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예외도 있다. 서준식 같은 이가 그렇다. 그는 감옥이나, 밖이나 생활이 한결 같았다. 그래서 적당히 변해야 하는 바깥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고단한 불행이 겹쳐 있다. 안타깝다.
요즘 뜨는 은수미 민주당 의원의 감옥사는 어땠을까. 혁명운동을 전면 재조직해야 한다며 경제학을 파고 들었던 은 의원과 그의 동료 백태웅 씨 등이 1995년에 펴낸 <갇힌 자의 열린 사상> 옥중서신 모음을 들여다 보자. 혁명 정당의 역할과 중앙집권적 전위정당의 필요성을 고민했던 17년 전의 모습은 민주당에서 얼마나 관철될까.
혁명가들의 감옥 안과 밖
‘아름답고 우아하게 나이 드는 법’을 고민한다던 이 혁명가는 거울을 보면서 색조화장법을 연구해야겠다고 심각하게 생각한다. 이해찬 이상수 노무현 트리오가 보여준 국회 노동위원회의 놀라운 활동마저도 노동자 정당과는 명백히 다르다고 했던 그이는 민주당 초선의원 뱃지를 달고 오늘도 국회로 출근한다.
대학교수가 된 백태웅의 글에선 수많은 흔들림이 보인다. 그는 장기표, 장명국, 이태복과 연합은 아니더라도 연대는 해야 한다며 그간 좌파가 가진 너무 딱딱한 시각을 교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지금도 많이 들리는 소리이기도 하다. 그 흔들림이 지금의 그를 멀리 미국령 하와이로 밀어 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엮은 ‘우리사상 연구실’은 서문에 이렇게 말했다. “백태웅 동지는 ‘담을 경계로 광장과 밀실이 철저히 분화된다’라고 토로했다. 백 동지는 새로운 사회주의라는 화두를 던졌다. 은수미 동지는 ‘운동의 전면적 재조직’과 ‘이론과 실천의 모든 측면에서 새로운 흐름의 조성’이라는 굵은 문제의식을 던졌다”라고. 먼저 은수미의 ‘굵은 문제의식’을 그의 글 속에서 찾아본 뒤, 백태웅으로 넘어간다. 박홍순과 차익종의 글은 여기서는 생략한다.
세계체제 성격 규정과 제국주의론 2
나는 운동을 전면 재조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경제학 공부를 하고 있다.
조절이론은 심각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조절이론의 문제의식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일리치는 ‘금리수입자 증가’ 등의 사례를 제기하며 제국주의의 기생성과 부패성을 강조하고 운동 내 개량주의로서 ‘노동 귀족’과 그것의 물적 토대를 해명하는 도구로서도 주목했다. 1957~67년 사이 미국으로부터, 우리나라와 같은 대리 전쟁 수행국은 원조 대상 인구의 13%를 차지할 뿐인데 원조금의 37%를 할당받았다.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이자 사멸하는 자본주의라고 규정하는 것은 정당한가? 제국주의가 ‘최고단계’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이 ‘단계인가, 정책인가’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제국주의 세계 체제가 지배.종속과 경쟁.협력이 변증법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신세계 질서로 나아가고 있다”는 선배님의 제기에 주목한다. “남한 자본주의의 신식민지적 위상 탈각”이라는 현상포착에도 긍정한다.
방민호는 <대중문학의 복권과 민족문학의 갱신>(실천문학, 1995. 가을호)에서 “레닌을 중심으로 한 저작들을 따라, 빈약하고 위태롭기 그지없는 길을 따라 80년이 만들어낸 휴머니즘적이고 민중주의적인 젊은이들은 사회주의적 이상을 확득해 갔다. 그들은 알게 모르게 전체주의적 사회주의의 지지자로 성장했다. 현실의 대중들로부터 유리되고 격리돼 있었다”고 말했다. 나는 이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
아름답고 우아하게 나이 드는 법
서른이 넘으면서 저는 부쩍 ‘아름답고 우아하게 나이 드는 법’을 고민한다. 여권이 세계 90위, 남녀평등은 37위, 여성의 정치적 진출은 그 1/6에 불과한 한국에서 독신 여성이 인격과 품위를 갖추고 살아가는 것, 언니나 누나처럼 포근하게 자신을 발전시키는 건 어렵고도 중요하다. 여리고 날카로운 저 자신의 모습이 불안하다.
저 역시 거울을 봅니다. 눈가의 주름 하나하나가 제대로 자리 잡아 조화로운지. 웃음은 보기 좋은지 등을 본다. 색조 화장법을 연구해야겠다고 심각하게 생각한다.
