프 베일’ 판결이 노동대표위원회의 회원가입 투쟁을 강화시켰다. 테프 베일 철도회사는 1900년 노동자 파업에 막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냈고 하원이 회사의 손을 들어줬다. 하원의 법적 판결의 충격에 노조지도자들은 밀리지 않기 위해 투쟁했다. 노조지도부는 테프 베일 판결 이전 상태로 복귀하는 입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하원내 기존 정당에 압력을 가하고 야당인 자유당의 지지를 구했다.
의원 2명의 미니정당 시절 노동당은 자유당에 기대 생존해왔다. 김대중 노무현 두 자유주의자가 집권했던 시절 지자체와 의회에 진출한 민주노동당은 겉으론 강하게 집권세력과 충돌했지만, 안으로는 그들과 부분 제휴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 노동조합도 한 세기 전엔 사용자들의 무분별한 손배가압류 때문에 지금의 우리처럼 많은 고통을 받았다. 영국은 지난 1992년 노조법을 개정해 ‘노동조합에 대한 불법행위 손해배상의 상한’을 아래 표로 만들어 관리해왔다. 조합원 숫자에 따라 손해배상액의 크기를 달리한다. 우리 민주노동당도 현실적으로 이런 수준의 법안을 준비해야 한다.
노조는 노동대표위원회를 후원하는 노조 수의 배가운동을 시작했다. 노동대표위원회 후원자는 1901년초 37만6천명에서 1년 뒤 46만9천명으로 늘었고 1903년엔 89만1천명으로 늘었다. 회원수 증가는 위원장 데이비드 쉨트레톤 중심의 ‘방직노조’가 주축이었다. 쉨트레톤은 1903년초 방직노조를 노동대표위원회에 가입시키고, 1902년엔 기계공노조도 가입했다. 위원회에 가입하지 않은 유일한 대규모 노조는 광부노조 뿐이었다. 광부노조는 자유당과 협력해 지도자를 의원 당선시킬 수 있었기에 위원회에 소극적이었다. 노동대표위원회는 1903년 2월 뉴 캐슬에서 2차 대회를 열어 정치기금 규정을 제정했다. 정치기금을 조합원 1천명당 10씰링에서 약 5파운드로 높였다. 이런 변화는 새 정당으로 발전하는 노동대표위원회의 독립성을 높였다. 결국 당시 자유당 원내총무였던 허버트 그랟스톤도 노동대표위원회와 일정한 타협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창당 이후 10년 동안 줄곧 사용해왔던 우리의 당원 배가운동처럼 영국 노동당도 같은 방식으로 성장했다. 여기서도 자유주의 정당과 독자적 제휴가 가능할 정도로 힘이 쎈 노조는 상당기간 노동당 지지를 유보했다. 노동자의 독자정당 건설이 ‘시기상조론’라고 주장했던 세력도 이와 비슷하다. 민주노총도 정치위원회 구성과 정치기금 마련을 공식의결기구에서 결의했듯이 영국 노동대표위원회도 당의 초기부터 노동당의 주요한 자금줄이었다.
조기선거 움직임이 있자 그랟스톤과 람제이 맥도날드(1866~1937)는 노동대표위원회와 자유당의 후보연합전술을 비밀히 협상했다. 그러나 조기선거는 실시되지 않았다. 급진파와 독립노동당이 남아프리카 전쟁에 반대할 때부터 자유당원과 사회주의자 사이에 관계가 회복됐다. 연합정부 집권기엔 통일당원이 야기한 문제 때문에 양자의 관계는 더 좋아졌다.
자유당과 노동대표위원회 지지자들(훼이비언협회만 빼고)은 단결해 1902년 교육법에 반대했다. 양자는 다같이 1903년 이후 갑자기 정치문제로 비화한 관세개혁안인 챔버레인 계획을 공공연히 비난했다. 노동대표위원회의 보궐선거 성공 후 자유당은 노동대표위원회와 협동할 가치를 더 크게 느꼈다. 크룩스와 아더 헨더슨(1863~1935)의 보궐선거 당선으로 노동대표위원회는 하원에서 5명의 의원을 확보했다. 그러나 먼저 금뺏지를 달았던 벨 의원은 이미 공식적으로 노동대표위원회를 탈퇴한 뒤였다.
4. 노동대표자회의의 성공
1906년 1월 총선거에서 람제이 맥도날드(1866~1937)의 계획이 완전히 성공했다. 총선결과 자유당은 377석을 얻었고 나머지 모든 정당은 겨우 84석에 불과했다. 후보 50명을 낸 노동대표위원회는 29석을 얻었다. 당선된 29명 중 5명만 자유당 후보와 맞서 당선됐다.
노동대표위원회는 총 50명의 후보를 냈다. 40명은 개별 노조에서, 나머지 10명은 독립노동당에서 지원했다. 50명 가운데 18명만 자유당 후보와 대항했다. 자유당과 노동대표위원회 사이의 협동은 랑카셔지구에서 가장 크게 성공했다. 원래 랑카셔지구는 강한 보수당 지역이었다. 이번 총선의 쟁점은 보수당과 자유당이 충돌했던 관세개혁과 중국식 노동문제, 교육법, 아일랜드 자치문제 등이었다.
노동당 당선자 29석 가운데 12석이 랑카셔지구였다. 당선자 29명 가운데 하디, 맥도날드, 스노우덴 등 7명은 독립노동당 후원을, 나머지는 노조나 지방노동단체 후원을 받았다. 가스공노조의 위원장 윌 토네만은 사회민주연맹 회원이었다. 10명의 당선의원이 2명을 뽑는 중선거구에서 나왔는데 나머지 한 명은 자유당 후보였다.
29명 모두가 노동자 출신이었다. 미국인 스탠튼 코이트 1명만 빼면 사실 50명 후보 모두가 노동자 출신이었다. 당선자들은 가스공노조, 강철제련노조, 조선공노조, 기계공노조 등 주요 노조의 위원장이었다. 1~2명은 맑스주의자였다. 노동대표위원회의 성공은 당시 국민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버나드 쇼를 포함한 소수의 사회주의자들도 노동대표위원회가 자유당 조류를 막는 세력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 총선은 전체적으로 자유당 원내총무인 그랟스톤주의의 승리였다.
제2장 압박하의 압력단체(1906~1914)
1. ‘노동당’으로 개칭
1906년 의회 소집 직후 노동대표위원회는 이름을 ‘노동당’으로 바꾸었다. 1906~1914년 노동당은 많은 파란곡절을 겪었다. 노동당을 의회에 진출시킨 거대한 자유주의 바람은 1910년 두 번의 선거에서 많이 쇠퇴했다. 노동당은 1910년 두 번의 선거에서 수 개의 의석을 상실했다. 노동당 의원 수는 1906년 29명에서, 1910년 1월 선거결과 40명으로, 1910년 12월 선거결과 42명으로 증가했지만, 내용상 자유당과 광산노조의 연합 수준에 그쳤던 광산노동자 출신 의원을 빼면 줄었다. 1910년 선거는 1909년 광산노조가 노동당에 가입한 직후에 치러졌다. 1910년 12월 선거결과 42명이 당선했지만 보궐선거에서 줄어들어 1914년 대전 발발 땐 37명에 불과했다. 이들 중 12명은 광산노조 지도자들이었기에 실질적 의원 증가는 없었다.
노동당을 자유당에서 분리하는 데는 여러 가지 곤란이 있었다. 당시 정부는 계속 집권하려면 노동당과 아일랜드 국민당의 지지가 꼭 필요했다. 노동당은 당시 극심한 재정난으로 대담한 의회해산의 모험전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노동당은 1910년 12월 선거에서 겨우 잔존했다. 노동당 의원 대다수가 자유당의 지원으로 당선됐다. 노동당 의원은 모두가 노동계급 출신이었고 그들 중 약간은 대단히 유능한 인사들이었지만 대부분 직업적인 훈련과 행정경험이 부족했다. 노동당 자체의 결합력도 부족했다. 노동당은 독립된 제 단체의 연합체에 불과했다.
영국 노동당은 1900년 창당 이후 1923년 까지 매번 총선에서 의석 수는 한 번도 줄어든 적이 없다. 그러나 1906년부터 1914년 1차 대전 직전까지 실제 의석은 줄었다는 펠링 교수의 입체적 분석은 매우 중요하다. 결국 1900년 2명의 의원을 배출한 노동당은 당명을 노동당으로 바꾼 직후에 치러진 1906년 총선에서 29명을 당선시킨 이후 1914년 1차 대전까지 약 8년 동안 초기 침체기를 겪었다. 1914년 전쟁 발발 직전 37명의 의원을 확보했지만 노동당 소속이라고도 말하기 어려운 수준의 광산노조 출신 12명을 빼면 25명의 의원 밖에 없었다.
이는 자유당과 선거연합과 제휴 등으로 겨우 겨우 지탱해간 세월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진보정당도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
노동당 내 의장 후보자는 2명이었다. 독립노동당의 사회주의자 케어 하디와 직물공노조의 비사회주의자 쉑크레톤이었다. 결국 케어 하디(1856~1915)가 당선됐다. 1908년엔 하디의 뒤를 이어 사회주의자들이 뽑은 아더 헨더슨(1863~1935)이 의장직을 승계했다. 헨더슨은 고참 노조지도자였다. 1910년 헨더슨의 뒤를 이어 기계공노조의 위원장 조지 바네스가 다시 승계했다. 조지 바네스가 1911년 병으로 사임하자 맥도날드가 승계했다.
빈번한 의장직 교체와 당 소속 의원들 사이의 정치적 견해의 차이로 당의 기강이 해이해졌다. 사회주의자 하디는 결국 공정한 의회주의자로 밝혀졌지만 개인 욕심을 앞세웠다. 하디는 1909년 노동당 당 대회에서 여성 참정권 입법에 반대하는 결의안이 통과되자 즉시 원내 정당의 의장직을 사퇴했다. 원내정당은 그 결의안을 신속히 통과시켰다. 이 사건은 노동당의 의사규정에 그 유명한 ‘양심조항’의 기원이 됐다.
하디 사퇴 이후 1908년 의장직은 받은 헨더슨은 경험이 부족했다. 하디는 새 의장 헨더슨이 자유주의자라며 깊이 의심했다. 하디는 “헨더슨이 의장으로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 반동과 공포가 지배할 것이고 광부들이 당 연차대회에 참석할 때는 석탄과 면화에 의해 지배될 것이고, 이런 사태는 심한 반동을 뜻한다”고 말했다.
당내 이런 불신과 의견 불일치는 많은 알력을 초래했다. 1910년 이후 하디, 스노우덴, 조지 란즈베리(1859~1940) 등 사회주의 반란자의 탈당파가 생겼다. 맥도날드는 사회주의 반란파에 가담하지 않았다. 보험법 제정에 조력한 대장성 관리 브레이스웨이트가 1911년 노동당 간부를 놓고 “그들은 인민을 대표하지 않고 모든 인민이 무엇을 원하는가도 모르고 인민들과 협의하기도 곤란한 존재들”이라고 혹평했다.
2. 사회개혁의 부르짖음
노동당은 원내정당 내부에서 사회주의자들의 반항이 있었다. 원외정당의 사회주의자들은 더 반항적이었다. 테프 베일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자는 노동쟁의법 개정안과 아주 제한된 학교급식법은 사회주의자들에게는 큰 흥미가 없었다. 두 법은 1906년 노동계급의 승리였다. 1907년 콜네 밸리 지역의 보궐선거에 그래이슨이란 젊은 독립노동당원이 지역의 노조지도자들의 동의 없이 입후보하려고 했다. 그래이슨은 자기를 청렴한 사회주의자라고 선전하면서 전 자유당 의석을 차지하려고 했다. 그래이슨은 노동당 의원들에겐 추방자로 여겨졌다.
