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상>은 <한겨레21>에 연재됐던 ‘김성윤의 18세상’을 바탕으로 쓴 청소년 문화에 대한 글이다. 저자의 소개에 의하면 청소년문화의 일반적 조건을 다뤘다는 1부 일상기록, 또래내부에서도 이상하게 여겨지는 문화현상에 대해 다룬 2부 일탈기록, 청소년문화 담론을 다룬 3부 기록의 기록으로 구성됐다. 1부 일상기록은 문화연구자로서의 미시적 분석이 돋보인 그의 글을 끌어당기기에는 소재가 사회에 많이 회자된 것이라 약하다. 항상적인 예외상태 (항상적인 권리의 박탈상태)를 겪는 청소년들이기 때문인지 이 책의 맛을 볼 수 있는 것은 2부와 3부이다. 특히 결론 격이라 할 수 있는 ‘나오며’의 청소년 정치의 세 가지 쟁점은 탁월하다. 청소년 정치는 주체인 청소년들만의 문제가 아닌 까닭을 읽을 수 있다.
1부에서 왜 청소년들이 노스페이스에 열광하는지, 왜 알바를 하는지, 은어사용의 진실은 무엇인지 등을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노스페이스로 대표된 청소년 위계와 소비문화로 한정되어 있는 그동안의 분석을 넘어, 저자는 청소년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패딩옷의 편리함만이 아니라 패딩 옷으로 표출할 수 있는 성별화된 외모 표준에 달성하려는 그/녀들의 욕망을 읽는다. 말라 보이는 게 싫은 남학생에게는 패딩 옷은 ‘가상적 알통’으로 기능할 수 있으며, 각선미를 돋보이고 싶은 여학생에게는 상체를 두톰하게 만들어 ‘다리를 예뻐 보이게’ 할 수 있는 마법과 같다. 이러한 갈망을 사회가 강요하는 남성성과 여성성으로만 볼 수 없으며 ‘이상적인 성인 이미지를 창출’하여 학생으로서의 자기 자신이 아닌, 학교 바깥으로 탈출하려는 능동적인 존재감으로 볼 수 있다. 노스 패딩은 “10대라는 시간과 학교라는 공간을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지만 다른 사회문화적 자원으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강남청소년들에는 나타나지 않는 계급적 현상이기도 하다.
또한 청소년 알바문제를 일탈로 바라보는, 청소년이 공부나 하지 왜 돈이 필요하냐는 시각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기획하려는 시작으로서 노동을 하는 청소년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청소년노동자’라는 형상에는 청소년이라는 열악한 세대적 위치와 비정규노동자라는 불안정한 계급적 위치가 이중으로 겹쳐 있어 착취당하고 있는 현실은 청소년과 노동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해소되어야만 청소년 노동력에 대한 착취도 해소될 수 있다는 그의 지적은 옳다.
그럼에도 청소년 알바가 노동학습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정신을 일찌감치 학습하는 게 아니냐는 그의 질문은 ‘청소년’ 주체에 대한 그의 입장이 희미한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 또한 여전히 청소년을 노동의 주체가 되기에는 미달하는 존재로 보는 게 아닌가. 물론 저자는 책 곳곳에서 일관되게 청소년을 미성숙한 존재로 보는 시각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어른이라고 불리는 비청소년들이 노동과정에서 자본주의정신을 익히는 동시에 자본주의의 불합리함과 착취를 겪으며 이 더러운 세상을 바꿔야겠다는 저항정신을 만들어가듯이, 청소년들도 노동을 하면서 그러할 수 있다는 점을 저자는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 보호담론이 사실상 청소년을 주체로 보지 않음으로써 그/녀들의 권리를 제한하고 있다고 저자도 주장하지만 노동은 ‘왜’, ‘아직’ 예외로 상정하고 있는 건 아닌지 묻게 된다. 아니,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인권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음에도 여전히 ‘노동’과 ‘성’에 있어서는 그 한계를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 이 책에서도 드러난 건 아닐까.
