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국열차 스틸컷 [출처: http://snowpiercer2013.interest.me/] |
무생물의 시선으로 열차를 바라보는 ‘설국열차’
영화 ‘설국열차’는 영화를 보지 않고 말만 들어도 어떤 영화인지 짐작이 가는 영화이다. 온통 눈 나라로 변한 지구에 은하철도가 아닌 설국열차가 시작도 끝도 없이 도는 영화라니 말만 들어도 그것이 어떤 그림인지 그냥 떠오른다. 내가 그렇게 관찰자로 설국열차를 상상했듯이 설국열차의 운행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영화내의 어딘가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그것이 없었기 보다는, 기후 이상으로 재난을 당한 지구였음으로 모든 것들은 이미 폐허가 되고 멸종되어 그 열차의 질주를 지켜보는 시선은 당연히 눈에 뒤덮인 도시의 건물들뿐이다. 어딘가에 혹시라도 생존해 있을 생명체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무생물인 쓰레기더미들의 시선으로 이 영화의 관찰자가 되어 영화의 진행과정을 들여다보게 된다.
무생물의 시선으로 인간만이 생존해있는 열차를 들여다보는 일은 아주 명쾌한 해답을 준다. 즉 사람은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고 부자는 권력을 휘둘러 가난한 사람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걸 사람이 사는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그 질서를 강요한다. 그것이 영원히 유지되길 바라기에 교육이나 쾌락도 열차 칸에 맞게 허용하고 감시한다. 그런 열차의 시스템이 꼬리 칸과 앞 칸으로 크게 나뉘며 보호와 감시의 문에 숨겨진 안전장치는 앞 칸에서 살아가는 부유하고 화려한 사람들의 무한한 자유를 보장해준다. 즉 설국열차는 인간의 계급사회를 압축해놓은 은유장치다. 기차나 열차는 앞으로 나가는 전진의 힘이나 새벽을 뜻하는 은유로 많이 쓰이는 걸로 아는 사람은 닭장 같은 빽빽한 밀도의 공간에 인간의 머리가 가득한 공간이 열리는 걸 보고 아마 가슴이 쥐어짜지는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이 초입의 영화장면은 열차가 어떻게 해방을 맞이해야 하는지 암시하는 것 같았다. 저건 폭파밖에 없겠구나 싶을 정도로 인간의 모습이 사육된 동물의 비참한 모습으로 살아가니 말이다. 그래서 꼬리 칸의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투쟁을 시작하게 되는 이야기의 결말은 역시 열차를 멈추는 일이었다. 인간의 삶에 관한 자본주의에 관한 경종의 영화로도 볼 수 있는 이 영화를 관람하는 관점은 관람객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생물의 시선에 기대어 두 시간 가량의 사유를 진행시킨 이 영화는 오락 기능까지 더 해주어 바쁘고 절박한 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도 잠시의 숨통을 열어줄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는 어디까지나 영화니까 영화관에서 가을바람 스치는 아스팔트에 나서는 순간에 무거움과 그 무엇에 대한 아릿함은 다시 시작된다.
국정원 발 마녀사냥 유신열차
촛불시위를 잠재우고 국정원 불법정국을 털기 위해 시작된 마녀사냥열차는 설국열차 못지않게 전국 곳곳을 휩쓸며 빨갱이 이슈를 부각시켰다. 아주 오래전에, 간첩사건이 발표되면 나오는 TV영상속의 날카롭고 뾰족하며 무시무시했던 살상무기들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사람들의 망막에 비친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의 모든 것은 바로 그 간첩의 무기들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진실을 알 필요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미 언론과 정치권은 유죄 판결을 내렸고 이석기와 통합진보당은 국민에게 사망선고를 받은 셈이 되었다. 법원이 무죄로 사건을 종결한다고 해도 이미 그때는 유효기간이 지난 음식이니 사람들이 먹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사건은 시작의 요란함과 달리 참이든 거짓이든 잊혀 지게 하는 지배권력의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으니.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
새로운 간첩사건이 나오면 끓는 찌개이니 먹으려 들것이고, 사건의 진실이 규명되어 해프닝으로 마감되어도 그때는 이미 잊어버린, 이것의 반복이다. 이것은 왜 반복이 되는 것일까. 인간의 생존본능이 시키는 일일까? 권력에게 복종해야 살아남는다고 인간의 유전자는 역사를 통해 가르쳐 온 것일까. 최근에 고향친구를 만났는데 멀쩡하게 생긴 친구가 정나미가 뚝 떨어지는 이야기를 해 댄다. ‘설국열차나 천안함 프로젝트 같은 좌파 영화는 북한이 자금을 대서 만들어 퍼트린다’는 것이었다. 이 상상초월의 생각들을 어떻게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종편이나 지상파언론과 지배 권력이 무차별적으로 쏟아내는 스펙타클 국정원 영화를 보고 난후의 두뇌작용이며, 이는 찬란한 유신시대의 창조물인 지역감정과 이분법적 이데올로기로 갈라 친 통제작용이 이 지금 이 순간에도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일까. 이 의문점에 설국열차와 국정원 유신열차와의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설국열차엔 꼬리 칸이 있었고 꼬리 칸엔 사회의 루저가 된 민중들이 타고 있었다. 꼬리 칸에나마 탑승한 사람들은 시선으로 설국열차를 관찰하는 게 아니라 직접 행동의 당사자들이 되어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려 반란의 행동을 하게 된다. 살아도 사는 삶이 아니면 저항해야 하는 건 인간의 당연한 모습이다. 그러나 국정원 설국열차엔 꼬리 칸 자체가 없었다. 인민 다수가 열차에 탑승하지 못한 채, 화려하게 부활한 ‘21세기 유신열차’의 관찰자로 내몰렸다.
