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다국적 기업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낡은책] 다국적 기업이란 무엇인가 (기사연, 민중사, 1983.11, 90쪽)

맥쿼리가 한국의 지하철과 고속도로, 유료도로, 방송시장에 들어와 사고를 쳐대는 바람에 최근 일시적으로 다국적 기업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높아졌다.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은 30년 전 1983년에 한국의 다국적 기업을 분석하고, 다국적 기업의 생태를 연구해 그 작동원리를 폭로했다. 현재의 우리는 ‘교육용 소책자’로 나온 90쪽 분량의 이 책만큼이나 다국적 기업을 잘 알고 있을까.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의 당시 원장은 조승혁 목사였다. 시인 고은은 만인보에서 조승혁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다국적 기업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1960년대 초 / 이승훈 조문걸 들과 함께 / 공장에 들어가 / 노동의 나날 겪어내면서 / 그의 신앙을 전하고 / 선업선교의 사람이 되었다 / 수도권 도시산업선교회의 실체로 / 그의 일생을 삼았다”

2~3년 전 나는 국회 도서관에서 ‘초국적 기업’이란 키워드로 자료를 검색해봤다. 결과는 비참했다. 모두 10건도 안 되는 자료가 나왔다. 단행본과 연구논문도 거의 없고, 심상정 의원(제17대) 의원실에서 나온 세미나 자료가 몇 보였을 뿐이다. 한겨레나 경향신문 같은 곳에 수없이 글을 올리는 진보 연구자들의 게으름을 통탄했다.

치열했던 70년대 노동운동이 보인다

우리는 흔히 80년대를 노동운동의 시작으로 여긴다. 그런 시각 자체가 70년대 운동에 대한 폄훼를 안고 있다. 70년대 자료가 별로 없으니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에 표로 정리된 ‘마산 수출자유지역 노동쟁의’(이창복, 창비, 1974년 겨울호) 현황을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표는 이창복의 1974년의 것에서 75~77년의 것을 추가해 만들었음.)

10월 유신의 엄혹한 겨울에, 1972년부터 1977년까지 불과 5년 동안 마산에서만 20여 개 사업장에서 40여 차례 노동투쟁이 벌어졌다. 투쟁의 기록들을 보면 70년대 노동운동은 여성 중심이고, 80년대 노동운동은 남성 중심이라는 고전적 분석도 필요 없다. 남녀 노동자가 골고루 투쟁했다. 투쟁의 계기도 다양하다. 노조설립부터 인권차별 철폐, 해고 취소, 여성권 문제, 능력급제 폐지 등 실로 다양하다.

이 책은 다국적 기업의 다양한 돈벌이 방식을 소개한다. 이전가격, 환차익, 세금면제, 금리차익 등 실로 다양하다. 이 책은 칠레 아옌데 정부를 전복시킨 배후가 미국 CIA가 아니라 미국의 다국적 기업 ITT라고 단언한다. 다국적 기업이 한 나라의 정권까지 없애버릴 만큼 막강하다고 지적했다. 실제 1970년 미국 제너널 모터스(GM)의 매출은 당시 한국의 국민총생산 82억 달러의 3배에 달했다. 동시에 이 책은 다국적 기업이 개도국의 소비문화를 왜곡시키는 경제외적인 부작용까지 살폈다.

머리말 : 1983년 11월 25일 - 기사연 원장 조승혁

다국적 기업은 본사국(Home Country)와 현지국(Host Country)로 나뉜다. 우리나라엔 1960년대 들어 많은 다국적 기업이 진출했다. 이들 다국적 기업 가운데 우리나라 GNP보다 매출액이 더 많은 기업도 몇십 개나 된다.