2009년 ‘유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에 관한 규약’(이하 사회권 규약) 심의를 앞두고 한국을 방문한 사회권위원들과 인권활동가들 간의 간담회에서도 이러한 인식의 차이가 드러난 적이 있다. 청소년인권활동가들이 한국에서는 청소년들을 노동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알바를 하려면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할 정도로 사회적 편견이 있고, 친권자(보호자)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 제도적 제한이 있다고 말했을 때 사회권 위원들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1976년에 발효된 사회권규약에서 아동노동의 보호와 금지만 있기 때문이다. (유엔 아동권리협약에서 18세 미만을 아동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조항이 아동노동에 대한 착취를 금지하려는 점에서는 분명 의의가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청소년 노동금지가 여전히 청소년을 경제적 약자로 만들어서 가족이나 친권자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와 현실을 빗겨간다는 점을 비청소년들은 외면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성이 생긴다. 청소년인권운동의 주체들이 엮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인권을 넘보다>(공현 외 12인, 메이데이, 2009)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결의 내용을 볼 수 있다.
일탈에서 읽는 청소년이 처한 현실
청소년에게 사회적, 경제적 제한을 두는 현실에서 10대들은 사회에 맞서 일탈을 꿈꾸고 일탈을 한다. 그런 점에서 일탈의 기록을 담은 2부에서 우리는 청소년이 처한 현실과 문화를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10대들이 위조민증이나 전자담배, 화장 등 기존규칙을 위반하는 행위를 권위에 대한 도전이자 청소년들에게 기대되는 사회규범에 ‘상징적으로 저항’하는 것으로 읽는다. 그 저항이 의도적인 치밀함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그냥’ 하는 행동이라 할지라도 그 행위는 ‘기성 세대의 권위에 균열을 내고 조롱하는 의미’를 담는다. 또한 10대들의 화장은 어른-되기의 욕망이라는 모방심리를 넘어서 욕설과 체벌이 넘치는 학교와 가정에 맞선 ‘무장’이기도 하다. 청소녀들은 화장이라는 20대의 가면으로 문화적, 심리적 성인이 될 수 있도록 무장을 한다.
특히 청소년이 사회화를 거부하는 대표적인 행동인 가출을 들여다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가출을 부정적적이고 불합리한 행동으로만 치부하는 현실에서 저자는 가출한 청소녀/년들이 살아가기 위한 생존의 법칙이기도 한 가출팸에 주목한다. 집이 지옥과 다를 바 없고 학교가 복종의 훈련소라면 가출은 합리적 선택일 수도 있다며 가출의 의미부터 가출팸 구성의 동기를 분석한다. 가출은 ‘부적응->가출->범죄’의 과정으로 상상되고 인식되는 현실에서 “가족으로부터 이탈하자마 또다른 가족을 꾸려나간다”는 가출팸은 자기들만의 사회를 구축하는 생존전략이다. 가출팸에서 그/녀들은 경제적 생존만이 아니라 유대를 통한 정서적 생존을 꾀한다. 그렇다고 저자는 가출팸을 이상화하지 않는다. 가출팸도 가족이기에 돈벌이가 시원찮은 구성원들에게 성매매를 강요하거나 폭행을 하는 복잡한 현실이 존재한다며 이를 벗어나려면 정상가족 신화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겠냐고 제안한다.
청소년문화에서 “어떤 권력관게를 뚫고 나가는 듯 하면서도 다른 권력관계로 예속되는” 지점에 대한 분석은 더 있다. 야오이로 대표되는 동인녀문화(아이돌,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등의 문화상품을 동성애코드로 재배치하여 팬들이 2차 저작물로 재창작하거나 향유하는 문화)가 그렇다. 동인녀 문화코드가 이성애주의를 전복시키는 쾌락이 있기는 하지만 남녀 성역할에 기반해 지배적인 성역할을 재생산하는 아이러니에 대해 저자는 말한다.
