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봉기'의 의미란 무엇인가

[새책] ‘선언’ (안또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조정환 역, 갈무리, 2012.9)

2008년, 거세던 촛불이 꺼진 뒤, 한동안 떠나지 않았던 의문은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는, 일시적인 것으로만 여겨지는 봉기가 가지는 의미는 무얼까 하는 물음이었다. 한 친구는 내게 바뀐 게 하나도 없다고 불평했다. 이제는 집회에 나갈 마음도 들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그리고 한 쪽에서는 촛불의 힘이 이제 국회로 모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정당의 기능 회복이 중요하다는 말과 함께. 궁금했다. 촛불은 무엇을 바꾸었는지, 촛불이 원했던 것이 그냥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는지, 무엇보다 촛불은 무엇이었는지.

네그리와 하트가 함께 쓴 ‘선언(Declaration)’은 어쩌면 이 물음에 대한 답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이 책은 2011년 아랍의 봄에서부터 유럽을 지나 월가에 이르기까지 연쇄적으로 진행된 항쟁의 성격을 분석하면서, 봉기가 제헌(구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안을 제안하고 있다. 봉기가 제헌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다중이 그들의 질서를 스스로 구축해 나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 길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저자들은 그들이 제안하는 길이 이론적 작업의 결과물이 아니라고 말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봉기들이 이미 “제헌(구성) 과정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일련의 입헌적 원리들을 제공”한다는 데 있다. 즉 이 운동들이 이미 해답을 갖고 있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2011년은 다중의 실험이 전지구적으로 연속해서 일어난 해라고 보아도 좋겠다.

그렇다면 이 실험/봉기들은 왜 일어나게 되었나? 네그리와 하트는 이 운동을 발생시킨, 현재의 사회정치적 위기가 낳은 주체성의 형식을 네 가지로 분류한다. 빚진 사람들(the indebted), 미디어된 사람들(the mediatized), 보안된 사람들(the securitized), 대의된 사람들(the represented)이 그들이다. 빚진 사람들은 변화된 자본주의적 노동관계에서 나타나는 예속의 양상이다. 학자금 대출부터 주택담보대출까지, 현대 사회에서 빚을 지지 않고 살아가기란 불가능하다.

“빚을 진다는 것은 오늘날 사회적 삶의 일반적 조건이 되어가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무게 중심이 공장 담벼락 밖을 떠다니게 되면서, 자본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착취한다. 이제 자본가는 공장에서 감독하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금융 수단을 통해 생산관계와 착취를 통제한다. 그 무기가 바로 채무다. “오늘날 착취는 주로 교환이 아니라 빚에 기초하고 있다.” 이제 “빚진 사람들은 생존하기 위하여 삶의 모든 시간을 팔아야만 한다.”

미디어된 사람들은 미디어와 소통 기술이 오늘날 삶·정치적 생산에서 필수적인 것으로 등장하면서 나타나는 파편화된 의식을 가리킨다. 미디어된 사람들의 의식이 “웹으로 흡수되거나 병합”되면서 신체에서 분리된 삶이 웹을 떠다닌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소통은 물리적·신체적 함께-있음에서 일어난다. 계급은 ... 정보나 심지어 사상의 유통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리적 인접성을 요구하는 정치적 정동들의 구성을 통해서 형성된다.” 이런 의미에서 2011년의 점거는 “정치적 정동을 생성하는 퍼포먼스다.” 보안된 사람들은 총체적 감시가 일반화된 사회에서 보안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주체가 된 사람들이다. 이들이 살고 있는 예외 상태는 “오직 우리의 자발적 예속 때문에 존재하는 상황이다.”