기사연이 구체적으로 관심을 가진 건 1982년 7월 ‘콘트롤 데이터’의 폐쇄로 노동자 문제가 생기면서부터다. 다국적 기업은 제3세계 빈국을 도우려 진출하는 게 아니라 최대한 이윤을 뽑아내려고 온다. 기사연은 79년 5월 한국 내 다국적 기업의 이해를 위해 연구협의회를 열었고 81년 11월 ‘한국의 산업화와 다국적 기업’이란 조사연구서와 82년 10월 ‘다국적 기업의 이해와 대응’이란 자료모음도 발간했다. 이 책은 ‘다국적 기업’에 대한 교육용 소책자다.


1장 다국적 기업이란 무엇인가?

1. 정의
UN은 다국적 기업을 “2개국 이상에서 자산을 지배, 운용하는 기업”이라고 정의했다. 다국적 기업 문제의 핵심은 기업의 특수한 형태와 경영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간의 경제 잉여의 피탈-탈취의 문제, 국가간 경제적 종속-지배의 문제’다.

2. 역사
다국적 기업은 ‘자본수출 단계’의 기업형태다. ‘직접투자 단계’의 기업형태다. 다국적 기업은 역사적으로 무상공여 -> 공공차관 -> 상업차관 -> 직접투자로 변해왔다.

3. 중요성
1970년 미국 제너널 모터스(GM) 자동차회사의 판매고는 당시 한국 국민총생산 82억달러의 약 3배인 243억불이었다. 다국적 기업은 가격 조작, 환차익을 노린 환투기도 한다. 원료의 채취에서 수송, 생산, 판매, 배달의 전 과정을 지배한다.

다국적 기업의 경제활동은 본사국인 선진국의 강력한 국가적 지원을 받는다. 미국의 다국적 기업인 ITT는 칠레의 합법정권인 아옌데 정부를 전복하려고 CIA와 공동으로 공작했다. 상품의 가격 조작으로 한 나라를 전복시킬 정도로 힘이 세다.

4. 특징
다국적 기업의 돈벌이 방법은 ‘전면적’이다. 생산 과정에선 밑지고 판매 과정에선 더 큰 이윤을 올리기도 한다. 1973년 석유 위기 때 석유 판매권을 독점하는 소위 메이저들은 사상 최고의 순익을 냈다. 이는 운송 등의 운영외적 이익 때문이었다.

다국적 기업은 일국 기업보다 월등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다. 다국적 기업은 ‘독과점’적이다. 국제 정치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거대한 다국적 기업은 개도국의 경제 외교에 큰 영향을 미친다. 록히드 사건이 유명한 예다.

다국적 기업은 ‘소비 문화를 왜곡’한다. 미디어 매체를 통해 광고를 실시해 광고기술을 고도를 발달시킨다. 대중 문화, 소비 문화 등을 만들어 전통적 문화를 파괴한다.

다국적 기업은 ‘국민이 없다.’ 다국적 기업은 인류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일체의 사회적,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다국적 기업은 높은 생산력과 기술력을 갖고 있다. 다국적 기업은 과학기술의 연구개발을 장악하고 있다. 1970년 미국의 7대 다국적 기업이 전체 연구개발비의 35%를 사용했다.


2장 개도국과 다국적 기업

1. 공과
다국적 기업은 개도국에 이익을 주는가? ILO는 1975년 가을호 <고용, 성장, 기본적 필요들> 보고서에서 “개도국이 사회적 요구와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경제개발을 하는 경우 다국적 기업과 이해가 충돌하는 경우가 흔하다”고 했다.

장기적으론 이익을 준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1900~60년 중동 석유의 역사를 보면 이 기간 다국적 기업이 아랍 여러 나라에 지불한 금액은 총 99억달러인데 반해 이들이 얻은 이윤은 163억달러였다.

2. 투자의 성격

해외투자는 다국적 기업에게 1) 원료 자원의 안정적 확보 2) 무역장벽의 해결 3) 낙후한 시설 또는 기술의 재이용 등의 이익을 준다. 다국적 기업을 수용하면 정치적 영향력도 같이 수용한다. 프랑스 드골 정권의 반미정책은 프랑스 전략산업의 90% 이상을 장악한 미국계 다국적 기업의 압력으로 결국 실패하고 정권까지 무너졌다. 다국적 기업의 모국 정부는 다국적 기업을 대외정책 수행의 도구로 이용한다.