청소년담론이 의도하는 청소년관리
3부 청소년담론-질풍노도의 시기라는 장에서 저자는 청소년학이 실체가 모호한 청소년들을 구체화하려는 끝없이 시도하지만 모호하다고 말한다. 청소년은 가상적 존재일 뿐 그 학문에 과학적 대상이 없다는 것을 시인할 뿐이라며 비판한다. 다시 말해 “청소년 담론은 애초부터 이론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이었을 뿐이며, “인구의 특정부분을 관리하기 위해 고안된 사회공학”인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푸코의 규율권력, 생체권력 분석과 괘를 같이한다.
앎과 권력의 문제를 다룬 푸코의 <비정상인들>에서 19세기 비정상인들로 취급된 사람들 중 하나인 자위행위자와 그 시작인 아동의 자위행위 캠페인을 분석한다. 푸코는 의학권력이 아동의 자위행위를 어떻게 비정상화시켰고, 어떤 규율권력과 생체권력이 작동했는지를 보여준다. 당시 유럽은 의학권력의 분석을 바탕으로 누군가 심각하게 아프다면 그것은 그/녀가 어렸을 때 자위행위를 했기 때문이라며, 자위행위는 눈병, 흑내장, 심장질환의 원인이기도 하며 수다스럽게 아동의 자위행위 금지 캠페인을 한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당시 유럽은 아동의 자위행위를 통해 성과 신체를 규율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도 많은 학생들에게 진단되는 병인 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ADHD)의 탄생 배경에는 의학권력이 자리한다. 아무튼 이러한 자위행위 담론을 통해 근대가정 (대가족을 벗어난 부모자식관계가 기본적인 문제대상이므로)을 새롭게 구성하고, 가정을 금욕적인 공간이자 아동이 자위를 하는지 감시하는 감시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이 캠페인으로 아동이라는 인구의 특정 부분을 관리하며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권력을 획득했다는 점에서 청소년 담론과 닮아 있다.
그런 점에서 결론에서 김성윤의 문제제기는 중요하다. “청소년+보호의 모순인 청소년”에서 청소년이 얼마나 정치의 장소인지 저자는 말한다. 청소년이 존재하는지를 물을 수밖에 없는 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모호한 청소년이란 개념에도 불구하고, 청소년담론에 의해 ‘청소년’이라는 기표가 던지는 현실적 효과는 청소년을 말할 수 없는 주체로 만드는 일이다. 말할 수 없는 대상에서 말하는 주체로의 전환! 여기가 청소년 정치가 필요한 지점이다. 더구나 청소년 문제를 매개로 정치는 사회 전체의 문제를 청소년 문제로 은근슬쩍 갈아치우거나, 전체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착각하게 만들기에 청소년 정치의 문제는 중요하다. 성매매 문제처럼 이를 청소년만의 문제로 사회문제를 세탁하고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권력의 문제를 개인의 방종”으로 축소하면서 ‘정치를 소실’시킨다.
그러나 저자의 말처럼 2008년 촛불에서 경험했듯이 좌우를 막론하고 10대들을 만나면 만나자마자 반말을 날리는 현실에서, 열렸다고 믿었던 열린 정치 기회구조는 반(反) 기회구조가 될 수 있기에 청소년의 정치적 주체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청소년 정치의 불가능한 모순과 아이러니가 시작점이라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18세상>은 청소년문화 분석을 통해 청소년을 권리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자본주의 ‘체계가 돌아가는 동학을’ 알게 해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끝으로 이 책의 제목 <18세상>은 아쉽다. 오늘날 청소년문화가 “역설로 가득한 세상에 대한 욕설”이라는 저자의 의도와 다르게 매우 선정적이고 청소년을 대상화하는 듯 읽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