노동당은 1909년 선거기간에 법원으로부터 예기치 않던 타격을 받았다. ‘오스본 판결’은 개별 노조로부터 정치자금을 받던 노동당의 조직을 불법이라고 선언했다. 합동철도노조 회원이었던 오스본은 강제적 정치기금 징수를 거부했다. 법원은 노조의 합법적 목적 중 정치활동 규정이 없어 불법이라고 판결했다. 하원은 노동당 의원이 당의 지령을 준수하는 선언을 해야 한다는 제도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판결은 당을 재정적으로 어렵게 했다. 노동당은 노조의 후원으로 판결을 번복시키기 위한 입법을 추진키로 했다. 노동당은 1910년 두 번의 선거를 맞았다. 노동당은 두 번의 선거를 거치면서 자유당으로부터 독립이 명확해졌다.
영국도 초기엔 노조의 정치활동을 불법으로 몰아세운 보수진영과 사법부의 횡포에 상당기간 시달렸다. 이는 단순히 정치활동만의 문제를 넘어서 노동자 정당의 지속가능성에 핵심이라 할 당의 재정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최근 한국에서 정치자금법으로 민주노동당과 전교조, 공무원노조, 사무금융연맹 등이 여러 어려움을 겪은 점과도 흡사하다.
1910년 1월 선거에서 그래이슨은 패했으나 그는 이미 원외에서 더 중요한 존재였다. 그래이슨은 노동계급동맹의 방해자로 사회주의운동을 보다 자유롭게 하려는 운동에 매진했다. 이 운동은 교조적으로 맑스주의인 사회민주연맹 뿐만 아니라 독립노동당의 대다수 대중당원도 지지했다.
1909년 이후 독립노동당대회는 케어 하디와 람제이 맥도날드의 세력대결장이었다. 1910년 새로 조직한 평의회 4명의 위원이 ‘노동당을 개혁하자’는 팸플릿을 발행했다. 팸플릿 표지가 녹색이라 녹색선언서라 불렀다. 책자는 독립노동당 본래의 위치를 포기하려는 당의 지도체계를 맹렬히 비난하고 “노동당은 두 개의 자본주의 정당(보수당과 자유당)에 차별 없이 대항해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했다. 독립노동당 내부의 경쟁은 더 격화했다. 녹색선언서의 반란자들은 당의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했다.
1911년 독립노동당은 안팎에서 노동동맹에 반대하고 하나의 새로운 통일된 사회주의단체의 창설을 결정했다. 이것이 영국사회당으로 대부분 사회민주연맹이 가입했다. 의장은 사회민주연맹의 노련한 지도자 하인드만이었다. 사회당은 독립노동당의 모든 지방조직까지 장악한다. 여기엔 크라리온협회에 속하는 사회주의자들도 들어갔다. 협회는 크라리온 신문사의 로버트 브랫취훠드가 후원했다.
영국사회당은 초기 당원 1만5천명으로 이는 독립노동당 전성기 때 당원의 절반에 달했다. 사회당은 1914년 1차대전 시작땐 점차 감소해 다시 노동당에 재합병하기를 원했다. 1909~1911년 사이 노동조합주의자와 독립노동당의 제휴에 불만을 품은 사회주의자들의 공격은 완전히 실패했다.
1911년 노동당에 가입한 제 단체들이 쌍디칼리즘 운동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해왔다. 쌍디칼리즘은 산별노조 건설운동부터 시작했다. 쌍디칼리즘의 탁월한 지지자 톰 반은 1889년 부두 파업 때 활동했지만 그 뒤 10년 동안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주로 활동했다. 톰 만은 머시사이드에서 대규모 운수파업을 성공적으로 지휘해 명성을 쌓았다. 쌍디칼리즘 운동은 호전적 사회주의 세력들을 많이 흡수했다. 이 운동은 두 개의 철도노조를 통합했다.
노조의 젊은 세대 간부들이 쌍디칼리즘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쌍디칼리즘의 보다 큰 영향은 노동계급의 신문인 일간 헤럴드지 창간이다. 이 신문은 원래 좌익 사회주의자 조지 란즈베리(1859~1940)의 수중에 있었는데 기고자는 대개 사회주의 반란파들이었다. 그 뒤 노동당과 노동조합회의는 1912년 노동계급신문인 데일리 시티즌을 공식 창간했다. 1914년 1차 대전 발발 때 데이리 시티즌은 즉시 폐간했고 반면 헤럴드지는 계속 운영하면서 투쟁했다.
3. 1910년 이후 수난기
노동당의 가장 곤란한 시기는 1910년 두 개의 총선을 치른 뒤다. 집권 중인 자유당이 많은 희생에도 정권을 쥐고 있었다. 노동당은 오스본 판결을 뒤집기 위한 법 개정에 자유당의 양보를 구하고 있었다. 맥도날드가 로이드 조지에게 자유당의 보험법에 동의한다는 보장을 해 준 보상으로 1911년 의원에 대한 국고지출이 가능해졌다. 국고지출은 노동당 살림살이에 큰 힘이 됐다.
뚜렷한 사회주의자들인 스노우덴과 웹 부부는 전체지역의 이익을 위해 예방대책을 수행하는 국민보건기구(NHS)를 설립하려고 했다. 노동당의 대부분은 이 문제에 의회에서 정부를 후원했다. 1913년 노동당 재정의 어려움은 노조법 통과로 해결됐다. 노조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그들 회원으로부터 정치기금을 받는 게 허용됐다.
당시 정부는 아일랜드 자치문제 등 대논쟁을 포함해 매우 초조한 가운데 이전 어느 때보다 대규모의 예산을 준비했다. 독일에 대비한 국방예산을 늘렸고 해군건설계획에 치중했다. 이런 추세에 노동당 의원의 다수는 자유당의 소수파와 함께 반대를 조직했다. 사회주의자들은 국방비 증액에 반대하는 경향을 취했다. 1910년 케어 하디는 반대투쟁으로 국제적 총파업 제안을 수락했다.
외교문제는 항상 사회주의자들이 열을 올렸고, 노동조합주의자들은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해군, 육군예산의 투표때 당의 다수의견에 따르지 않는 의원이 일부 있었다.
4. 람제이 맥도날드의 대두
이 기간 동안 노동당의 여러 어려움은 대부분 1906년 총선에서 자유당과 밀접히 연합했던 것에서 비롯됐다. 1914년 노동조합 회원은 오스본 판결 결과로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150만 명을 능가했다. 오히려 1906년 90만 명에 비하면 더 늘었다. 같은 기간 사회주의 단체에 가입한 회원, 즉 독립노동당과 극소수 훼이비언협회원들은 대략 1만7천명에서 3만3천명 정도로 늘었다. 영국사회당이 재가입을 신청했다. 고무적인 일은 노동당의 지방조직들이 급속히 성장한 점이다. 수도권의 런던노동당은 뒤늦은 1914년에야 출범했다. 당의 런던지역은 사회민주연맹이 장악하고 있어 출범이 늦어졌다.
영국도 한국처럼 수도권 지역은 당내 좌파세력이 더 강했다. 한국의 수도권, 특히 서울에서 진보신당이 민주노동당 보다 지지율이 높은 현상도 영국과 닮았다. 대처의 신자유주의 공세가 맹위를 떨치던 1980년대 중반 런던시장이었던 리빙스턴은 노동당 신좌파로 상당기간 동안 지방사회주의 실험에 혼신의 힘을 기울인 바 있다.
람제이 맥도날드는 1910년 원내정당의 의장 후보가 됐다. 1911년 맥도날드는 그의 원외조직 위원장직을 아더 헨더슨(1863~1935)에게 양도했다. 아더 헨더슨(1863~1935)은 전직 자유당원으로 비사회주의자였다. 헨더슨은 항상 사회주의자들에게 많은 의심을 받았다. 그러나 헨더슨은 충성을 다해 당 조직을 상당한 정도로 발전시켰다. 헨더슨은 제철공친선협회의 전직 간부로 당의 노조세력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제 헨더슨은 당의 위원장으로 사회주의자가 되기를 결심하고 훼이비언협회에 가입했다. 한편 케어 하디는 이미 노령이라서 당내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멕도날드와 헨더슨이 차지했다. 맥도날드는 원내정당 의장직을 맡았는데 비판에 무감각해 많은 적을 만들었고, 헨더슨은 부지런하게 행동해 많은 사람이 따랐다. 두 사람의 협동으로 당은 ‘능률적인 정당’으로 거듭났다.
17대 국회에서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경실련이 뽑는 의정활동 우수 의원 랭킹을 의식한 활동에 집중하면서 입법발의 건수 경쟁이나 하거나, 아니면 무능해서 아무 것도 안하는 두 부류가 있었다. 펠링 교수가 말하는 ‘능률적인 정당’은 전자의 의원들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일랜드 자치문제 해결에 실패하고 여러 문제를 남겼다. 1914년에는 자유당과 노동당 사이의 투쟁이 격렬했다. 유럽 대륙이 전쟁이라는 외부 요인으로 인해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다.
제3장 헨더슨의 정당 - 1차 대전과 재건의 시대(1914~1922)
1. 1차 대전과 노동당
사라예보 위기가 1914년 7월 말에 절정에 달했을 때 노동당은 전쟁반대 선동에 적극적이었다. 독일이 소련에 선전포고한 다음 날 케어 하디와 아더 헨더슨(1863~1935)은 참전반대를 요구하는 트라팔가 광장 집회에 참가했다. 1914년 8월 3일 독일은 프랑스에도 선전포고했다. 맥도날드는 프랑스 지원에 반대했다. 8월 4일 독일이 벨기에마저 침공하자 대부분의 국민이 참전에 열렬히 찬성했다. 노동당은 이제 더 이상 전쟁에 반대하는 통일전선에 참가하지 않기로 했다. 당시 노동당 전쟁 관련 성명은 모호했다. 독립노동당 지도자만이 철저한 반전론자로 남았다. 노동당 의원 대다수는 이제 전쟁을 후원해야 한다고 느꼈다. 독일 사회민주당 의원들이 독일의 황제군대를 위한 전쟁을 지지하자 대륙국가의 사회주의자들의 반전 단결이 무너졌다.
노동당은 8월 6일 수상이 제안한 추가예산안을 논의해 반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즉시 맥도날드는 사임했다. 아더 헨더슨(1863~1935)은 맥도날드 뒤를 이어 임명됐다. 헨더슨 지도하에 노동당의 대다수는 모병운동에 참가하고 정부를 지지했다. 맥도날드는 전쟁 반대의 선전을 위해 1914년 9월 민주통제연합이란 조직을 만들었다. 이 조직엔 4명의 반전 자유당원도 들어왔다. 이로써 노동당의 대열은 분열했다.
헨더슨은 비록 맥도날드와 의견을 달랐지만 당내 소수의 반전파를 축출하기를 원하진 않았다. 헨더슨은 자유당이 남아공전쟁 때 당내 의견불일치를 극복하고 관용성을 유지한 덕분에 그 뒤 권력을 잡은 것을 염두에 두었다. 전시내각에서 헨더슨은 당시 교육위원회 위원장으로 내각에 1석을 차지했다. 다른 2명의 노동당 의원이 그보다 낮은 직책을 맡았다. 헨더슨은 5명의 작은 전시내각에 들어갔고 다른 2명의 노동당 의원인 존 핫지와 조지 바네스는 각각 노동성 대신과 연금성 대신이 됐다. 다른 몇 명의 노동당 의원은 그보다 하위의 지위에 임명됐다.
1917년 초기 자유당 수상 로이드 조지의 전시내각에 완전히 결합했던 노동당 다수파와 병역소집을 거부하는 젊은 독립노동당 소수파 당원들 사이에 심각한 분열이 일어났다. 1917년 1월 노동당 당대회는 내부의 제사회주의 단체의 영향력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런 결정은 당의 연합 구조를 파괴했다. 독립노동당의 지도자들은 탈당 논의를 시작했다. 맥도날드는 “일부 대공장 노조가 ‘투표’라는 억압적 방법으로 분열을 강요한다면 나는 새로운 노동자 연합체를 창설할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대공장 노조가 주장하고 강행한 집단투표가 사실상 효과를 봤다.