혁명의 현실성과 전위 정당
당의 역할과 중앙집권적 전위정당의 필요성이 도출된다. 저는 기존의 ‘전반적 위기론’에 몇 가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경제결정론적 편향이다. 둘째 계투의 역동성으로 포착하지 못한다. 셋째 자본주의의 적응성과 자본주의의 모순성을 통일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
당을 위로부터 조직하려 하거나 협동조합, 풀뿌리 조직들과 격리된 위계적 정치구조로 만들려고 해서는 안 된다. 레닌은 민주집중제를 ‘토론의 자유와 행동의 통일’이라는 슬로건으로 압축했다. 민주집중제는 결코 정태적인 게 아니고 ‘민주주의와 집중’간의 긴장과 통일의 원리였다. 당의 지도적 역할을 명시한 것은 폐기해야 한다. ‘지도적 역학을 인정하는 다당제’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지도성’은 하나의 결과라는 점에서 무오류의 오류를 범한다.
서평 - <한국사회 노동자 연구>
김동춘의 <한국사회 노동자연구>(역사비평사)는 500쪽이 넘는 방대한 논문이다. 단위 사업장 노조운동과 정치적 노동운동간의 괴리를 다루고 있다. 김동춘은 “한국 노동자의 영향력 증대는 사업장 단위에서는 상당히 증대되나, 정치적 사회적 차원에서는 과거와 다름없이 극히 낮은 수준에 있다”고 설명한다.(97쪽)
이 책은 선거와 노동운동의 괴리도 지적한다. 김진국 후보 총선 참여운동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든다. “노동자의 영향력 있는 전국적 조직과 대안적 정치조직 혹은 정당의 부재가 이중적으로 노동자의 정치적 정체성 현상을 가로막았다”고 말한다.(134쪽)
노동자 대중과 그 정치세력화를 주장하는 세력 간에는 거의 연결이 없다는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 민노총과 여타 노동조직을 고려하지 않는 정당 건설계획은 뜬구름 잡기일 가능성도 있다.
이전에 국회 노동위에서 이해찬 이상수 노무현 트리오가 보여준 활동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노동자의 자기 정당 건설과는 명백히 달랐다. 민주노총 스스로가 제한적이나마 정치 일정에 대응할 계획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
운동의 재조직이 절실하다.
레닌 이후 현재까지의 운동을 제2기라 한다면 이제 제3기를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민정련과 진정추의 통합에 기초한 진보정당 만들기라는 구상은 현실 가능성이 불충분해 보인다. “잘못은 진정추가 했는데 왜 민정련이 나눠져야 하는가”라는 어떤 지부 성원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생생하다.
연내에 합법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진보정당을 만들겠다는 견해는 현실성도 적고 올바르지도 않다는 생각이다.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정당 결성을 모색해야 한다. 출소하면 나는 노해문의 모든 글과 여타 자료들을 꼼꼼하게 다시 읽을 생각이다.
백태웅의 글 : 러시아 사회주의 역사가 주는 교훈
소련의 역사는 어디까지나 러시아 사회주의의 전말을 보여주는 사실(史實)일 뿐이다. 지금 우리의 선결과제는 사상혁신이다. 소련 사회주의는 붕괴했다. 근본적으로 현실 사회주의의 구조적 문제는 심각했다.
오늘날 한국사회를 설명하려면 변하지 않으면 안된다. NIEs(아시아의 네 마리 용) 신흥 국가독점자본주의와 같은 표현을 검토해야 한다. 과거 국가주의적 사회주의 상을 씻어 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 강령의 내용과 그 정식화
보수대연합 지배권력을 민중주체 민주정부로 대체하고, 생산수단 소유의 공공성을 확립하고 시장의 기반위에 사회적 계획을 폭넓게 실시하며, 생산과 소비의 주체가 경제경영관리에 자주적으로 참여하는 사회 정도다. 경제발전의 효율성을 드높여 선진국 진입을 이룩하고, 자유와 민주, 평등과 평화가 넘치는 통일된 한반도 구현 정도다. 대안 체제의 상도 구사회주의와는 매우 다르다.
세력 구분의 도식화를 경계해야 한다. 제도권 진입을 예비한 김근태, 독자정당과 여권 투신을 갈등하는 장기표, 내일신문의 장명국, 노신의 이태복... 그간 좌파가 가진 연합과 연대 시각은 너무 딱딱하다. 항구적 연합체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연대의 대상이 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는 편향은 없애야 한다. 새 진보정당은 민자당, 민주당과 함께 3정립할 수 있는 정당이어야 한다.
사노맹 구속자나 관련 인사들은 창당을 지지 참여하고 당의 출범에 즈음해 맹 해소 선언과 새 당을 통한 계속투쟁을 공개 선언해야 한다. 패배선언이 아닌 명예로운 해소선언이어야 한다. 유일한 선택은 창준위 출범과 더불어 회사 관련자 대회를 열고 지난 활동을 총괄 정리하고 당을 통한 사회주의 정치활동을 결의하면서 해소선언을 공식화하자.
이번 지방선거(1995년) 결과는 여러모로 고무적이다. 민심을 도외시하던 청와대와 민자당에 냉엄한 국민의 심판을 내렸다. 우리 동지들을 비로 진보 후보가 폭넓게 선거의 관문을 넘었다.
진보운동은 언제쯤 자신의 텔레비전 채널을 갖게 될까. 정규 공중파가 아니면 케이블 TV라도, 언젠가 반드시 진보적 색채의 채널이 생길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