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 멀리서부터 빗질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연속기고] 안녕, 중앙대 청소노동자 파업(3)

[편집자주] '안녕, 중앙대 청소노동자 파업'은 중앙대 청소노동자 파업이 한 달이 다 되어가지만 꼼짝하지 않는 학교 측의 모습을 보며, 사람들이 왜 파업을 지지하는지 여러 사람들의 입을 통해, 중앙대 청소노동자 파업과 인연들을 소개하면서 청소노동자 파업의 의미를 알리기 위한 연속 기고글이다.

한 달 전, 중앙대학교 캠퍼스 곳곳에는 ‘따뜻한 대자보’들이 붙었다. 청소노동자분들이 시험기간 중 파업을 하게 되어 학생들에게 그 미안함을 전하고 당신들의 사정을 설명하기 위해 직접 쓴 손자보들이었다. 당시, 전국에서 ‘안녕들하십니까’ 열풍이 한창 불고 있었다. 각자의 ‘안녕 못함’을 풀어내던 학생들의 자보가 건물의 벽면을 가득 채워나갈 때, 청소노동자분들은 그렇게 자보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멀리하기엔 너무나 가까웠던 그들의 이야기, 그러나 너무 쉽게 묻히곤 했던 그분들의 이야기는 아마 그때서야 우리의 ‘일상’ 속에서 중요한 화두가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한 ‘우리’는 나와 내 동료 친구들이다. 혹은 중앙대 수많은 의혈 학우들이다.)

그리고 일주일 전, ‘따뜻한 대자보’를 비롯한 학생들의 안녕치 못한 대자보들은 모두 철거당했다. ‘정치적이거나 개인적 의견을 담은 글은 게시할 수 없다’는 학생지원처의 입장에 따라 신고도 허가도 되지 못했던 자보들은 그렇게 툭 툭 떼어져나갔다. 학교가 들었던 이유는 사실 예상 가능했다. ‘대외이미지 실추’ ‘명예훼손’ 등등.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유가 있었다. ‘구성원들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지금의 자보들은 소통하려는 ‘구성원’들의 노력을 ‘저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앙대학교 ‘구성원.’ 아마 그 ‘구성원’에는 꽤 소소한 배제들이 있었나보다. 소통해보려 펜을 잡았던 수십여 명의 실명을 밝힌 학우들, 파업 청소노동자들은 우선 제외되었을 것이다. 중앙대의 ‘구성원’임에도 ‘구성원’이라 불리지 못하는 우리의 사연을 듣는다면, 홍길동도 기꺼이 가슴 아파 해주지 않을까.

불행인건지 다행인건지 그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이제부터 청소노동자분들을 ‘돕는’ 입장이 아니라 그저 ‘함께’ 하는 것이 되겠구나. 이제 정말 ‘당신과 나의 투쟁’이 되겠구나. 대학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나에 대한 의문을 함께 품으며.

[출처: 공공운수노조]

‘학교는 교육기관이므로 영리기관의 운영방식과는 다르다’는 말씀

“학교는 교육기관이므로 영리기관인 일반적인 법인과는 운영방식 등에 있어 큰 차이가 있습니다. (......) 그런 면에서 청소노동자를 직접고용할 경우 관리 및 비용 면에서 코스트가 증가할 수 있고, 단체교섭이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으면 파업 등 분쟁이 커질 소지가 있습니다.”

1월 8일, 중앙대 온라인 커뮤니티 중앙인에 올라온 ‘간접고용에 대한 총장님 메시지’라는 제목의 글이다. 짧은 글을 읽어 내려가던 중 나는 두 번 놀랐는데, 한 번은 총장님께서 ‘학교는 교육기관이므로 영리기관인 일반적인 법인과는 운영방식 등에 있어 큰 차이가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고, 또 한 번은 ‘청소노동자를 직접고용할 경우 관리 및 비용에서 코스트가 발생, 분쟁 커질 소지가 있다’며 곧바로 간접고용의 ‘당위’를 설명했기 때문이다.

기뻐해야 하는 일인지 슬퍼해야 하는 일인지 사실 잘 모르겠지만 우선 기쁜 일이라 여겼다. ‘대학의 기업화’라는 말이 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있는 지금 시기에, 대학이라는 공간을 ‘영리기관인 일반적인 법인과는 다른’ 곳이라고 총장님께서 ‘신선한’ 말씀을 해주셨기 때문이다. 나는 잃었던 과거의 보물을 되찾기라도 한 듯 가슴이 벅차올랐다. 여기까지의 ‘총장님의 메시지’는 ‘운영 면에서는 대학도 기업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신다던 (중앙일보 중앙시평 ‘대학발전과 참된 주인의식’ 참조) 박용성 이사장님과는 ‘다른’ 노선을 가시겠다는 단호한 선언으로 읽혔다. 학교의 구성원 중 한 명인 나는 그 지점에서 진한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아, 총장님 잊지 않으셨군요! ‘여전히 ‘대학’이라는 공간, ‘학교’라는 공간의 독자적 의미를 잊지 않고 되새기고 계셨군요!