1960년 후반 이후 다국적 기업은 제조업에서 투자를 증대하고 있다. 이는 모국의 임금 상승압력을 회피하면서 이윤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3. 이윤획득의 독특한 방식

‘이전가격’으로 돈을 번다. 이윤 획득 방법이 여러 가지다. 이전 가격은 본국의 모회사가 외국의 자회사에 상품을 팔 때 정상가격보다 훨씬 비싸게 팔아 그 자회사의 이윤을 모회사로 빼돌리는 방법이다. 다국적 기업은 이전가격을 통해 세금 포탈, 배당 회피, 송금 상한선 제한 회피 등을 꾀한다. 이전가격은 모회사가 자회사의 원료나 부품을 값싸게 매입하는 경우에도 생긴다. 74년 오일 쇼크 때 석유 다국적 기업의 이익은 대부분 석유회사에서 나온 게 아니고 석유운송 기업에서 나왔다. 알맹이는 다 모기업에 보내고 자회사는 빚만 잔뜩 진 채 망해버린다. 이윤이 생기는 곳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도 있다.

환율 변동을 이용해서도 돈을 번다. 1967년 갑자기 영국 파운드가 평가절하됐다. 다국적 기업 모빌 오일은 “절하를 단행할 듯한 나라의 은행 잔고를 텅 비우고 차입금을 늘려왔다”고 말했다.

다국적 기업은 ‘세금면제’로 이익을 낸다. 조세피난처는 소득세 법인세를 면제 또는 저율로 해 외국기업을 유치하는 나라를 말한다. 케이만제도, 버뮤다제도, 홀란드령 안데루스제도,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룩셈부르크, 홍콩 등이다. 1972년 12월 듀퐁 사건은 조세피난처를 잘 드러낸다. 듀퐁이 고의로 스위스 판매 자회사에 수출 가격을 인하해 그 자회사의 이익을 높였다.

‘금리 차이’를 이용한 돈벌이도 한다. 미국의 유력한 산업기계 제작회사인 USM은 스위스의 로잔느에 있는 유럽 재무본부가 자회사를 총괄한다. USM읜 72년 총 매출액 5억2700만 달러의 50%인 2억6500만 달러를 해외에서 올리고, 해외이익은 전 이익의 83%에 달했다.

4. 개도국에 미치는 영향

다국적 기업은 개도국에겐 ‘자본 부족 -> 외자 도입 -> 부의 유출 -> 자본 부족’의 악순환을 낳는다. 다국적 기업은 개도국에서 과도한 고이윤, 이전 가격, 세금포탈, 조직 등으로 자본 축적에 기여하기는커녕 자본 축적을 영원히 불가능하게 만든다.

장기적으로 다국적 기업의 개도국 투자는 개도국 내 관련 중소기업들을 약화, 도산시킨다. 1960년대 우리나라 지방 도시에 수없이 많이 있던 영세 콜라, 사이다 등 청량음료 빙과류 공장들이 다국적 기업 진출 이후 싹 사라졌다. 멕시코의 석유 국유화, 칠레의 구리광산 국유화, 1950년대 이란의 석유 국유화 등은 모두 다국적 기업의 방해와 압력으로 실패했다.

경제구조가 취약한 중소기업의 몰락은 그만큼의 궁핍화를 뜻하고 시장층을 엷고 협소하게 만든다. 유기적 관련이 없는 가치관, 문화의 중첩은 서구적 가치관의 팽배, 문화의 잠식으로 나타난다.


3장 한국의 다국적 기업

1. 한국의 경제개발과 외국자본

1945-77년 총 원조 41억 달러 가운데 42%가 원료나 반제품이었고 25%가 농산물, 자본재는 9%에 불과했다. 이런 식의 원조는 소비재 가공산업을 번성시켰고 한국내 중소기업과 농촌경제를 파탄냈다. 대신 원조물자의 유통을 담당하는 비생산적 산업을 비대하게 키웠다.