2. 헨더슨과 웹 부부
1917년 소련에서 두 번에 걸쳐 혁명이 있었고 미국이 참전을 결정했다. 영국 사회주의자들은 1917년 6월 리즈에서 전국사회주의자평의회를 소집했다. 이 때 마침 소련 혁명이 일어나 영국 좌파는 대단히 열광했다. 평의회는 독립노동당과 영국사회당의 공동 희망이었다. 두 당은 아직 노동당에 가입돼 있었다. 이들은 소련 방식의 노동자평의회(소비에트) 건설도 주장했다.
헨더슨은 전쟁에서 소련을 후원하기를 원했던 수상 로이드 조지의 권고에 따라 러시아를 방문했다. 헨더슨은 스톡홀름에서 열린 국제사회주의자대회에 영국 대표를 파견할 것에 찬성했다. 이 대회는 독일 사회주의자도 참석했다. 이 때문에 헨더슨은 전시내각에서 동료들과 마찰했다. 결국 헨더슨은 몹시 분노해 전시내각에서 사임했다. 도어 매트 사건으로 불리는 내각 내 위기는 많이 알려지진 않았다. 로이드 조지는 헨더슨의 후임으로 노동당 의원인인 조지 바네스를 앉혀 충격을 완화하려고 했다. 영국 정부는 스톡홀름대회에 참가하는 영국인의 출국여권을 발급하지 않았다. 도어 매트 사건은 노동당사에 하나의 전환점인 획기적 사건이다.
당시 자유당은 두 개로 완전히 분리됐다. 노동당은 활동에서 이미 자유당보다 우세했다. 헨더슨은 맥도날드와 달리 지식층에서 브레인을 발탁했다. 시드니 웹이 1917년 12월 훼이비언협회의 대표로 노동당의 지식층 지도자가 됐다.
중요한 변화는 노조 지도부에서도 일어났다. 전쟁 전 가장 급진파인 광산노동자연합과 철도원노조는 헨더슨이 지지한 결의안의 형성에 적극 참가하기 시작했다. 헨더슨은 국제연맹의 창설과 국제분쟁의 조정기구 설립을 요구하고, 아프리카 식민지의 국제 신탁통치 등을 요구했다. 이는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영향을 미쳤다. 윌슨 대통령의 14개항은 이와 동일한 궤도에서 나왔다.
헨더슨은 시드니 웹의 조력을 받아 노동당의 새로운 당헌을 준비한다. 노동당 가입 방식도 사회주의 단체나 노조를 통한 가입이 아닌 개인 가입도 가능하게 문을 열었다.
노동당은 1918년 2월 시드니 웹이 초안한 ‘사회주의적 당헌’을 채택했는데 이 당헌은 당 목적의 4개항으로 표현됐다. 4개항은 첫째 생산의 완전한 과실을 확보하기 생산수단의 공동소유권에 기초해 가장 공정한 분배를, 인민에 의한 행정체제, 산업 또는 용역의 최선의 운영을 확보하자는 내용이다. 이런 1918년 2월 당헌 채택은 좌경화의 뚜렷한 표시였다.
노동당은 1918년 6월 당대회를 개최했다. 시드니 웹이 기초한 <노동당과 신사회질서>라는 정책을 채택했다. 이 정책은 1950년까지 이후 30년 동안 노동당 정책의 기반이 됐다. 제1원칙은 국민 최저한도의 생활을 일반적으로 보장이다. 이는 주당 최대 48시간 노동, 노동조건의 최저기준, 최저임금제 등 완전고용 정책을 말한다. 제2원칙은 산업의 민주적 통제다. 웹은 산업의 국유화를 강조했다. 제3원칙은 국가 재정의 일대 혁명이다. 부자에게 많은 세금을 매기는 누진제로 사회복지 보조금 재원을 마련하는 직접자본과세다. 제4원칙은 잉여의 부를 공공선에 사용한다는 원칙이다. 교육 및 문화면의 기회 확장도 담았다.
당헌은 노조의 이익만 노리는 게 아니라 전체 국민을 위한 활동을 주요하게 담았다. 이 당헌은 맑스주의적 사회주의와 자유당 로이드 조지 방식 사이의 타협이다.
3. 전후의 불안
1차 대전이 끝났지만, 수 명의 노동당 의원들이 자유당 로이드 조지 연립내각의 각료로 남았다. 노동당 출신 조지 바네스는 전시 내각 남은 걸 기뻐했다. 식량통제장관이던 노동당 출신의 크라인즈도 기꺼이 행정부에 남았다. 결국 원내 노동당은 대부분 정부에 남았다. 그러나 헨더슨의 영향 하의 당 전국집행위원회는 그와 반대로 움직였다. 크라인즈는 자유당 정부에서 나오라는 당의 명령에 마지못해 복종했다. 조지 바네스와 다른 사람들은 정부에서 사퇴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 때문에 노동당의 원칙은 파괴됐다.
2014년쯤 진보통합당에도 조지 바네스 같은 사람들이 나타날 수 있다. 이런 사태를 염두에 두고 진보통합당의 당헌 당규에 이를 명시하면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당헌 당규는 언제나 당권파의 의도대로 재해석되고 재평가돼 왔다. 한국에서도 DJP 연합으로 탄생한 1998년 국민의 정부가 이런 내홍을 겪은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 이런 현상은 더 복잡해서 JP에서 DJ로 넘어간 사람들은 다시 한나라당으로도 갔다.
1918년 12월 총선거는 로이드 조지의 신임투표 성격이었다. 노동당은 용감한 투쟁을 선동하고 361명의 후보를 내세웠다. 1910년 87명의 후보에 비하면 굉장한 숫자였다. 노동당은 자유당의 분열로 이익을 챙겼다. 선거결과 노동당은 겨우 57석을 확보하는데 그쳤다. 따라서 그리 대단한 발전은 아니었다. 노동당 지도자 맥도날드와 스노우덴은 반전 활동 경력 때문에 낙선했다. 헨더슨도 낙선했다. 당선한 57명 중 25명은 광산노조 출신이었고, 24명은 다른 노조 대표였다. 5명은 지역노동당 후원으로, 3명만이 독립노동당 후원으로 당선했다.
원내 노동당의 지위는 이제 곤란한 위치에 처했다. 원내정당의 몇몇 지도자들이 연립정부에서 사퇴하라는 당의 결정을 거부했다. 노동당은 하원에서 당의 유능한 정부잔존 의원들을 결국 상실했다. 과업을 잘 수행했던 헨더슨도 재선에 성공하지 못했다.
대신 자유당의 내부 분열에 실망했던 유능한 다수의 젊은 자유당원이 대거 노동당으로 옮겨왔다. 의회 지도자들은 하원내 노동당 의원 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노조의 파업 등 강력한 투쟁 덕분으로 연립정부에 각료로 들어갔다. 어네스트 베빈이 지휘하는 런던 부두노동자들은 폴란드행 포리 조지 호에서 군수물품을 제거할 때까지 선박에 짐을 적재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 투쟁으로 로이드 조지는 결국 정책을 전환했다.
전쟁 직후 심각한 인플레이션과 높은 실업률이 영국을 덮쳤다. 철도, 운수, 광산 노동자는 연합해 ‘광산 국유화’ 법안을 만드는 3자동맹에 열중했다. 그러나 광산노동자가 파업한 1921년 4월 불길한 금요일에 약속한 두 노조(철도와 운수)가 파업 가담을 거부하면서 3자동맹은 깨지고 말았다.
전국노동조합회의의 원내위원회는 정책조정을 위한 보다 광범위한 권한을 가진 ‘노동총평의회’로 전환했다. 이후 노동총평의회는 노동당의 참모본부로 기능하면서 산업적 역할은 물론 중요한 정치적 역할까지도 담당했다. 노동당의 전국집행위원회의 대표로 구성된 전국합동평의회도 만들어졌다.
4. 제1야당에의 서곡
헨더슨은 1919년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하원에 다시 입성했다. 그러나 헨더슨은 원회조직 확대와 관리에 집중하고, 의장직을 욕심내지는 않았다. 의장직은 클라인즈가 맡았다. 헨더슨은 노사간 인권유린사건인
영국공산당은 1920년 창당했는데 옛 영국사회당과 여러 좌익단체들이 소련의 볼세키키를 위한 지지를 기반으로 합병한 것이다. 노동당 집행위원회는 공산주의자들의 목적은 노동당의 당헌, 정강, 정책 등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영국공산당의 가입과 연대를 거부했다. 이런 방침은 1921년 노동당대회에서 압도적인 표로 가결됐다.
1922년 총선은 지난 8년 동안 헨더슨의 숙련된 통솔력을 시험하는 장이었다. 노동당은 이 선거에 414명의 후보를 내 의석을 142석으로 늘렸다.
보수당 다수파가 집권했지만 노동당 당선자는 분열된 자유당 잔류파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헨더슨은 1922년 총선에서도 지역구에서 다시 낙선했고, 1923년 1월 보궐선거에 당선해 원내로 들어갔다. 85명의 노조지지 후보가 당선됐고, 1919년 3명에 불과했던 독립노동당 지지후보가 32명이나 당선됐다. 명백히 좌익인 독립노동당은 스코틀랜드에서 특히 성공했다. 반면 잉글랜드에서 독립노동당은 대단하지 못했다. 노동당은 영국 전역의 모든 계층에서 의원을 배출했다.
제4장 맥도날드의 리더십(1922~1931)
1. 맥도날드의 승진
1922~1931년까지는 람제이 맥도날드가 노동당을 이끈 기간이다. 맥도날드는 당 의장 겸 지도자로 명실상부한 당수였다. 맥도날드는 야당 지도자인 동시에 잠재적 수상이었다. 1922년 총선이 의회 노동당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지 못했더라면 맥도날드의 당권 장악은 있을 수 없었다. 노동당 의원 가운데 노조지지 당선자 비율이 현격히 줄었다. 새 의원의 다수가 독립노동당 회원이었다. 전직 자유당원들도 적지 않게 당선됐다. 전투적인 독립노동당은 국내정치에서 매우 온건한 맥도날드의 태도에 곧 실망했다.
원외정당도 변했다. 위로부터의 지도체계를 받아들였다. 1919년 일간신문을 복간하고 좌익기관지로 운영해온 헤럴드지는 1922년 재정난으로 노동당이 운영권을 장악했다. 좌파의 조지 란즈베리(1859~1940)는 편집인 자리에서 물러났다. 공산당은 노동당과 동맹을 강하게 요구했다. 노동당은 이를 거부했다. 공산당은 노동당 중앙을 포기하고 지역노동당 침투전술로 방법을 바꿨다. 1922~1925년까지 노동당 당대회 결정에 따르면 공산주의자들은 노조 대표이긴 하지만 당에 개인가입하거나 의원 후보로 뽑는 것을 금했다. 1925년쯤 공산주의자들은 상당한 수의 지역노동당, 특히 수도권인 런던지역을 장악했다. 1927년 여름 당 전국집행위원회는 런던의 15개 지구를 포함해 모두 23개 지구의 지역노동당을 제명했다.
주요 노조의 지도자들이 당 사업과 노동당을 무시하는 경향이 높아졌다. 대공장 노조의 위원장이 의회에 진출하는 일은 이제 드물어졌다. 어네스트 베빈의 지도로 출범해 대규모의 새 노조인 수송 및 일반노동조합로 성장한 부두노조는 적어도 하원을 노조간부들의 퇴직 장소쯤으로 여겼다. 이는 당과 노조 사이의 능률적인 조정에 불미스러운 결과를 낳았다.