그 화려한 유신열차에 탄 사람들은 여왕의 심복이거나 여야를 넘나드는 정치꾼들뿐이다. 유신열차에 나라의 모든 목숨이 담보되는 엔진이 탑재되어 있어 이 열차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두부류 소망으로 나누어갈라진다. 유신열차가 내리는 명령에 복종해서 거기에 꼬리 칸이나마 자리 잡길 바라게 되는 사람들은 ‘진보=종북, 그러므로 빨갱이 척결’ 노래를 부르도록 자동조절 된다. 거짓과 회유와 모순을 발견하면서도 힘 앞에선 모든 게 정의인 듯 미리 손을 내리고 두뇌를 패쇠시켜 망상에 가까운 안보의식에 갇힌다. 나머지 사람들은 끝까지 촛불을, 단식이란 처절한 무기를 들고 저항하여 유신열차를 멈추고 싶지만 쪽수에 밀려 차벽에 가두어진 채로 관리되어 저항을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헌법안의 진보’는 보수의 단골메뉴
이 지점에서 촛불을 드는 관찰자들은 말로만 진보가 아닌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염두에 둔 정치의식의 전망으로 투쟁하기에 좌절과 역겨움 그리고 절망이 짓눌러도 반공, 종북이라는 에너지로 움직이는 유신열차엔 절대 타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21세기 유신열차는 미래를 향한 질주가 아니라 전체주의 부활을 꿈꾸며 신자유주의적 파시즘을 안고 달리는 과거로 회귀하는 열차이기 때문에 폭파의 대상일 뿐이다. 반역의 짐을 싣고 역행하는 유신열차를 정지시키기 위해, 지배계급의 행복만을 위해 질주하는 열차를 부수어 정지시키기 위해 처절하지만 결연한 의지로 투쟁하는 사람들은 해방된 세상을 향한 발걸음이 무겁고 힘들어도 연대의 손길에서 우러나는 그들의 미소에서 우리의 미래를 발견한다.
현실의 어처구니없는 상황과 맞서 싸우는 투쟁의 감각과 상상만으로 그들의 한때가 빠른 시일 내에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많은 노동자 민중들이 싸우고 싸우다 곡기를 끊어야만 하는 처절한 투쟁에 노출된 슬픈 현실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정말 슬픔을 느끼게 하는 족속들이 있다. 괴물열차를 몰고 와 유신열차의 끝 칸에 연결하려고 몸부림치며 지배열차에 오르려하는 진보의 탈을 쓴, 노예의 근성을 지닌 자들. 숱한 세월을 살아오며 역사의 발전법칙과 변증법을 외치던 그들이 마녀사냥 앞에서 ‘헌법안의 진보’를 주장하는 행위가 지배열차를 굴리는 엔진에 강한 동력을 보탠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 알지만 공포 때문인가. 분명한 것은 진보의 경계를 넘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행복을 가로막는 법과 제도는 없어져야 하며 그럼에도 현존하는 헌법을 사수한다는 논리는 보수의 단골메뉴일 뿐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외침이 그들의 귓전을 울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자신들의 과거행적에 최소한의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진보는 포기했다고 하더라도 무생물이 열차의 시선이 되는 시간이 오기 전에 인간의 시선을 되찾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