1957년 이후 미국이 원조를 줄이고 유상차관으로 바꾸자 한국경제는 불경기를 맞았다. GNP 성장률이 57년 8.8%, 58년 5.5%, 59년 4.4%로 계속 떨어졌다. 이 때문에 한국은 60년대 ‘원조에서 차관으로’ 라는 미국 원조정책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했다.

65년 한일 국교 회복으로 공공차관은 상업차관으로 바뀌었다. 차관 도입 과정에서 정치적 부패로 인해 차관기업은 기업경영에 문제가 생겼다. 정부는 69년 봄 “외자기업 중 83개가 은행관리 하에 있고 123개의 경영이 부실하다”고 발표했다. 특히 일본자본으로 세운 기업의 부실화가 심했다. 일본자본으로 세운 기업 85%가 부실했다.

한국 정부는 60년대 말 위기를 극복하려고 직접투자 우선정책을 폈다. 이를 위해 70년 외투기업 노조법을 제정했고 덕분에 외국인투자가 급증했다. 이에 한국의 외자도입은 무상원조 -> 재정 차관 -> 상업차관 -> 직접투자 -> 자본자유화의 단계를 거쳤다.

2. 외국인투자 유치 제도

외국인 투자는 66년 8월 제정한 ‘외자도입법’으로 보장받았다. 이 법은 외국인 투자자에게 상당히 유리한 조건이었다. 이 법 14조는 외국인 투자기업의 모든 재산을 보장했다. 개별적 투자보장 협정도 체결하고 IBRD(세계은행)의 ‘국제투자분쟁해결에 관한 협정’에도 가입했다.

70년대까지 외자도입촉진법에는 연간 과실 송금액을 영업 개시 2년 후부터 투자원금의 1/5로 제한하고 주식과 지분으로 생기는 배당금은 무제한 송금 가능했다. 그러나 정부는 1980년 9월 외국인 투자 방침을 개정해 제한 규정을 없애고 무제한 자유로운 송금을 보장했다.

조세특례도 있다. 외투기업은 5년간 소득세 법인세 재산세를 면제하고 이후 3년간 50% 감면해 준다. 외국인이 인수한 주식과 지분에서 생기는 소득도 위와 같다. 자본재의 관세, 물품세는 완전 면세다.

70년 1월 공포한 ‘외투기업 노조법은 노사분쟁 때 장관에게 직접 신고하고, 20일내 분쟁의 조정을 완료하도록 했다. 70년 1월 수출자유지역설치법을 제정하고 마산과 이리를 지정했다. 이 지역엔 한국의 일반행정권이 미치지 않았다. 그동안 외투기업의 대상 업종을 제한했으나 1980년 9월 외투 인가방침을 개정해 업종을 확대하고 원금 회수 제한을 없앴다.

3. 외국인 직접투자 현황

외국인 직접투자는 79년 말 도착 기준으로 일본이 1위고 미국이 2위다 양국은 전체의 78.7%를 차지한다. 70년대 후반 들어 네덜란드가 늘었다. 산업별로는 광공업이 75.7%, 사회간접자본이 22.9%였다. 제조업 가운데 화공 섬유 전기전자가 전체의 42.5%를 차지했다. 저렴한 노동력 이용과 가까운 동남아 시장을 겨냥했다. 사회간접자본이 22.9%라지만 이 가운데 절반이 넘는 13%가 ‘호텔’이라 매춘관광 등 부작용만 낳고 순수한 의미의 사회간접자본 확충은 없었다.

1개 기업당 평균 투자액은 일본이 61만 달러, 미국 106만 달러, 서구 228만 달러로 일본계 기업이 꽁생원 처럼 소규모다. 합작투자는 전체의 74.8%로 대부분이다.