우리 안에도 이런 일은 있다. 지난 2년 동안 진보정당 재통합에 매진해온 민주노총과 주요 연맹, 지역본부, 대공장 노조의 전현직 임원들은 스스로 퇴직 장소를 찾기 위해 부심했다. 진보신당도 마찬가지였다. 뺏지 단 경험이 있거나, 달 가능성이 높을수록 양당 통합에 더욱 더 목을 맸다. 결국 진보신당에 남은 사람들은 덜 명망가이고, 통합진보당으로 넘어간 사람들은 더 명망가다.
또 다른 분리 경향은 노동조합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조정자였던 독립노동당이 조정자의 위치를 떠나 독자 지위에서 점진적으로 진보를 지향해온 점이다. 독립노동당의 성격은 큰 변화를 겪었다. 독립노동당은 당 지도부의 보수주의를 인내하지 못한 사회주의 탈당파의 소굴 같았다. 독립노동당은 헨더슨과 웹 부부의 방식 보다는 훨씬 더 사회주의나 맑스주의 정책을 원했다. 이들 좌익 사회주의자 가운데는 제임스 맥스톤이 가장 탁월했다.
1923년 말 새로운 보수당 수상인 스탠리 볼드윈은 관세개혁에 당면해 갑자기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거를 실시했다. 노동당은 1923년 총선 때 대부분 선거구에서 강력한 반대당의 지위를 차지했다. 선거결과 재통합한 자유당이 비록 158석을 얻었지만 노동당은 자유당보다 더 많은 191석을 얻었다. 독립노동당이 후원한 당선자는 1922년 32명에서 39명으로 늘었고, 지역노동당이 후원한 당선자는 19명에서 39명으로 늘었다. 이들 두 조직의 당선자 78명은, 85명에서 101명으로 늘어난 노조 후원 당선자 세력과 비교되기 시작했다. 보수당은 258석을 얻어 아직은 하원에서 제1당이었지만 절대다수를 확보하진 못했다. 자유당은 노동당 내각을 후원하기로 결정했다. 국왕은 1924년 1월 맥도날드에게 조각을 위촉했다. 노동당 1924년 제1차 맥도날드 내각이 구성으로 첫 집권했다.
2. 제1차 맥도날드의 노동당 내각
맥도날드는 1924년 첫 집권 때 조각 과정에서 당내 여러 동료들의 의견을 묻지 않고 독단적으로 했다. 맥도날드 자신이 외무대신을 겸하고 추밀원 의장, 대법관, 해군대신 등은 당 외부에서 임용했다. 전 자유당 각료 홀데인, 전 보수당 의원 팔모어와 체름스 포드 등이 그들이다. 스노우덴은 대장대신, 크라인즈는 국새상서 겸 하원 부의장이 됐다. 맥도날드는 부담스러운 헨더슨을 내각 외부에 두려고 했다. 그러나 헨더슨은 우겨서 내무대신이 됐다. 독립노동당 좌파는 죤 휘트리가 보건대신이 됐다. 과거 독립노동당 중도좌파의 온건한 프레드 조웨트는 노동대신이 됐다. 이런 신 노동당 내각은 자유당의 지원으로 성립했다.
전권을 휘두른 ‘맥도날드’는 당권파의 패권으로 노동당 내 연합체적 성격과 토론문화를 봉쇄했다. 전직 자유당 출신 장관의 재기용과 전직 보수당 의원까지 기용한 첫 노동당 집권 내각은 그래서 10개월 만에 무너졌다. 맥도날드의 이런 패권적 첫 조각을 ‘통섭과 소통, 포용, 관용’이라는 인문학적 미사여구로 치부하기엔 너무도 깊은 상처를 냈다. 그 상처가 결국 오늘날 영국 노동당을 노동자와 아무 관련 없는 정당으로 만들었다.
집권 노동당은 빈부 모두의 세율을 인하하고 만연한 실업문제 처리에 공공사업과 팽창예산 정책 등을 구사하지 않았다. 노동당 내각은 사회정책에서 매우 온건하게 일했다. 휘트리가 기안한 주택법은 자유당의 지원을 통과했다. 노동당 내각의 성공은 외교정책이었다. 노동당은 독일 루르 지방의 프랑스 점령으로 최고조에 달한 독일과 프랑스 분쟁때 프랑스 수상인 포앙카레에게 우호적인 태도로 영불 협정을 맺었다. 도오즈(Dawes) 계획으로 미국의 차관을 조건으로 독일의 배상금 지불을 이끌어냈다. 9월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에 참석하고 집단안전보장을 위한 조약안인 제네바협정서를 만들었다. 헨더슨과 팔모어는 제네바협정서를 승인했지만 맥도날드는 마음에 내키지 않아 했다.
첫 집권한 영국 노동당의 온건한 정책은 소수 여당이란 의회 구조상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과연 열린우리당보다 더 잘 나라를 운영할 수 있을까.
맥도날드 내각을 무너뜨린 진짜 원인는 영소 관계였다. 1924년 11월 총선에서 보수당이 대승을 거두면서 노동당의 첫 집권이었던 제1차 맥도날드 내각은 10개월 만에 무너졌다. 보수당은 1923년에 비할 때 155석을 더 얻었다. 그러나 노동당은 40석을 잃었다. 자유당은 보수당과 노동당의 양면 공격으로 118석이나 줄어든 40석에 그쳤다. 노동당은 151석을 얻었다.
선거기간에 생긴 지노비에프의 편지사건의 위협이 선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왜 자유당이 노동당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는지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맥도날드는 캠프벨 사건과 지노비에프 편지사건을 처리하는 데 뚜렷한 오류를 범했다. 맥도날드는 이에 대한 독립노동당의 비판을 수용하지 않았다.
3. 1920년대 노동운동
노동당의 주도권은 다시 노동조합 지도자에게 옮겨갔다. 1925년 보수당의 대장대신인 윈스톤 처질은 국가를 다시 금본위제로 복귀시켰다. 결국 석탄수출무역에 큰 위기가 왔고 광산노동자들의 임금을 현저히 떨어졌다. 광부들은 석탄수송을 막으려고 나섰고, 노동총평의회의 후원을 간절히 바랬다. 결국 정부는 노조의 주장에 굴복해 광부들의 임금을 깨끗이 청산하는 데 정부보조금을 주었다. 원내정당은 절박한 파업에 거의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했다. 맥도날드는 노동자 파업을 비난했다.
노조 파업을 비난하는 노동당의 모습은 이제 서유럽에선 익숙한 광경이다. 영국 노동당은 1920년대부터 그랬다.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집권의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지만, 2013년 진보정당 출신의 한국 노동부장관은 이런 광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1926년 6월 광부들을 중심으로 한 9일간의 총파업은 실패했다. 정부가 면밀히 이 파업에 대비한 데 비해, 노동총평의회는 이 파업투쟁을 위해 어떤 준비도 하지 않았다. 결국 노동총평의회는 나중엔 작업 복귀를 위한 명분 찾기에 부심했다. 결국 파업은 광부들의 요구를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 채 패배하고 말았다. 광부들은 수 개월간 더 외롭게 장기파업을 계속해야 했다. 1928년 좌익 공산주의 운동은 모스크바의 인터내셔널 지령에 따라 노동당에 침투하는 통일전선 방법을 포기하고 노동자 지도자와 당원을 사회주의적 파시스트라고 통렬히 비난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노동당 원내정당의 의원 2/3 이상이 실제로는 독립노동당원이었다. 노동당내 독립노동당 세력의 활동노선은 과거 어느 때보다 비중이 컸다. 1927년 독립노동당은 <우리 시대의 사회주의>라는 제목의 새로운 정책 성명을 발표했다.
1928년 노동당대회는 <노동당과 국민>이란 막연한 정책성명을 채택했다. 이 정책성명은 1918년 헨더슨과 웹이 작성한 <노동당과 신사회질서>라는 정책성명보다 훨씬 못한 것이었다. 독립노동당의 정책과 노동당 정책 사이의 반목은 타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정책은 가끔 뒤로 가기도 한다. 이 책의 저자인 헨리 펠링 교수는 혁명가가 아니다. 오히려 사민주의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런 저자가 정책의 후퇴라고 표현했다면 영국 노동당은 1918년 사민주의에서 1928년에 와선 보수주의로 추락했다는 소리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집권 가능성이 커질수록 정책은 뒤로 간다. 그런 정책의 후퇴를 견제할 세력이 우리에게 있는가.
1929년 총선 결과 노동당은 고질적인 고실업으로 많은 이익을 챙겼다. 1929년 선거결과 노동당은 하원에서 288석을 차지해 처음으로 제1당이 됐다. 288명 가운데 지역노동당이 후원한 당선자는 1924년 25명에서 128명으로 늘었다. 이는 노동분쟁법 통과 이후 노조가 약화된 것 때문이다. 독립노동당의 분파적 태도에 불만을 품은 후보자들이 대거 독립노동당을 탈퇴한 것도 이유 중의 하나다. 노조가 후원한 당선자는 최초로 노동당 의원 전체의 절반 밑으로 떨어져 288명 중 115명에 불과했다.
4. 제2차 노동당 내각
1929년 맥도날드의 제2차 노동당 내각에는 1924년 1차 노동당내각에서 일했던 각료들이 대부분 입각했다. 맥도날드는 새 내각을 철도노조 지도자인 토마스와 스노우덴, 헨더슨과 협의해 조각했다. 란즈베리는 좌파의 대표자로 입각했다.
2차 노동당 내각에서 맥도날드의 주요 관심은 1924년 1차 노동당 내각과 같은 ‘외교문제’였다. 맥도날드는 집권하자마자 직접 미국을 방문했다. 실업자 수는 계속 상승해 1930년 가을엔 200만명을 넘었다. 2차 내각은 국내정치에서 유래 없이 실패했다. 이 내각은 국민의 가장 큰 관심을 받은 실업문제에 해결에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 모스리는 4명의 다른 노동당 의원들의 지지를 얻어 새로운 정당을 창당했다가 노동당에서 제명됐다.
1931년 여름 국제적 재정 위기로 노동당 내각은 붕괴했다. 1931년 5월 비엔나의 한 은행이 파산했다. 맥도날드는 1931년 8월 23일 내각의 수상직을 사임하고, 다음날 아침 자유당과 보수당의 후원 하에 새 내각을 조각했다. 이것이 제3차 맥도날드 내각이다. 맥도날드는 1931년 새 내각 구성에도 당과 어떤 토론도 하지 않았다. 이에 달톤은 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맥도날드의 신 정부에 맞서 당을 다시 규합하기 위해 당과 노동조합회의의 본부 건물인 운수회관 내 위원장실에서 회의를 주재했다. 투쟁위원회는 당 서기장인 헨더슨과 아직 내각에 있던 란즈베리, 시트린, 베빈, 당 서기장보인 미들톤, 전국집행위원회 위원장이자 베빈의 노조 조합원인 프란시스 허스트 등이 참가했다. 바야흐로 노동당은 새로운 역사를 시작했다. 맥도날드의 시대는 이미 끝났고 당의 운영은 또다시 원외조직과 노동조합회의로 넘어갔다.
1931년 8월 25일 노동조합회의와 원외정당은 원내정당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맥도날드의 노동당 지휘권을 박탈했다. 원외정당은 노동조합회의 총평의회위원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운수회관에서 회의해 당의 단결을 결의했다. 이 회의는 헨더슨이 추진했다. 이 회의에서 헨더슨은 압도적 다수로 원내정당의 지도자로 뽑혔다.
결국 ‘탐욕’이 람제이 맥도날드를 집어삼켜 버렸다. 한국의 진보정당에선 누가 맥도날드인가? 영국 노동당에서 당권파의 탐욕으로 당이 무너지면 늘 구원투수로는 노조가 전담했다. 당은 흔들려도 노조는 늘 제자리에 있었던 게 20세기 영국의 역사였으니 그나마 가능했다. 그러나 한국처럼 노조도, 당도 깊은 뿌리를 내리지 못한 나라에선 당이 흔들리면 노조가 당을 받쳐줄 수도 없다.