그러나 그 뒤에 나오는 글들을 계속해서 읽어 내려가던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었다. ‘청소노동자를 직접 고용할 경우 관리 및 비용 면에서 코스트가 증가한다’며 ‘각종 노조협약 과정에서 분쟁이 커질 소지들이 있기’ 때문에 청소노동자들을 간접고용이 마치 최선의 고용형태라는 식의 총장님의 말씀은 그 앞과 뒤가 너무 다른 이야기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지금까지 수많은 영리적 기업들이 하청 직원들을 대하는 논리와 다를 바 없는 듯했다. 분명 ‘영리기관’들의 운영방식과 ‘학교’의 그것은 다르다고 하셨다. 하지만 사실상 학교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본부가 ‘노동자’ ‘구성원’을 대하는 방식은, 처음 말과는 반대로 ‘영리기관들과 결코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사회적 질타를 받았던 대표적 ‘영리기관’들이 몇몇 있는데, 그들이 자기 방어를 할 때 늘 내세우는 논리가 있다. 예를 들어,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요구를 무시하더라도 ‘효율’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말한다든지, ‘원청’ 혹은 ‘실사용자’임이 드러나더라도 ‘우리는 제 3자’라며 책임을 회피한다든지 등등.

결국 총장님도, 이사장님도, 몇몇 학교 교직원분들도, 지금의 대학 운영방식은 ‘영리기관’의 그것과 같아야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어마어마한 논리는, 지금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그다지 큰 거리낌 없이 통용되고 있는 것 같다. 총장님이 말씀하였듯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곳과 그 성격이 다르다는 ‘학교’에서 말이다.

노동자는 제품이다? 학생은 소비자다?

“기업이나 대학이나 어느 조직을 운영할까에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는 것입니다. (......) 따라서 학교가 사용하는 각종 물품, 서비스는 가장 싼 비용에 가장 질 좋은 제품을 구입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11월 초 커뮤니티 중앙인에 올라온 ‘홍보실장입니다’라는 제목의 글이다. 홍보실장은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청소노조를 지지하는 학생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학생들이 청소노동자들의 임금 개선을 위해 이런 저러한 안을 내기보다는 ‘명절에 모금을 하여 조그마한 선물이라도 사주시는 것’ 이 ‘학생의 도리에 맞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임금제와 열악한 근무환경 조성에 큰 기여를 한 학교 측에서 해선 안 될 말이라 생각되었다.

‘가장 싼 비용에 질 좋은 제품.’ 노동자는 결코 ‘제품’이 아님에도 청소노동자를 버젓이 ‘제품’에 비유한 글에서는 학교 본부 측의 인식을 읽을 수 있었다. ‘노동자’ 아닌 ‘제품’은 말할 수 없고 결사할 수도 없다. 그저 하나의 비용일 뿐이다. 그러한 논리 구조 아래, 청소노동자들의 요구는 애당초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이십년 가까이 중앙대를 일터로 삼아오신 분들이다. 하지만 결국 학교 본부로부터 단 한 번도 온전한 ‘구성원’으로서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것이다.

학생은 소비자다?

한편으론 그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러한 학교의 논리에 학생들 또한 그동안 일정부분 동조했을지도 모른다는 것 말이다. ‘최소 비용 최대 효과’라는 원칙을 내세우는 학교는 ‘등록금의 효율’을 강조하며 학생들을 종종 ‘교육 서비스’를 받는 ‘소비자’로 호명한다. 한마디로 ‘손님이 주신 돈으로 양질의 서비스를 생산하여 제공하며 그것을 위해 여타 비용을 최대한 줄이겠습니다’라는 의미다. 겉으로 보기엔 참 달콤한 이야기다.