4.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

외자도입은 단기적으론 투자 재원 확보에 기여하지만 장기로는 국내 자본축적을 방해한다. 과실송금과 이전가격, 조세감면으로 국내에서 생산한 부를 유출한다. 78년 정유 3사의 흑자는 280억 원인데 이는 자본금 총액 626억원의 절반 가량에 해당한다. 우리나라 제조업 평균 이윤율이 20%인 점과 비교해도 엄청 높다. (신종수, 석유3사 메이저의 폭리명세, 월간중앙, 1980.4, 184쪽)

걸프는 80년 주식을 팔고 유공에서 철수할 때까지 63~79년까지 5,165만 달러를 본국에 보내 투자액 2,969만 달러의 173%를 회수했다. (변상근, 걸프의 18년 결산, 신동아 1980.10)

외국인 투자기업의 대부분이 원자재를 외국에서 조달해와 수출 증가와 동시에 수입도 증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실제 국제수지 개선 효과는 없다. 1977년 현재 제조업 전체 종사자 191만8,931명 가운데 외투기업 종사자는 20만801명으로 10%가 넘는다. 외투기업의 단기 고용효과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노동자의 헌법적 권리를 법으로 제약하고 저임금에 기반한 전자업체 등의 문제를 낳았다. 미국계 전자부품 제조업 시그네틱스는 자동화로 79년 1천명을 해고하고 3천명만 남았다. 자동화한 접착공정엔 전에 10명이 하던 일을 1명이 한다.

  창비 1974년 겨울호
외투기업은 언제라도 철수할 수 있다. 그래서 고용이 불안정하다. 노조를 만들기 어렵다. 77년 전체 노조 조직율은 18%인데 외투기업은 10%로 낮았다. 수출자유지역엔 노조가 아예 없다. 노조결성을 추진하다 실패한 마산 수출자유지역의 ‘한국 스와니’가 있다. 가톨릭 노동청년회 보고에 따라면 한국 스와니는 일본 외자 68만6천달러(94.7%)와 한국의 내자 2만9천달러(5.3%)를 투자해 72년 가동했다. 76년 4월 섬유노조 경남지부는 한국스와니 노사협 근로자 대표 김종진 등 13명의 요청으로 5월 6일 근로자 594명 가운데 306명을 모아 마산 노동회관에서 전국섬유노조 경남지부 한국스와니분회(분회장 김종진)를 결성했다.

회사는 자본 철수를 노동청에 위협했고 노동청은 신고필증을 교부하지 않았다. 노조는 노동청에서 단식농성했다. 노동청은 이리 수출자유지역이 완공되는 대로 교부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이리 완공 4년이 지나도록 불이행했다.


공해산업의 진출도 심각하다. 마산 수출자유지역의 한국후지(금속), 마산신관(비철금속), 한국고리(기계기구) 등 14개 업체가 공해업체다. 진해만은 1972~75년까지 10여 차례 독수현상이 생겨 김 양식장을 망쳐 어민들이 진해화학을 상대로 손배청구했지만 졌다.

한일 합작인 포철과 유공 울산정유공장, 한국비료, 영남화학, 한국알루미늄 등 250여 개 공장이 있는 울산이 제일 심각하다. 영남화학의 대기오염으로 근처 과수원을 모두 망쳐 주민이 영남화학, 한국석유, 한국알루미늄 등 10여 개사를 대상으로 1966년부터 10년동안 총 15억원의 피해보상을 청구해 1억을 보상받았다.

울산무기화학은 제비표 페인트계의 건설화학과 일본화학과 합작한 6가크롬을 배출한다. 일본에서 공해 때문에 한국에 왔다. 6가크롬은 코에 구멍이 뚫리는 무서운 공해병을 낳는다. 온산공단의 일본 합작업체 고려아연도 중금속 공해물인 카드늄을 배출해 이따이이따이병을 낳아 일본서 추방된 업체다. (김영일, ‘남해는 병들고 있다’ <신동아>, 77년 7월호, 182-209쪽)

외투기업은 산업간 불균형도 확대한다. 호텔, 코카콜라, 펩시콜라 등 사치성 소비재 산업이나 비생산적 부문에 외국인 기업이 많이 진출해 역효과를 낸다. 국가경제의 해외의존도 강화한다.