마지막으로 대의된 사람들은 권력으로부터 명령받는 자로 분리된 자들이다. 대의는 그것이 효과적일 때조차 민주주의를 가로막는다. 대의된 사람들의 형상은, 대의체제에서는 부와 금융의 힘 때문에 부자이거나 필연적으로 부패할 자들만 대표로 선출될 수 있다는 점에서, 지배적 미디어가 민주적 참여를 가로막는 수단을 창출한다는 점에서, 대의 과정을 통한 정치가 끝없는 두려움을 사람들에게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앞의 세 형상과 연결된다. 때문에 저자들이 대의가 아닌, 누군가 대리해주는 삶이 아닌, 다중 스스로 공통적인 것을 구축하고 확대하며, 관리하는 제헌의 길에 집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론으로 보인다. 대의된 사람들의 형상이 채무와 미디어와 보안에 예속된 사람들의 형상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삶, 경제, 정치의 문제에 동시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이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예속된 자들이 반복해서 저항의 움직임을 지속해왔다는 사실이다.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그것은 빚, 미디어의 환영, 보안체제, 대의제를 거부하면서 시작했다. 저자들이 파고드는 이 투쟁들은 저마다 고유한 지역적 조건에 기반하고 있지만, “사실상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이집트 사람들은 튀니지의 구호를 채택했고, 푸에르타 델 솔 광장의 인디그나도스(분노한 사람들, indignados)는 타흐리르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의 경험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월스트리트 점거자들은 ... 독재자에 대항하는 그 투쟁을 금융 독재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번역했다.” 그들은 어떤 곳에서는 억압적 체제에 반대했고, 또 다른 곳에서는 대의적 입헌체제를 문제 삼았으며, 또 어떤 곳에서는 국가부채와 긴축조치와 대결했지만, 일련의 특징을 공유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억압적으로 주어진 것들을 거부하면서, 새로운 주체로 거듭난다는 점이다.

이것은 2011년의 투쟁들이 전지구적으로 공유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점거라는 전략을 통해 함께-있음을, 지도자가 없는, 아니 모두가 지도자인 수평적 조직화의 실천을 통해 실질 민주주의의 원리를, 그리고 공통적인 것을 위한 투쟁을 통해 사적 소유와 공적 소유를 동시에 넘어서는 원리를 실천하고 실험했다. 이를 통해 반란과 봉기는 거부만이 아니라 창조적 과정도 작동시킨다. 이 “운동들은 민주적 관계를 욕망하며 그러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새로운 주체성을 창출하고 있다. 운동들은, 새로운 사회를 어떻게 창조할 것인가, 그리고 그 사회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매뉴얼을 쓰고 있다.” 이 새로운 주체성은 공통인(the commoner)으로 정의된다. 공통인은 공통적인 것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공통인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공통의 부를 구성하며, 특이성들이 상호작용하는 수평적 정치 조직화를 지향한다. 함께-있음을 넘어 함께-하기를 통해서, 공통인은 “공통한다(commons)”. 이 공통인이야말로 저자들이 2011년의 투쟁에서 그 단초를 발견하는 새로운 주체성이다. 그 투쟁들이 주로 헌법폐지적(탈구성적) 과정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새로운 사회를 위해서는 제헌(구성)에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저자들은 그것을 실현할 주체성, 즉 공통인을 다시 그 투쟁들에서 발견한다.

하지만 해답은 없다. 그것은 누군가 제시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 선언은 매니페스토가 아니다. 저자들이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란 뜻이다. 이 책에서 제안하는 것은 저자들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일반적 원리들에 조금 기여할 뿐이다. 대신 저자들은 현재의 신자유주의 사회가 강요하는 삶에 분노하는 사람들, 대의체제에 대항하는 사람들, 대안적인 삶의 형태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현재의 삶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을 제기하고 또 자신들의 욕망을 추구함으로써 “우리가 아직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새로운 해결책을 발명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네그리와 하트가 이 책에서 2008년의 촛불을 직접 언급하진 않지만, 이제 그때 품었던 질문은 조금 답을 찾아가는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난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논리적으로 정리할 수는 없었지만. 아마 촛불을 들고 광장에서 밤을 나던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도 모두 빚지고 대의된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래서 우리도 모두 ‘분노한 사람들’이었으니까. 2011년은 조금 더 일찍 시작되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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