그러나 사실 조금만 달리 생각해보면 이는 결코 우리에게 좋은 것이 아닌 것 같다. 학교 노동자들에게 적용되는 ‘최소비용 최대효과’라는 프레임은 우리가 전공하는 학문단위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느 학과가 특정시기 ‘돈 되지 않는다’ 여겨진다면, 지금의 ‘효율’이라는 프레임 안에선 얼마든지 ‘당연히’ 없어져야 마땅하다. ‘기업’과 ‘대학’의 운영방식이 ‘합체’하는 순간 나타나는 일이다. 지금껏 중앙대에서 이어져온 일련의 구조조정 사태들을 보면, 학교가 내세웠던 논리의 기저에 있었던 프레임은 항상 그와 같은 것이었다. 그 외에도 학교의 많은 ‘발전계획’들은 한없이 일방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왔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도, 내일도 ‘소비자’에 그쳐야한다면, 우리는 결코 이 공간의 ‘주인’으로서 발언할 수 없게 된다. ‘서비스’를 받는 ‘소비자’는 서비스를 제공하던 주체가 ‘다른 서비스’로 교환해주며 몇 가지 프리미엄만 얹어준다면 만족하는, 수동적 존재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대학의 ‘구성원’이라는 말과 ‘학생’은 점점 괴리될 것이다. ‘소비자’가 ‘기업’의 ‘구성원’이라는 소리는 못 들어봤으니까.

지금까지 청소노동자분들의 문제를 덮어두는데 기여했던 논리는, 머지않아 학생들의 동조 속에 학생들 자신에게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것은 그들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학을 살아가는 ‘구성원’들 모두가 자신의 권리를 당당히 행사할 수 있을 때, 그 구성원들이 자유로이 의사를 표명하고 ‘주인’이 될 수 있을 때, 대학의 의미는 비로소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대학이라는 곳은 단순히 땅 몇 평, 건물 몇 층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성원 한 명 한 명의 말, 글, 생각이 차곡차곡 쌓여 그 의미를 채우며 완성되기 때문이다. ‘대학사회’란 말이 그래서 있는 것 아닐까. ‘대학사회’가 붕괴된다면 껍데기 ‘대학’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따라서 대학은 ‘우리가 쓰는 곳’이다. 각자 대자보 한 장을 써서 캠퍼스를 도배하듯, 그렇게 각자의 소중한 생각들과 행위들로 만들어가는 곳. 누군가 ‘낡은 가치’라 말했던 ‘대학의 의미’는 사실 전혀 ‘낡은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진리’면 ‘진리’겠지!

캠퍼스 멀리서부터 빗질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해 뜨기 전이라 더 춥고 깜깜했던 어느 날, 붉은 가로등 아래 낙엽을 쓸고 계시던 한 청소노동자분의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염화칼슘을 머리에 이고 나르시다가 언 땅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크게 찧어 다쳤지만, 아무 말 할 수 없었다’고 말하시던 한 청소노동자분의 인터뷰를 찍은 적이 있다. 노조 출범식 아침, 자연대 옆 계단을 올라가다가 낙엽을 쓸던 청소노동자분들의 빗질소리를 녹음기에 담은 적이 있다. 그동안 이 캠퍼스의 풍경에서 충분히 드러나지 못했던 것들이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보고 들으며 공유했던 이 풍경은 그렇게 완성되어왔다. 몇 년간, 몇 십년간. 그 분들 각자가 또 그렇게 완성시켰다.

왜, 청소노동자분들을 지지하냐는 물음에 솔직히 그렇게 답하고 싶다. 첫 번째는, ‘함께 살아간다’ 생각하면서 그동안 그 수많은 외면들에 동조해왔던 내 개인적 부채감을 지금이라도 갚고 싶어서다. 함께하는 이들 대부분도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라 짐작한다. 두 번째는, 청소노동자분들과 함께 이 대학의 같은 ‘구성원’으로서 각자의 권리를 지켜내고, 함께 이 ‘대학’이라는 곳의 의미를 꼭 지켜내기 위해서다. 모이면 모일수록, 함께하면 함께할수록 그 가능성은 높아질 것 같다.

학교의 아침을 여는 빗질 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늘 그 자리에 있었던 소리일 테지만 지금에서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바람 부는 날, 천막을 떠올리다가

본관에서, 천막에서 청소노동자분들과 함께 한 시간이 꽤 되었다. 파업이 생각보다 오래가는 것 같아 걱정이다. 더 이상 학교가 책임을 피하지 말고 문제해결을 보았으면 한다. 이미 도급계약서도 공개된 마당에, 각종 부끄러운 짓은 다 벌인 마당에. 시간이 없다. 학교 본부가 더 이상 ‘의혈’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았으면 한다.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장민경(중앙대학교 학생)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 지영

    ㅋㅋㅋ 재밌네요.

  • 나도

    대학에서 하는 학문은 누구를 위한 학문인가? 가까이 있는 청소노동자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그 고통을 희생삼아 하는 학문은 올바른 학문이 될 수 없다.

논설
사진
영상
카툰
판화
기획연재 전체목록