5. 맥도날드 지배의 종언
맥도날드는 1922~1931년까지 9년간 노동당을 지배하면서 당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고의 권력을 휘둘렀다. 맥도날드는 원내정당으로부터는 많은 충성을 받았지만 노조 지도자들에게는 조금도 신임을 받지 못했다. 맥도날드는 초기 2년 동안은 대외문제외 외교문제에만 전념하고 노동운동과 대중 접촉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노동당은 맥도날드가 보유했던 막대한 권력을 막기 위해 1933년 당 대회에서 당수가 내각을 구성하거나 각료를 선정할 때 꼭 준수해야 할 제반절차를 규정했다.
맥도날드를 지지한 사람은 겨우 스노우덴과 토마스 뿐이었다. 1930년대 맥도날드가 사라진 당의 위기 때 노조 지도자들은 협소한 이기주의에 젖어 행동했고, 노조 지도부는 국가가 비참한 난국에 처해도 어떤 희생도 거부했다.
제5장 회복기 - 총평의회의 당운영(1931~1940)
1. 노동당 원내정당의 퇴조
어네스트 베빈은 총파업에서 효과적인 역할을 담당해 국가적 지도자 반열에 올랐다. 베빈은 수송 및 일반노동조합 위원장으로 최고의 지위를 누렸다. 베빈은 1920년대 초 이 노조를 견고하게 만들었다. 운수회관은 1928년에 준공해 전국노동조합회의와 노동당의 본거지로 사용했다. 1929년 헤럴드지는 백만부 이상으로 독자를 늘렸다. 헤럴드지도 베빈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베빈은 국회의원이 아니었지만 당 대회 의장이 될 예정이었다. 수송 및 일반노조는 당 대의원 총수의 거의 10%를 차지하는 큰 세력이었다.
헨더슨 역시 아직 큰 세력을 갖고 있었다. 헨더슨은 20년 동안 당 의장이었고 맥도날드에 반대하는 소수 각료들의 지도자였다. 그러나 당의 위기 때 헨더슨은 베빈만큼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헨더슨은 언제나 맥도날드와 완전한 파국에는 반대했다. 헨더슨은 실업급여 삭감 문제가 터졌을 때도 맥도날드 내각에서 나오는 결심을 하지 못했다.
1931년 9월 28일 노동당 전국집행위원회는 회의를 열어 맥도날드와 그의 동조자들을 공식적으로 추방, 제명했다. 맥도날드는 여전히 수상 자리에 머물면서 다음 총선에서 투쟁을 각오하고, 연립정부(거국중립내각)를 견고히 하려고 결심했다. 맥도날드는 새로운 전국노동자연맹의 결성도 추진하려 했다. 자유당의 후원 없이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총선거를 1931년 10월 말 이전에 실시했다. 이번 총선의 특징은 맥도날드가 만든 전국노동자연맹이 주동해 노동당에게 총공격을 가한 선거전이었다. 특히 맥도날드에게 붙은 스노우덴은 노동당 정책이 볼세비즘과 같은 것이라는 악선전을 진행했다. 노동당의 득표수는 8백만에서 6백만으로 줄었다. 노동당의 의회내 지위도 동요해 약화됐다. 그 결과 노동당은 하원에서 겨우 46석만 얻는데 그쳤다. 모스리의 신당과 공산당은 단 1석도 얻지 못했다.
탐욕의 끝은 참혹했다. 영국 노동당은 300석 가까운 원내 제1당에서 46석으로 초라하게 내리 앉았다. 의원 수 추락만으로 환산할 수 없는 수많은 것들도 함께 잃었다. 영국 노동당은 노동운동 진영에게 지녔던 권위마저 잃었다.
당의 위기 때는 언제나 의원 대부분이 노조 출신, 특히 광부들로 구성됐는데 이번에도 원내정당의 정확한 절반이 광산노조 출신이었다. 의원들의 큰 비율을 차지하면서 노동당의 유일한 기반이 된 지역은 남부 웨일즈 지역이었다. 이곳에서 당선자의 1/3이 나왔다. 이번 총선으로 노동당은 지난 10년간 노동운동에서 보유했던 권위를 잃어버렸다.
2. 란즈베리와 베빈
헨더슨은 새 의회에서 초기 1년간 명목상 당수였으나 하원 의석은 없었다. 란즈베리는 애트리의 보좌를 받아 부 당수로 활동했지만 사실상의 당수로 하원에서 당을 지도했다. 의회정책은 명백히 약해졌다. 란즈베리는 이제 72세나 된 허약한 지도자에 불과했다. 란즈베리를 보좌하던 애트리와 크리프스는 총선 패배의 충격으로 곤경에 빠져 극단적이고 무모한 전투적 정책을 주장했다. 두 사람 가운데 애트리가 그래도 좀더 신중했다. 두 사람은 모두 공립학교 출신이었다.
한편 독립노동당은 맥도날드 시절의 보수적인 노동당 정책과 강령 때문에 당에 반발하다가 1932년 노동당에서 탈퇴했다. 이제 독립노동당은 급진분자들의 집단이 됐다. 노동당 탈당은 독립노동당 자체에도 심대한 파국을 초래했다. 독립노동당의 당원 수는 즉각 줄어들었다. 독립노동당이 탈당하자 노동당 내부엔 독립노동당을 대신할 새로운 사회주의 단체를 창설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반신불수 상태의 훼이비언협회가 다시 살아나 ‘사회주의 연구 및 선전협회’를 만들어 사회주의연맹을 형성했다. 이는 노동당 안에서 제2의 독립노동당 역할을 했다.
1921년 창설한 전국노동회의는 총평의회, 원내내각, 전국집행위원회가 서로 동수로 들어왔다. 이제 총평의회만으로 전국노동회의의 과반을 확보하도록 개편했다. 전국노동회의의 결정은 노동운동 내부에서 큰 권위를 가졌다.
일본의 팽창과 1933년 독일의 히틀러 집권은 영국 외교정책의 위기를 몰고 왔다. 란즈베리는 맑스주의의 기조 위에 서 있는 평화주의자였다. 란즈베리는 국방비 확장에 반대하는 한편 국제연맹을 강대국들의 모임에 불과하다고 보고 그 존재까지 부인했다. 노조 지도자들은 외교문제에서 란즈베리보다 더 현실적인 입장이었다. 헨더슨은 1935년 죽었다. 1903년부터 쭉 의장 보좌관으로 일했던 조용한 간부 지미 미들톤이 헨더슨의 후계자로 뽑혔다. 전국노동회의는 집단안전보장을 위해 파시즘에 반대하고 공산주의자와 타협을 거부하기로 선언했다.
1935년 총선이 가다왔다. 노동당은 란즈베리를 100% 신뢰할 수 없었고, 그의 태도와 당의 태도 사이엔 모순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란즈베리가 이제 사임할 시기가 왔다고 봤지만 란즈베리 자신은 이를 부인했다. 1935년 당 대회에서 란즈베리는 노동당의 전국노동회의가 재확인한 정책 결의안에 반대하고 사임했다.
1935년 애트리가 란즈베리를 승계했다. 이로서 노동당의 지도자가 처음으로 노동계급이 아닌 사람이 됐다. 총선에서 맥도날드 대신 새 수상이 된 볼드윈은 노동당의 비난을 아주 교묘하게 회피했다. 1935년 총선결과 노동당은 많이 회복했지만 여전히 1929년의 세력에는 미치지 못했다. 총 득표수는 다시 8백만표에 근접했지만 보수당은 단독으로 1천50만표를 얻었다. 노동당은 154석을 얻었는데 이 가운데 79석은 노동조합이 후원했다. 한편 맥도날드가 지휘하는 전국노동자동맹의 의석은 8석으로 줄었다. 맥도날드 자신도 신웰에게 패했다.
공산당은 윌리 갤랫쳐 1명만 당선했다. 독립노동당은 글래스고우에서만 4석을 차지하면서 명백히 쇠퇴했다. 당시 주민들은 좌익 급진주의나 우익 급진주의 모두에게 동조하지 않았다.
3. 영도력의 문제
노동당 대표 선거에서 애트리는 58표, 모리슨은 44표를, 그린우드는 33표를 얻어 애트리가 뽑혔다. 전국노동회의의 집단안전보장에 관한 정책과 노동당 원내정당의 실제 태도 사이엔 아직도 큰 차이가 있었다. 우경화된 노조는 국방예산 증액을 지지했고, 원내정당은 국방예산 증액에 반대했다. 원내정당에는 철저한 평화주의와 반 군국주의 감정이 강하게 지배했다. 그러나 원내정당의 당권파는 중간에서 기회만 엿봤다. 달톤과 베빈은 노동총평의회의 공동의장이 됐다. 둘은 스페인 내전을 기점으로 원내정당의 군비 축소 정책을 바꾸려고 했다. 모리슨은 여름 내내 군비 확장 결의안에 반대했으나 같은 해 10월 열린 당 대회에선 침묵해 결의안은 쉽게 통과됐다.
이런 게 노동당 원내정당의 주요한 행보였다. 이 당시 노동당 원내정당은 늘 노조보다는 왼쪽에 서서 원칙적 발언을 쏟아냈지만 실제 투표에선 슬그머니 집권당의 손을 들어주는 배신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공산당은 1933년 당의 파벌정치를 포기한 이래 세력을 넓혀 국제공산주의자대회의 훈령대로 창설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브리게이드를 위한 새 회원 모집기관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많은 젊은 사람들과 공산당원들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동조자들도 이 국제적 공산주의 브리게이드에 가입하기 시작했다.
1931년 이후 국민들 가운데 사회주의 동조자가 늘었다. 이는 노동당에도 유리했다. 노동당 당원 수는 1928년에서 1937년 사이 배로 늘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선거때 노동당에겐 막대한 부담이었다. 달톤은 독립노동당이나 사회주의연맹과 같은 단체와 결탁해야만 했던 과거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 선거구 정당에 가입케 하는 정책을 주장했다. 이 문제는 1937년 당 대회에서 제기됐다. 이 선거제도로 지식층의 좌익 대표로 전국집행위원회에 1~2명이 참가했다. 하롤드 라스키와 프릿트가 그들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다수파의 포로에 불과했다. 당은 그들에게 사회주의연맹을 탈퇴하도록 종용하고 통일전선 정책도 거부하고 우겼다. 크리프스는 패배를 자인하고 사회주의연맹의 자발적 해산을 결정했다.
변호사로 성공한 부유한 크리프스는 ‘인민전선’으로 불리는 새로운 전국적 운동을 전개했다. 겨우 엘렌 윌킨슨과 프릿트 등 2명의 동조자만 얻었고, 결국엔 노동당 전국집행위원회에서 추방, 제명됐다. 하롤드 라스키는 인민전선 운동에 참가하지 않은 덕분에 제명에선 빠졌다.
전쟁 분위기는 더욱 고조됐다. 노동당의 전국회의는 히틀러에게 양보하는 것에 반대했다. 원내정당, 전국집행위원회, 총평의회는 이런 정책의 전환을 계속 요구했다. 정부는 징병제를 전격 실시했다. 군비증강에 동의한 노동당은 징병제를 계속 반대하는 것도 어려웠다. 징병법안이 통과되자마자 노동운동은 이를 전폭 지지했고, 달톤은 투표에서 기권했다.
4. 제2차 세계대전의 전야
9월 1일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략했고 이틀 뒤 9월 3일 영국은 전쟁을 선언했다. 9월 2일 전국집행위원회와 원내정당 집행간부의 연석회의가 열리고 당은 정부와 제휴해서는 안 된다고 결정했다.