5. 한국 정치에 미치는 영향

다국적 기업은 투자대상국의 정치적 안정을 바라는 강력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 경제적 영향력과 본국 정부의 외교 영향력을 이용해 한국의 경제개발계획에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부정한 정치헌금으로 정치적 부패를 조장한 혐의도 있다. 75년 5월 미 상원위원회에 증언한 걸프의 도시회장은 “박 정권에게 66년 1차로 100만 달러를 공화당 내 고위간부의 요구로 지급했고, 공화당은 71년 박정희 재선을 위해 다시 1000만 달러의 정치헌금을 요구해 공화당 재무위원장 김성곤의 집에서 격론 끝에 300만 달러로 깎았다”고 말했다. 걸프는 모두 3억 달러의 한국투자를 지키기 위해 헌금했다고 말했다. 박 정권은 유망한 해저유전 광구의 개발댓가를 걸프에 넘겼다.

한국의 외화 획득 지상주의는 관광산업에도 마찬가지다. 전 외국인 투자의 13%가 호텔투자다. 매춘관광을 조장하고 있다. 민관식 당시 문교부장관이 73년 4월 12일 방일 중 동경의 한국학원을 방문해 연설하면서 “한국 여성은 경제건설을 위해 필요한 외화를 획득하기 위해 몸을 바치고 있으며 특히 한국의 기생, 호스티스가 대거 일본에 진출해 몸을 바치고 밤낮으로 분투하는 애국충정은 훌륭한 것”이라고 최대의 찬사를 보냈다. (‘세계’, 73년 9월호, 주간현대, 73.10.25, 33쪽)


4장 다국적 기업 대응책

1. 민중적 차원
다국적 기업은 최대의 이윤추구를 위해 어떤 일도 서슴지 않는다. 민중적 차원의 대응책은 우선 ‘교육’이다. 민중의 의식화가 필요하다. 두 번째 ‘문화’다. 세 번째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다. 네 번째 ‘반공해단체, 소비자단체 등 사회운동’이다.

2. 국가적 차원
국가적 차원의 규제가 큰 효력을 낸다. 아랍 국가들이 유전에서 주요 석유 다국적 기업들인 메이저들을 쫓아내고 유전을 국유화했다. 입법활동과 경제정책으로 다국적 기업을 규제한다. 그 밖에 국제적 연대도 중요하다.

3. 교회
희생자들의 소리를 직접 듣는 현장대응이 가장 중요하다. 피해자들의 조직과 행동을 존중한다. 여론화에 주력한다. 필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스리랑카의 기독교근로자협회는 캐나다의 ‘에큐메니칼 센터’를 통해 바타 구두회사 본사의 노사협약 정보를 얻어 스리랑카 노동자에게 제공했다. 교회는 연대활동의 매개체다.

미국의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에큐메니칼 센터’는 천주교와 신교 104개 단체로 구성돼 주요 다국적 기업의 주총을 대응한다. 미국계 은행들이 남아프리카에서 인종차별 정책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압박했다. 이들은 불매운동도 전개한다. 스위스 다국적기업 네슬레가 제3세계에서 유아식용품을 무차별 매매해 큰 피해를 일으키자 불매운동으로 대응했다.

다국적 기업들이 70년대 이후 최저임금 지대인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 등의 동남아 각국의 전자, 석유, 식품산업에 활발히 진출하고 있다. 이들은 우리에겐 공장이전을 압박하며 한국 노동자들의 교섭력을 약화시킬 것이다. 다국적 기업의 진출과 폐해가 급속히 늘어날 우려가 있다. 외국계 은행의 업무 확장, 외국자본의 부동산 취득, 우리나라 주식의 취득이 허용되는 날엔 누가 감당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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