수상 챔버레인(보수당)은 처칠 등 보수당내 소수파의 협동을 확보하긴 했으나, 보수당 중심의 거국내각과 야당인 노동당 사이의 불화는 여전히 강했다. 독일군은 네덜란드와 프랑스마저 침략했다. 그러자 연립정부 구성 요구가 높았다. 애트리는 처칠과 새로운 내각 구성을 논의했다. 노동당 당대회는 이를 동의했다. 이로써 노동당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제6장 애트리와 베빈 영도하의 정부와 권력(1940~1950)
1. 애트리와 베빈
1940년대에는 만 5년에 걸친 전시연립내각과 이어 단기간이었지만 1945년 의회가 구성됐다. 1945년 총선에 노동당 의원이 처음으로 하원에서 다수파를 차지해 노동당이 정부를 구성하게 됐다. 노동당의 원내지도자들이 모든 각료직을 다 차지했다. 그 결과 원외정당과 노동조합운동은 약화됐다. 원내정당이 노동당을 주도했다.
과반수를 차지한 전국노동조합회의 총평의회가 1940년대 노동운동을 장악했다. 1940년대 노조운동의 강력한 지도자였던 어네스트 베빈이 처칠 정부에 입각했다. 베빈과 애트리의 영향력으로 노동당은 과거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 애트리는 맥도날드가 가졌던 만큼 확고한 당내 지위를 가지진 못했다. 애트리와 베빈의 협동은 둘의 사회적 출신성분과 경험이 아주 서로 판이함에도 불구하고 잘 조화를 이루었다. 전국노동회의는 1941년 권력의 상실이라고 부를 만큼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이젠 특정한 한 노조가 특별히 우월한 패권을 쥐지는 못하는 구조가 됐다.
2. 전시내각에 입각
노동당은 1940~1945년 당시 수상 처칠에게 각료직을 분배받으면서 원내 의원 수에 비해 대단히 많은 수를 배당 받았다. 당시 전시내각은 5명의 각료로 구성했는데 그 중 2명이 노동당이었다. 애트리와 그린우드가 참가했다. 어네스트 베빈은 노동대신, 허버트 모리슨은 공급대신, 알렉산더는 1929년과 같은 해군대신, 달톤은 전시경제대신, 윌리암 조위트는 법무대신이 됐다. 애트리의 야당 당수직은 연립정부의 존속기간 동안은 일시 중단됐다.
1940년 9월 전시내각은 7명으로 확대했다. 베빈은 7명의 각료 중 노동대표체를 형성하기 위해 입각했다. 1940년 10월 모리슨은 공급대신에서 보다 적합한 내무대신 겸 치안대신으로 옮겼다. 모리슨의 런던시 자치에 대한 경험과 개인적 인기 덕분이었다.
1942년 2월 더 광범위한 전시내각 개편이 있었다. 크리프스는 전시내각의 국쇄상서 겸 하원 지도자로 입각했다. 크리프스는 1939년 극단주의라는 이유로 노동당에서 제명됐다. 달톤은 상무원 총재로 옮겼고, 애트리는 부수상으로 자치령대신도 겸했다. 크리프스는 그 자리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항공기 제작성 대신으로 옮겼다.
대체로 연립정부는 1차대전 때 보다는 원활했다. 처칠은 1930년대에 시급한 군비 증강의 필요성을 예견했다. 2차 대전 중 국내문제 대부분은 애트리가 수행했다. 1942년 발표돼 신문에 대대적 환영을 받았지만 연립정부가 공식승인하지 않았던 사회보험에 대한 베버리지 보고가 있다. 전쟁이 끝나고 1945년 7월 총선거가 있었다.
3. 1945년 총선 대승
1945년 총선은 평탄했다. 논쟁이라고는 “노동당이 압승해도 수상 애트리는 전국집행위원회 위원장인 해롤드 라스크의 지배를 받을 것”이라는 보수당 처칠의 선전 정도였다. 이는 노동당 구조 때문에 나온 소리다. 선거는 처칠에게 불리했다. 처칠의 선전은 정당했다.
1945년 총선 결과 노동당은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다. 노동당은 하원에서 393명을 당선시켰다. 다른 모든 정당보다 146석이나 많아 과반수를 훨씬 넘겼다. 그러나 노동당의 득표수는 명백한 과반을 넘겼다고 말할 수 없다. 자유당도 아직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노동당이 성공한 것은 당의 개혁 때문이 아니었다. 유능한 허버트 모리슨이 만든 산업 국유화와 사회보장 입법 약속을 담은 노동당 정강 때문이었다.
보수당은 뮌헨협정으로 비난 받았다. 실업과 재군비 실패도 비난 받았다. 전후 로이드 조지가 함부로 약속하고 지키지 못하는 상황을 연출한 게 결정적이었다.
선거결과 큰 특징은 노조가 후원한 의원이 노동당 당선자의 1/3도 안된 점이다. 보다 젊은 중산계급의 노동당 의원들이 많이 당선했다. 이들은 대부분 변호사, 언론인, 교사, 의사, 대학교수들이었다. 노동당 의원의 2/3가 새로운 인물이었다. 원내 노동당은 이제 새로운 당이 됐다. 이제 모든 집단과 계층을 보다 충분히 대표하는 정당이 됐다. 1906년 최초 노동계급정당과는 좋은 대조다.
이제 노동당은 노동계급과는 무관한 ‘전문 자영업자’의 당이 됐다. 2차 대전 이후 노동당은 45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고 집권했지만 393명의 의원 당선자 대부분이 전문직이었다. 이들 ‘전문 자영업자’는 변호사, 언론인, 교사, 의사, 대학교수들이었다. 우리 진보정당은 어떤가? 이름만 노조에 걸치고 있지만 진짜 노동계급을 위한 당 지도부는 얼마나 될까?
노동당은 1946년 6월 원내 의원들을 위한 의사규정을 바꿨다. 의원들이 ‘당의 결정’에 반대 투표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애트리와 베빈 두 사람이 내각을 구성했다. 대신들의 총수는 19명이었다. 외무대신은 베빈, 추밀원 의장은 허버트 모리슨, 국쇄상서는 아더 그린우드, 대장대신은 휴 달톤이 맡았다. 애트리는 내각 구성할 때 베빈과 달톤의 의견을 잘 반영하지 않아 갈등했다.
소위 ‘양심조항’이라는 이유로 원내 의원들이 당 전체의 결정에 반한 투표를 할 수 있는 길이 다시 열렸다. 당내 공산주의자 소수파는 당 전체의 결정에 반하는 행동을 했다고 집단으로 제명하기도 하더니만, 이제 전문 자영업자들이 당을 장악하자마자 당비 내는 사람과 무관하게 운영하기 시작했다.
국유화 입법은 평탄한 가운데 통과됐다. 잉글랜드 은행을 국유화하는 법안을 냈을 때 보수당의 처칠이 찬성하면서 보수당 의원들의 반대가 거의 없었다. 반관반민(半官半民)의 전국석탄관리위원회 설치법안도 격렬한 반대는 거의 없었다. 해저 전신 및 무선전신회사의 국유화와 항공사업을 운영하는 공사의 설립도 쉽게 통과됐다. 이는 앞선 보수당 정부가 추진한 정책을 계승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1947년 영국운수위원회 설립은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이는 철도 및 운하사업의 국유화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도로사용료 사업의 국유화 때문이었다. 국유화 가운데 가장 격한 논쟁을 유발한 건 鐵(철) 및 鋼鐵(강철)산업의 국유화다. 이 산업은 토목 및 건축공사 등 여러 산업에 중복되는 일종의 복합산업이었기 때문이었다. 수상은 모리슨에게 조용히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국유화안 대신 정부가 임명하는 통제위원회 설치를 연구하라고 지시했다. 내각에서 베반(1897~1960)은 이를 강하게 반대해 곧 철회하고 말았다. 대신 1949년 정부가 산업 구조를 완전히 바꾸지 않고 철 및 강철회사의 자산을 구매하는 법안이 통과됐다.
1947년 중대한 외환위기 때 대장대신인 달톤이 사임하고 그 자리에 스태훠드 크리프스가 앉았다. 스태휘드 크리프스는 국가 경제사무에 광범위한 통제권을 행사했다. 애트리와 베빈 다음으로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크리프스는 영국의 수출품을 외국과 효과적으로 경쟁하도록 임금제한정책을 실시했다. 크리프스는 이 정책을 노조가 동의하도록 설득했다. 노조는 이 정책에 기꺼이 동의했다. 그 이유는 크리프스가 강한 재분배적 과세체제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집권 노동당이 임금억제책의 하나인 임금가이드라인제도를 강행하고, 노조는 작은 떡고물을 받아먹고 이를 동의하는 구조가 됐다. 영국에서 당의 타락은 노조의 타락을 부추기는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일반국민의 인기를 가장 많이 얻은 훌륭한 정책은 사회복지 정책과 입법이었다. 의무교육을 15살 까지 올렸고, 대학의 국가장학금을 늘렸다. 제임스 그리휘스는 베버리지의 사회보험법안을 국가보험법으로 제정했다. 보건대신 애뉴어린 베반(1897~1960)은 무상의료를 규정하고 주요 병원의 국유화 등 국민의료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베반(1897~1960)은 주택 문제에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노동당에서 가장 심각한 정책 논쟁은 외교와 국방이었다. 외무대신 베빈은 소련의 비타협적인 태도에 직면했다. 베빈은 나토 창설도 주동하고, 미국과 동맹정책은 물론이고, 소련의 압력에 저항한다는 명목으로 군비 증강도 추진했다. 이런 정책은 노동당원에겐 그다지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노동당 외교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철저한 평화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소련의 외교정책이 아무 잘못도 없다는 극단적인 좌익 4~5명의 노동당 의원과 노조의 소수 간부, 일부 비밀 공산당원들이었다. 노동당 좌파 의원들은 소련과 미국 사이 제3세력이 되고자 했다. 1947년 4월 72명의 노동당 의원들이 베빈의 국방정책에 대항해 반란했다. 이 때문에 노동당 정부는 망신살이 뻗혔다. 결국주동자들은 노동자 무소속 소정당을 창설했다. 그러나 모두 1950년 선거에서 패했다.
애트리는 인도에서 영국군 철수 기한을 확정하고 인도에 마지막 총독인 마운트 밧텐을 파견했다. 이로써 1948년 신생국가 인도와 파키스탄이 태어났다. 버마와 세이론도 독립했다. 이 가운데 버마만 유일하게 영연방에서 완전 탈퇴했다. 팔레스타인은 잘 해결하지 못했다. 1948년 영국군이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했다.
4. 애트리와 선거택일
원외 노동운동의 확고한 지지는 노조 통솔력에 힘입었다. 베빈이 속한 운수 및 일반노조는 베빈과 같은 편인 아더 딕킨의 지휘 하에 주요 노조의 충성을 당에 보였다. 진짜 위험은 주요 노조내 주요 간부에 공산주의자가 침투해 정책의 변화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영국 공산주의자들은 애트리와 베빈을 제국주의자의 충성스런 지지자로 간주했다. 노조 총평의회는 공산주의에 경고를 발표했다. 1949년 말 9명의 상임 노조간부를 해임했다. 우익인 광산노조나 기계공노조에선 그런 일이 없었다. 광산노조위원장인 윌 로우더는 공산당 서기장인 아더 호너를 강경한 조치로 징계했다. 대규모인 일반 및 도시노조는 1920년대부터 공산주의자들의 가입을 금지해왔다. 여러 노조는 정부를 지지하고 또 임금제한정책에 동의했다.
좌파 운동의 붕괴와 함께 총선에서 노동당의 위험은 사라졌다. 1945~1950년 노동당은 보궐선거에서 단 1석도 잃지 않았다. 애트리는 되도록 총선날짜를 미루려고 했다. 3월로 미뤄 따뜻하고 쾌청한 날을 택하려고 했다. 모리슨은 1950년 총선 슬로건으로 “노동당은 영국을 믿는다”를 내세웠다. 국유화도 공공소유에 적합한 산업인 설탕 시멘트 수도사업만을 언급했다. 선거가 다가오자 노동당에 반대하는 새로운 동요가 있었다. 보수당 조직은 1945년보다 훌륭하게 개선됐다.
1950년 총선결과 노동당은 겨우 턱걸이로 정권을 유지했다. 1950년 선거결과 노동당은 1,325만표(46.8%)를 받아 보수당보다 25만표 많았다. 노동당은 하원에서 겨우 과반인 315석을 차지했다. 보수당은 298석, 자유당은 9석, 아일랜드 국민당은 2석을 차지했다. 이로부터 오랫동안 노동당의 쇠퇴가 시작됐다. 대학 선거구제도를 폐지하는 바람에 무소속 당선자는 사라져 버렸다.
중산계급 투표자는 많이 이동해 보수당으로 갔다. 노동당에서 보수당으로 전향은 1945년과 비교하면 3.3%에 달했다. 그러나 웨일즈는 겨우 0.3%만 옮겨갔다. 지방 잉글랜드의 일부지역도 이탈자가 1% 미만이었다.
제7장 당내 분규와 쇠퇴(1950~1960)
1. 당헌 4개 조항 개정투쟁
1950년대 노동당의 주요한 특징은 첫째 당 지도자들 사이의 공공연한 충돌이다. 둘째 영국민의 노동당에 대한 인기 추락이다. 1950년대는 점차 원외의 노조 권력이 당을 지배했다. 1940년대 10년을 경과하면서 원내 권력의 당 지배는 자취를 감추었다. 애트리는 1955년 사임 때까지 위대한 명성과 수상이 될 가능성을 항상 지니고 있었다. 1953년 1월 애트리는 70세 생일이었다.
1951년 베빈이 죽음으로서 당내에 애트리의 든든한 지원군이 사라졌다. 애뉴어린 베반(1897~1960)이 영도하는 당내 반대집단인 좌파는 많은 지지세력을 획득했다. 노동당 권력의 중요한 핵심인 전국집행위원회가 당내분쟁의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당 대회의 핵심 권력은 주요 노조 지도자들 수중에 떨어졌다. 제일 중요한 노조 지도자는 운수 및 일반노조 서기장인 베빈의 후계자 윌 로우더와 일반 및 도시노조의 통 윌리암슨 등이 1955년 노동당의 권력을 대부분 계승했다. 그러나 운수노조의 아더 딕킨은 일찍 죽었고 그의 직책은 좌파의 전투적 성격의 소유자 프랑크 코우신스에게 넘어갔다. 우파 노조지도자는 크게 약해졌다. 프랑크 코우신스는 불평분자였다. 코우신스는 1960년 당의 권력을 장악하려고 당헌 4개 조항의 개정투쟁을 일으켰다.
2. 신승한 노동당 정부의 고투
1950년 2월 총선에서 노동당은 하원의 과반수에 고작 6석이 더 많은 315석을 차지했다. 노동당 정부는 보수당의 비열한 방해공작으로 철 및 강철 국유화 시행일을 1951년 2월로 미뤘다. 정부 고위층 내부에 내분이 일어났다. 어네스트 베빈과 크리프스는 건강 때문에 사임하고 얼마 뒤 죽었다. 1950년 10월에 대장대신 직을 포기한 크리프스의 뒤는 휴 게이츠켈(1906~1963)이 맡았다. 게이츠켈(1906~1963)은 44살의 능률적인 행정가였다.
한국전쟁 때문에 재군비 계획의 막대한 예산이 필요했다. 예산을 담당하는 장관인 휴 게이츠켈(1906~1963)은 1951년 국민의료법 예산안 중 치과와 안과 비용을 군비 증강에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당내 여러 사람이 1951년 4월 게이츠켈의 이런 예산변경에 항의하면서 사퇴했다. 노동대신이며 원내간사장인 존 프리맨이 항의하면서 사임했다. 정부는 전국에 걸쳐 인기를 잃었다.
모리슨은 페르시아 정부가 영국-이란 합병석유회사의 직원을 추방한 분규를 잘못 처리해 불만이 터져 나왔다. 모리슨은 국민에게 외교정책을 설명하는 기술이 부족했다. 한국전쟁과 원료 및 수송비 인상, 통화팽창, 물가폭등의 위기가 몰아쳤다.
애트리는 약간의 희망 품고서 물가폭등 때문에 새 총선을 선포했다. 선거운동의 주요 쟁점은 생활비와 전쟁의 위험이었다. 보수당은 전자에 집중했고, 노동당은 후자에 집중했다.
복지비를 줄여 국방비로 충당하는 당이 노동당인가. 집권만 하면 이렇게 바뀌는 이유가 뭘까. 1951년 10월 영국 총선은 거꾸로 된 선거운동이 판을 쳤다. 우파(보수당)는 물가 폭등으로 파탄난 노동자 서민의 생활고를 주요 이슈로 삼았고, 좌파(노동당)는 냉전이라는 보이지도 않는 전쟁의 위협을 강조하면서 국방비 증액을 요구하는 선거캠페인을 벌이는 이런 꼴사나운 선거판을 벌였다.
보수당의 안토니 이든은 도표를 사용해가며 통화팽창에 대해 TV 방송으로 선거운동을 전개했다. 노동당은 페르시아 문제에 대한 보수당의 태도가 ‘전쟁상인’이라고 주장했다. 노동당을 후원하던 데일리 밀러지는 ‘누가 방아쇠에 손을 대고 있는가?’라는 기사를 선거 당일자 1면 톱으로 실었다.
불리한 조건에도 노동당은 1951년 10월 총선에서 역사상 훨씬 더 많은 1,400만표를 얻었다. 보수당은 그보다 25만표를 적게 받았다. 그러나 의석수는 보수당이 더 많아 과반을 확보했다. 하원에서 보수당은 321석, 노동당은 295석, 자유당 6석, 아일랜드 독립파가 3석을 얻었다. 보수당은 하원 과반 의석에서 겨우 17명을 초과했다. 정권은 보수당으로 넘어갔다.
1950년 2월과 1951년 10월 총선에서 노동당은 상당히 만족했다. 그러나 노동당이 집권했을 때 시작된 당내분규 양상은 노동당 활동의 전부를 지배했다. 지방 당 조직은 붕괴상태에 빠졌다.
3. 베반과 게이츠겔
1952년 3월 노동당 내 소수파 베반(1897~1960)과 노동당 당권파인 의회 지도자들은 하원에서 재군비(군사비 증액) 문제로 공공연히 마찰했다. 애트리 등 당권파는 군사비 증액을 통한 재군비에서 정부 수정안을 동의했다. 그러나 베반 등 소수파 57명의 노동당 의원들은 반대했다. 반대파는 각자 다른 동기에서 출발한 다양한 인사들의 불안전한 결합이었다. 반대파는 보수당 정부의 내각에서 사임한 애뉴어린 베반(1897~1960)과 적극적 평화주의자, 좌익파도 있었다. 그러나 반대파의 힘은 예상했던 것보다 크지 않았다.
노동당은 다시 의사규정을 개정해 의회 내 소수파가 원내에서 그들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도록 했다. 이 때문에 노동당 소수파 의원이 하원에서 원내정당의 결정에 반하는 투표를 하려면 제명의 위험을 각오해야 했다.
노동당의 ‘양심조항’은 늘 오락가락 했다. 1946년엔 당의 결정에 반하는 투표를 정당하게 인정했으나, 불과 6년 뒤 이를 뒤집었다. 늘 당권파가 유리한 방향으로 의사규정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표변했다. 이런 모습은 노동당 창당 초기부터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반대파 대부분은 언론인들이었다. 미카엘 후트, 톰 드리버그, 리차드 크로스만 등은 활동적 정치란 기고가들이다. 이들은 트리뷴지에 자기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조합주의자들은 신문을 읽지 않았다. 베반(1897~1960) 자신의 강력한 개성과 비상한 언변 능력도 반란에 한몫했다.
1952년 당 대회에서 처음 원외분규가 있었다. 집행위원회에 속한 7개 조직 중 6개가 베반 파에 넘어가, 모리슨과 달톤을 해임했다. 당시 아더 딕킨은 노동조합회의의 가장 가까운 대표로 트리뷴신문집단의 해산을 요구했다.
당이 공식으로 인정한 조직체 외의 모든 당내 집단조직체를 즉각 해체하자는 애트리의 중재 제안은 188 대 51표로 통과됐다. 당시 애트리는 거의 70세로 노쇠했다. 노동당의 주역이었던 모리슨은 전국집행위원회에서 제명됐다는 불명예를 안고 있었다. 우익 노조지도자 아더 딕킨, 로우더, 윌리암슨 등은 당 대회의 1/3을 장악했다. 모리슨은 ‘당의 부대표에게는 집행위원회 내에서 직권 따른 직책을 주어야 한다’는 타협안을 수락하면서 대회에서 물러났다.
독일 재군비 문제가 발생했고, 이는 베반파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처칠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영국의 재군비를 촉구받았다. 애트리와 모리슨은 당에 미국 요구의 수락을 촉구했다. 당 대회는 113 대 104의 근소한 차이의 투표로 수락했다.
1954년 당 대회는 두 개의 논쟁이 있었다. 하나는 그린우드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당 재정 책임자 자리였고, 또 다른 하나는 독일 재군비 문제였다. 노조 지도자들은 반대파인 베반(1897~1960)의 경쟁자로 휴 게이츠켈(1906~1963)을 내세웠다. 게이츠켈(1906~1963)은 광산노조의 지지를 받았다. 게이츠켈(1906~1963)은 광산노조에 경제학 강사로 인기가 높았다. 최근 연료성 대신의 성과도 인정받았다. 게이츠켈(1906~1963)은 아더 딕킨을 비롯한 우익 노조 지도자들의 지지도 받았다. 게이츠켈(1906~1963)은 400만표를 얻어 200만표의 베반을 앞서 당의 재정 책임자가 됐다. 총선을 앞두고 실시한 이 투표는 당의 방향을 명백히 오른쪽으로 구속했다. 애트리와 모리슨의 당 지도권은 여전히 큰 시련을 겪었다. 당 영도권은 전체 600만표 가운데 겨우 25만표 차의 과반수로 유지됐다.
애트리의 지도력은 목공노조 등 소규모 노조 덕분에 겨우 유지됐다. 베반은 반대투쟁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베반(1897~1960)은 게이츠켈(1906~1963)을 지도부의 거수기에 다름없는 ‘자동계산기’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1955년 초 베반은 의회 지도권에 불복종을 공공연히 시위했다. 핵무기를 제조하려는 영국 정부의 결정은 1955년 국방성 백서에 공표됐다. 베반은 일정한 제한이 없이는 이를 수락해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베반을 따라 모두 62명의 노동당 의원들이 투표에서 기권했다. 핵보유 결의안은 142 대 112로 원내 정당에서 받아들여졌다. 모리슨과 아더 딕킨 등 주요 노조 지도자들은 배반을 제명하려고 했다. 애트리는 베반에게 ‘사과한 뒤 당원직을 유지하라’는 타협안을 냈다. 애트리는 이런 식의 절충안으로 여러 해 동안 자기의 지위를 보존했다.
2주일 뒤 처칠은 수상직에서 사임하고 같은 보수당의 이든이 새 수상이 됐다. 1955년 5월에 즉각 총선을 치르기로 했다. 선거는 노동당내 분규와 경제회복 때문에 보수당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보수당은 세금도 인하했다. 대장대신 버틀러의 예산안은 신중하고도 논쟁없는 정책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무골(無骨)정책’이라 불렀다. 무골정책은 전체로 봐서 인기가 있었다. 보수당은 무골정책을 내세워 노동당의 비난을 잠재웠다. 노동당은 각종 파업으로 1955년 초여름 인기가 떨어졌다. 부두파업과 철도파업에 뒤이어 1개월 만에 끝난 신문파업이 선거기간에 일어났다. 특히 부두와 철도 파업은 노조 내부의 갈등으로 일어났다.
총선은 평탄했다. 노동당의 여러 국유화 제안은 어떤 환영도 받지 못했다. 선거유세에서 유권자들은 냉담했고 규모도 줄었다. 노동당은 아주 퇴폐한 것처럼 보였다. 당내 내분은 당을 약화시켰다. 상임 당직원은 1951년 296명에서 227명으로 줄었다. 보수당은 유력했다. 1955년 5월 선거 결과 보수당이 의회 과반수를 넘겼다. 보수당은 1951년 과반에서 겨우 17명을 넘긴 것에 비해 이번 선거에선 58명이나 과반을 넘겨 당선했다. 보수당은 344명의 의원을, 노동당은 277명, 자유당은 6명, 아일랜드독립당은 2명의 의원을 차지했다. 집권정당이 총선에서 재차 과반을 획득하면서 그 차이를 더 늘린 건 100년 만에 처음이었다.
노동당의 득표율은 48.8%에서 46.4%로 떨어져 보수당과 3% 이상 차이를 보였다. 노동당에서 보수당으로 전향은 약 1.8%였다. 지역별로는 균일하지 않았다. 스코틀랜드 지역은 고실업 때문에 보수당으로 전향이 적었다. 호황을 누리던 잉글랜드 중부지역의 전향이 더 많았다. 유권자들의 냉담으로 보수당도 전체 득표수에선 1951년보다 약 40만표 떨어졌다. 노동당 득표수는 150만표나 떨어졌다. 노동당 성향의 투표자가 더 많이 기권했다.
노동당은 대부분의 문제가 당의 통제 밖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선거패배를 평가했다. 완전고용 실패, 시간외 노동 증가, 중년여성의 낮은 고용율 등이 문제였다.
4. 게이츠켈과 우경화
노동당은 주요 지도자들이 이미 노령이었고 새 시대의 요구에 손을 대지 않고 구태의연한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당내 내분 등 문제가 안으로 부글부글 끓기만 했다. 1955년 패배 이후 노동당은 이런 사실을 인식했다. 달톤은 1955년 선거에 패배 뒤 새 의회 시작과 함께 사임하면서 늙은 동료들의 동반사임을 요구했다. 달톤은 자기 부하인 휴 게이츠켈(1906~1963)에게 당 영도권을 열어 줄려고 했다. 달톤은 노령을 이유로 사임했다. 노동당의 재야 내각 중 9명이 65세를 넘었다. 윌리암 휘트리, 에마뉴엘 쉰월 등 4명이 사임했다.
게이츠켈(1906~1963)의 당권 장악은 더욱 더 유리해졌다. 애트리도 1955년 말 당수직을 사임했다. 게이츠켈은 당의 지도자가 됐다. 애트리보다 더 우익이었던 게이츠켈의 선출은 당파 투쟁의 새로운 폭발의 징조였다. 당 대회에서 가장 크고 집단 투표성향을 가진 운수 및 일반노조 서기장에는 좌파의 투사 프랑크 코우신스가 뽑혔다. 이는 노동당 우파의 무질서한 양상을 완전히 노출시킨 사건이었다.
다행히도 수에즈 운하 전쟁 발발이 노동당을 내부적으로 단합하게 했다. 당내에서 앙숙이던 게이츠켈과 베반은 함께 효과적인 투쟁 연설을 하면서 훌륭히 활동했다. 전국노동회의는 돌연 ‘전쟁은 위법’이라는 슬로건 밑에 국민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재기했다. 1959년 초 수에즈 사건은 노동당을 결합시켰다. 보궐선거 결과 보수당 정부의 인기가 떨어졌다. 이는 노동당과 자유당에게 유리했다.
가솔린 가격의 폭등과 수에즈운하 작전의 실패로 보수당 정부가 추락했다. 안토니 이든 수상의 몰락에 이어 하롤드 맥밀란이 수상에 앉았다. 하롤드 맥밀란은 실력 있는 적수라서 노동당에겐 불행이었다. 하롤드 맥밀란은 지혜와 변화무쌍한 특색을 겸비했다. 맥밀란 수상은 국내정책은 온건한 노선을 유지했다. 대장대신 소니 크로프트를 희생시키면서까지 노조와 적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경제발전을 이뤄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노동당도 차기 선거에 대비해 최선을 다했다.
노동당은 보수당 맥밀란 수상을 재임시킨 1958년 총선 패배에서 여러 교훈을 배웠다. 따라서 당의 내분은 해소됐다. 베반이 영국은 맨발로 국제회의에 나가선 안 된다고 말하면서 수소폭탄 보유 문제에서 당내 다수파를 지지하고 나섰다. 베반과 윌슨이 재야 내각에 참여해 당 지도체계 내에서 반란적 소수파는 사라졌다. 사회주의단체도 거의 없어졌다.
노동당은 하나의 새로운 정책을 신중하게 준비했다. 경기확장의 필요성과 정부의 조장정책의 확대, 사회복지 확대를 위한 경제발전 선행론을 주장했다. 더 중요한 교육제도의 개편도 담았다. 보수당이 국유화를 폐지한 강철산업과 공공도로사용 국유화를 뺀 나머지 산업의 국유화는 포기했다.
1959년 맥밀란은 동서냉전을 개선하는 정상회담에 집중해 인기를 얻었다. 소비경기도 놀랍게 좋아졌다. 1959년 9월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에 들어갔다. 선거는 보수당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노동당도 열심히 했다. 게이츠켈은 몸소 수많은 유권자들에게 그가 활발하고 성실하다는 인상을 주면서 전국에 걸쳐 선거유세를 성공적으로 벌였다. TV를 어느 때보다 더 많이 활용했다.
1959년 9월 총선 중반전에 노동당 대변인이 세금을 인상하지 않겠다는 여러 약속을 발표했다. 이는 정치적 뇌물이었다. 여론이 오히려 보수당으로 기울었다. 선거결과 보수당은 현저히 많은 다수의석을 차지했다. 새 하원에서 보수당은 365명, 노동당은 285명, 자유당 6명, 무소속 1명을 차지했다. 노동당의 득표율은 46.4%에서 43.8%로 떨어졌다. 자유당은 다수의 후보를 내 득표율을 2배로 늘렸다.
노동당 소수파였던 좌파의 베반 마저도 나중엔 공공연히 영국의 핵보유를 주장했다. 당내 좌파들도 결국엔 포퓰리즘에 절어 갔다. 당선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영국 노동당은 올 한 해 한국의 진보정당에게 반면교사다. 저자 헨리 펠링은 당선을 위해서라면 감세정책도 서슴없이 선거공약으로 내건 영국 노동당의 대중추수주의를 ‘정치적 뇌물’이라고 표현했다.
5. 패배와 퇴보에 도전하면서
노동당은 1951년, 1955년, 1959년 세 번의 선거에서 연속 패배했다. 195O년대 노동당에겐 불가피했다. 1959년의 패배로 노동당은 철저하고 심각한 반성을 해야 했다. 게이츠켈은 선거가 끝난 뒤 열릴 당대회 연설에서 생산, 분배, 교환의 수단에 대한 공동소유제를 규정한 현재의 당헌 4개 조항의 포기를 주장했다. 그러나 당내 격렬한 논쟁이 있은 뒤 전국집행위원회에 기존 조항의 유지와 새로운 정책 성명의 추가사항을 위임하는 타협이 이뤄졌다.
당권파가 생산, 분배, 교환수단의 공동소유제 등을 담은 당헌 4개항의 개정을 요구했다. 이는 노동당의 정체성을 바꾸는 근본변화를 의미한다. 이렇게 진보정당은 늘 당헌 개정으로 정치적 자살행위를 계속해가며 후퇴했다. 우리도 그런 모습이다.
당헌개정에 관한 당내 의견대립은 당 국방정책에서 보다 광범한 논쟁이 벌어지자 뒤로 밀렸다. 핵무기의 일방적 폐지를 주창했던 핵군축 투쟁은 젊은 세대 가운데서 많은 새로운 지지당원을 획득했다. 게이츠켈이 당과 상의해 1960년 여름 국방정책에 대한 새 성명을 작성했다. 노조 내 좌파 소수집단에 가세한 프랑크 코우신스는 노동당의 현 국방정책에 반대해 운수노조를 좌우했다. 코우신스의 투쟁은 1960년 9월 전국노조회의와 10월 노동당대회에서 절정에 달했다.
전국노조회의가 당의 공식 국방정책을 승인했으나 운수노조는 이를 거부하면서 투쟁적인 결의안을 제출했다. 1960년 10월 스카보로 당 대회에서 게이츠켈은 얼마 전 죽은 베반의 도움을 받을 수 없어 국방정책 결의를 위해 맹렬히 투쟁했다. 그러나 결의안은 근소한 차로 부결됐다. 그리고 일방적 군축 결의안이 상정돼 근소한 차로 통과됐다. 이는 당의 역사상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었다.
주요 현안에 의회 지도자의 정책이 당 대회에서 부결되고 군축을 지지하는 당대회 다수파와 보수당의 핵방위정책에 동의하는 원내정당의 다수파가 분열했다. 그러나 게이츠켈은 당 결의안의 번복을 위해 싸우고 또 싸우겠다고 공언했다. 이로써 노동당은 1960년 12월 그 어느 때보다 더 약해졌다. 당의 지도력은 분규에 빠졌고 당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노동당이 패배를 겪고 퇴락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재기에 성공할 것인지는 어느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당권파의 패권주의의 극단을 보여준다. 당 대회에서 부결된 내용을 여전히 고수하면서 반대로 행동하는 당권파의 패악은 공공연했다. 영국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제8장 결론 : 당의 과거와 미래
1. 윌슨의 시대는 오는가?
노동당은 계급적 이익을 대표하기 위해 창당했다. 노동당은 노조와 사회주의자들의 연대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노동당은 창당 직후 중산계급의 기풍으로 자유주의의 전통적 특징 대부분을 받아들였다.
자유당은 1차 대전 전후해서 와해를 시작했다. 자유당의 지식층은 노동당으로 전향하기 시작했다. 노동당은 당 내에서보다 현실에서 계급의 한계를 넘어서까지 지지를 획득했다. 초기 당의 지배권은 노동자연맹 즉 독립노동당 지도자들과 당의장이던 람제이 맥도날드 등 열성적 지지자의 노력에 대부분 의존했다. 당의장으로 맥도날드의 뒤를 계승한 아더 헨더슨도 거의 도전 받은 바 없는 절대적 권위를 보유했다.
노동당 당대회는 항상 중요했고 당의 공적 토론은 전국자유당연맹체나 전국보수당연맹의 토론과 달리 노동당을 직접 구속했다. 그러나 원내 지도자와 노조 지도자들 사이의 접촉은 집권할 태세로 확대된 이후부터는 긴밀성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1920년 이래 주요한 노조 지도자들이 자기 노조업무에 너무 매몰됐기 때문이다.
1931년 람제이 맥도날드와 노조회의 총평의회 사이의 알력으로 노조와 당의 관계는 적대적으로 변했다. 전국노동회의가 1932년 새로운 기초를 근거로 재출발했던 건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노력이었다. 원내 의회지도력이 위축되고 비능률적이었기 때문에 노조 지도자인 베빈과 시트린이 당을 수년 간 간접 지배하면서 의회 정당을 통제했다.
얼마 뒤 온건하고 유순한 애트리는 당 안정의 주인공이 됐다. 의회와 노조 사이의 훌륭한 연대관계가 이뤄졌다. 이 상태는 1950년까지 지속됐다. 1960년대에 와서 유대관계는 다시 불편해졌다. 당헌 개정을 내세운 게이츠켈과 거대노조인 운수노조 위원장에 좌파 투쟁가 프랑크 코우신스가 당선됐기 때문이다.
세 번째 패배한 1959년 총선 이래 노동당의 장래 전망은 암담한 예언이 많았다. 그러나 장차 노동당이 다시는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추측은 경솔하다.
[주] 붉은색 글자는 필자의 주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